숲에 들어갔다가 잠시 놀랐습니다. 깜짝 놀라기도 했습니다. 초록을 보러 들어갔다가 보러 간 그 눈은 감고 오랜만에 풍겨오는 풀 냄새를 맡았습니다. 어디선가 기계 소리가 들리는 것으로 보아 누군가 잡초를 베고 있는 듯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내가 향하는 숲 속으로 점점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초록의 냄새가 짙어졌습니다. 인적이라곤 하나 없는 그 숲을 이토록 짙푸르게 장악하는 냄새. 그래도 어딘가 깊숙이까지 가봐야...
1년 전 나는 섬에 있었다. 섬 여행이 특별하고도 각별한 취미가 된 것이 고등학교 때부터였으니 섬에 들고 나고 한 지도 꽤 오래된 일이 되었다. 그때 섬에 간 것은 힘겨운 일 때문이었다. 그 일 을 일일이 열거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조금만 밝히자면 당시 많이 믿는 한 사람이 있었고 그 믿는 사람에게 거짓말과 오물을 된통 뒤집어쓴 일이 있었다. 용서하자니 내가 뭐라고 감히 한 사람을 용서할까도 싶었고, 그냥 ...
지난 2월, 세계 최고령 피아니스트이자 세계 최고령 홀로코스트 생존자인 알리스 헤르츠좀머Alice Herz-Sommer가 11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내가 알리스를 알게 된 것은 <백 년의 지혜>라는 책을 번역하면서였다. 번역 작업을 하면서 지면으로 대단한 인물을 많이 만났지만, 알리스처럼 강인하고 낙관적인 사람은 본 적이 없다. 사람이 인생에서 얼마나 큰 고통을 겪을 수 있는지, 얼마나 의연...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시장은 꽃 시장이다. 번역 작업에 쫓기지 않을 때면 자주 꽃 시장에 간다. 평생 알파벳으로 된 검은 활자에 갇혀 살아서인지 고운 꽃을 보면 설레고 딴 세상에 들어선 기분을 느낀다. 어릴 때 늘 집에 꽃이 있었던 이유도 있을 것이다. 어머니가 10년 이상 꽃꽂이를 배우셨고 전시회에도 참여하셨다. 그래서인지 요즘도 나는 손님이 오는 날은 장보기나 청소보다 꽃부터 챙긴다. 손님 대접에 음식을 가...
음악을 하는 사람은 연주할 때 열심히 들어주는 사람이 제일 고맙다. 연주를 하는데 잡담을 하거나 딴청을 부리는 사람처럼 얄미운 사람은 없다. 그래서 나는 청중이 먹거나 마실 때에는 절대로 연주하지 않는다. 공자는 남이 노래 부를 때는 열심히 들었을 뿐만 아니라, 잘 부르면 다시 불러달라고 재청을 하고 뒤이어 함께 따라 불렀다니 정말 음악을 들을 줄 아는 모범적인 청중이었다. 공자는 식욕이 좋았고 특히 고기를 ...
<논어>에 공자가 자기 자신이 이런 사람이라고 말씀한, 즉 자화상에 해당하는 구절이 있다. “그(공자)의 사람됨은 발분하면 밥 먹는 것도 잊고, 즐거움으로 걱정을 잊으며, 늙음이 닥쳐오고 있다는 것도 알지 못하는 사람이다.” 초나라의 섭공(섭葉 지방의 관리인 심제량)이 공자의 제자 자로子路에게 공자의 사람됨이 어떠한지 묻자 자로가 대답하지 못하였는데 이 일을 공자에게 말하자 “너는 왜 내가 이런 사...
<논어>에는 현대인이 읽기에 따분하고 어렵고, 시대에 뒤떨어진 말씀이 많은 게 사실이다. 가령 “오직 여자와 소인(좀스러운 사람)은 다루기가 어렵다. 가까이하면 불손해지고 멀리하면 원망을 하기 때문이다”라는 공자의 말씀은 2천5백 년 전 당시 봉건 사회의 남존여비 사상의 한계를 넘지 못했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하지만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정도를 지나치는 것은 아니하느니만 못하다(과유불급)”라든지,...
올해도 어느덧 마지막 달에 접어든다. 이룬 것이 별로 없어서인지 해가 갈수록 세월이 빠르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20대는 20km의 속도로 세월이 가고, 60대는 60km의 속도로 더 빠르게 세월이 간다는 말을 누군가 정신신경학적으로 증명했다고 한다. 20대에는 뇌의 활동이 활발해서 단위 시간에 일어난 일을 다 기억하고 그 시간에 받은 기억의 용량이 많아 시간이 더디 가는 느낌을 받는 반면, 나이를 먹으면...
무소유’ 하면 으레 돌아가신 법정 스님을 생각한다. 많이 알려진 그분의 산문집 제목이어서도 그렇지만 한 번쯤 자신을 돌아보는 화두로서 무소유라는 단어를 나름대로 새겨본 사람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 생활에서 우리같이 범속한 자가 갑자기 무소유가 된다는 것은 며칠 안에 밥 굶어 죽을 가능성을 내포한 것이라서 비록 그 단어가 정확히 쌀 한 톨 없다는 뜻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함부로 던질 수 있는 단어는 아닐 것...
얼마 전 어느 분에게서 들은 무재칠시無財七施라는 말이 요즈음 자주 생각난다. 가진 재물이 없어도 베풀 수 있는 일곱 가지 보시라는 뜻인데 어느 불교 경전에서 유래한 말인 듯하다. 다정다감한 얼굴로 상대를 기분 좋게 하는 화안시和顔施, 거짓말, 욕설을 안 하고 유익한 말만 하는 언시言施, 남이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의 심시心施, 인자하고 부드러운 눈매의 안시眼施, 몸으로 돕는 신시身施, 자리를 양보하는 좌시座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