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일’이라는 걸 해왔다. 지금까지 20년 넘게 일한 셈이다. 그동안 딱히 맘 편히 쉬어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여행을 떠나서도 여행 작가로서 일이 우선이라 메모리 카드 가득 사진을 찍고 나서야 비로소 쉴 수 있었다. 그렇게 서서히, 알게 모르게 지쳐갔다. ‘이렇게는 안 되겠어. 재충전을 해야지. 그러다 보면 뭔가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오르겠지.’ 넘어진 김에 쉬어 간다고 올해는 좀 설렁설렁 ...
봄이 온다. 봄은 땅에서 뭔가 맹렬히 돋아나는 계절이지만, 반대로 땅이 입을 벌려 씨앗을 맹렬히 삼키는 계절이기도 하다. 나무라면 꼬챙이만 꽂아둬도 물이 오르고, 씨앗이라면 땅바닥에 굴러떨어지기만 해도 싹이 돋는다. 우주가 약동한다. 모든 길짐승, 날짐승의 피톨과 핏줄이 바쁘게 요동친다. 땅에 뭔가를 심지 않으면 안 된다. 봄에 씨앗을 땅에 묻어본 사람은 그 짓을 안 하는 봄을 견딜 수 없다. 한 톨 씨앗이 ...
옛날 옛적 저 먼 나라 이야기입니다. 결혼을 하기 위해 신붓감을 데려올 때는 신랑 쪽에서 신부 집에 그만한 대가를 지불해야 했답니다. 신부 집안의 내력과 사회적 지위 그리고 신부의 아리따움이나 건강함 등이 대가를 얼마나 지불하느냐의 잣대였다지요. 그 지역의 돈도 많고 지체도 높은 한 집안의 젊은이가 이웃 마을의 처녀를 신부로 맞으러 낙타를 아홉 마리나 끌고 왔답니다...
큰형과 13년 터울이다. 어려서는 무서워 형 앞에서 말도 못 꺼냈다. 오십이 가까워 늦둥이를 보신 늙은 아버지와는 다른, 실감 나는 아버지 느낌이었다. 나이가 드니 형이 더 이상 무섭지 않아 좋다. 오히려 다섯 형제 중 장남과 막내가 가장 잘 통하고 친밀하다. 중간의 형들이 샘을 낼 정도다. 같이 술을 마시면, 둘째 형은 큰형에게 안주 좀 잘 챙겨 드시라고 잔소리를 하지만 나는 젓가락으로 생...
내 어린 시절 가장 절실한 소원은 행복하고 화목한 가정이었다. 누구나 그렇듯 나름의 결핍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소년이여 야망을 가져라” “사내대장부로 태어났으면 한번 역사에 이름을 남겨야지” 따위의 말을 들을 때마다 속으로 이런 말들을 중얼거렸다. ‘훌륭한 사람 말고 행복한 사람이 되고 싶어. 그게 얼마나 큰 야망인데….’ 판사라는 직업에 종사한 후로 그 꿈이 얼마나 이루기 어려운 것인...
“소설 소재를 어디에서 찾느냐?” “소설을 어떻게 쓰기 시작하느냐?”는 질문을 종종 받는다. 다양한 소재로 잽싸게 책을 내다 보니, 또 시류에 맞는 소재를 발굴한다는 인상을 주다 보니 그런 것 같다. 이 지면을 빌려 답을 하자면, 어떤 이야깃거리들은 처음부터 마음에 커다란 덩어리로 들어앉아 있었다. 데뷔작인 <표백>은 ‘의미 있는 일을 할 수 없는 시대인 것 같다’며 자살을 결심하는 젊음에...
가끔 TV 음악 프로그램에서 해외 교포 출신 아이돌 가수를 보면 신기한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외국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자라다 어느 날 갑자기 한국에 들어와 어떻게 저리 자연스럽게 잘할 수 있는지. 아마 교포가 아니었다면 어림도 없을 것이다. 피는 못 속인다고, 사람의 유전자 속에 들어 있는 과거에 대한 정보가 그런 일을 가능케 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것을 개인이 아닌 인류 전체에 ...
새벽에 부산역에서 바라보는 영도는 푸른빛이 감도는 연어색이다. 부산역에서 영도를 바라볼 수 있는 곳은 광장 쪽 정면 출입구가 아니라 후면 부두 쪽 2층 출입구다. 내가 서울행 새벽 기차를 타는 날이 한 달에 두어 번. 숨 가쁜 일정을 치르고 자정 무렵 부산역에 도착해 같은 자리에 서서 영도를 건너다본다. 섬은 거대한 별 무리로 반짝인다. 환상적이다. 환상은 실체를 잘 알지 못할 때 품는 욕망의 현상이다. 섬을...
“이봐요, 칠팔월 겨우 3개월 피는 감자꽃도 삼재환란을 다 당하건만, 하물며….”
이게 무슨 말인지 잠깐 멍했습니다.
그렇지요, 감자꽃 피어 있을 몇 개월 사이에도 엄청난 비와
지나치게 뜨거운 햇빛과 때론 심한 가뭄을 다 견뎌야 하네요.
그래요, 하물며… 이 단어가 가슴을 메우는군요. 하물며 우리에게 별의별 일들이 왜 안 생기겠어요.
날씨마저 덥디...
나는 지난 4월 초순까지만 해도 대한민국 박물관의 꽃이라고 불리는 ‘서대문 자연사박물관’에서 일했다. 사람들은 자연사박물관에서 일한다는 것만으로도 호감을 갖는다. 왠지 자연사를 연구하는 사람이라면 자연 친화적이며 지구를 지켜줄 수 있을 것 같은가 보다.
내가 요즘 주로 하는 강연 제목은 ‘공생 멸종 진화 - 여섯 번째 대멸종에서 살아남기’다. 나를 향한 사람들의 호의를 충분히 이용한 강연이라고 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