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책의 마무리 작업을 하던 중이었다. 출판사로 거의 출근하다시피 하며 원고를 만지고 있었다. 나의 ‘60번째 생일’을 축하하자며 시작한 기획이었다. 경자년이 가기 전 책이 나오게 하자는 목표 아래 모두들 마우스에 불이 붙도록 일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순식간에 팬데믹의 공포가 출판사를 덮쳤다. 출판사 식구들이 만나던 사람 중에 확진자가 나왔고, 나를 포함해 출판사를 방문한 모든 사람이 즉시 선별 진료소로 가야...
병이 전염되는 것처럼 불행도 전염된다. 불행이 전염되는 것처럼 행복도 전염된다. 우리가 서로 곁에 있다면 인간을 둘러싼 생각이나 행동 따위는 쉽게 전염될 수 있다. 팬데믹을 겪으며 깨달았다. 당신이 안녕해야 내가 안녕할 수 있다는 점, 혼자만의 안녕은 아무 소용이 없다는 점을. 당신의 문제, 동네의 문제, 사회의 문제, 나라의 문제, 세계의 문제가 나와 너무 깊이 연루되어 이곳에서 그곳을 밤새 걱정할 수밖에 ...
이런 질문을 받았다. “제가 왜 살아야 하는지 잘 모르겠어요. 가정도 직장도 있는데 모든 게 짐처럼 버거워요. 제가 살아야 할 이유를 알려주세요.” 나는 그에게 이유를 찾아주려고 생각에 잠긴다. “부인도 있고 자식도 있는데 행복하지 않나요?” 그가 답한다. “집에서 한 번도 행복하다고 느낀 적이 없어요. 그렇다고 아내나 아이들한테 문제가 있는 건 아니에요. 하지만 함께 있어도 고독하고 허전한 느낌은...
나는 오래된 주택에 산다. 대문은 군데군데 녹이 슬었고 돌계단에는 이끼가 끼었다. 따뜻한 계절에는 담쟁이가 올라오지만, 겨울이면 앙상한 줄기 뒤로 나잇살 가득한 벽돌담이 드러난다. 지붕은 적당히 내려앉고 창문은 뻑뻑하다. 또 마당에는 다듬지 않은 나무와 꽃들이 제멋대로 얽혀 있다. 여기가 바로 20년째 살아가는 우리 집이다. 떠나려던 때가 있었다. 집의 연륜이 고스란히 불편함으로 다가오기 시작하자 ...
간혹 언론 인터뷰를 마치고 나면 인터뷰어 측으로부터 “옛날 사진들을 보내달라”는 요청을 받는다. 그럴 때면 좀 난감해지는데, 우선 나는 옛날이고 지금이고 사진을 찍거나 찍히는 걸 그리 즐기는 사람이 아니라서, 가지고 있는 내 사진이 썩 많지 않다. 독사진은 더 그렇다. 과거 필름 카메라 시대에 찍은 사진들을 디지털로 스캔한 것도 몇 장 없다. 예전 사진들을 보고 있자면 왠지 부끄러워져서 멀리하는 편이다. 그래...
2000년도 봄, 가뭄이 극심할 때 나는 수처리 전문가로서 아무리 더러운 물이라도 처리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고 물을 찾고 있었다. 가뭄 끝에 내린 빗물을 모두 다 버리는 것을 보고, 빗물도 처리만 잘하면 유용하게 쓸 수 있다는 생각으로 빗물 연구를 시작했다. 그러면서 일반인이 산성비나 물관리 등에 대한 오해가 깊은 것을 알았다. 과감하게 전공인 수처리를 버리고 ‘빗물 박사’라는 이름으로 대중의 눈높이에 ...
그렇게 오래 퍼부어도 되나 싶은 대단한 홍수, 까닭 모를 어마한 산불, 어쩌면 그리도 잘게 부수고 지나가는지 입이 딱 벌어지는 토네이도, 아프리카의 흙물을 먹는 가난…. 일곱 개 대륙을 지닌 이 큰 지구가 지구촌이라 불리는 것을 실감할 때가 텔레비전에서 뉴스를 볼 때입니다. 거스를 수 없는 자연의 힘과 이를 이기지 못하는 인간의 한계를 한동네 일처럼 보게 되니까요. 창밖은 장대비에 젖고 안에서는 빗소리에 젖으...
이젠 살아온 시간보다 살아야 할 시간이 더 짧을 것 같다. 이런 생각을 하니 내게 주어진 한순간 한순간이 보석처럼 소중하다. “이 귀한 시간을 어떻게 살까?” 새삼스레 다시 던지는 질문이지만 사실 오래된, 내 삶에서 가장 많이 던진 질문이다. 답을 찾으려고 수많은 책을 읽었고, 다양한 사람을 만났으며, 살아낸 하루를 반추하며 열심히 일기를 썼다. 질문에 너무 몰입한 것일까? 급기야 나에 대해, 인간에 대해, ...
해바라기가 무리 지어 피는 여름날이 오면 언젠가 한밤중에 날아온 누군가의 메일이 생각난다. 길지 않은 몇 줄의 글과 사진 한 장이 전부이던 낯선 독자의 편지. “지난달 불의의 교통사고로 돌아가신 아버지 생각 때문에, 힘든 시간을 이겨내려고 책을 읽으며 지내요. 이 사진은 떠나시기 한 주 전에 저를 데려가셨던 해바라기밭이에요. 그곳에서 환하게 웃으시던 아버지가 너무 보고 싶습니다.” 산으로 둘러싸인 ...
나는 걷는다. 산천경개山川景槪를 벗 삼아 주유周遊하고픈 소망이 있고, 그 소망은 나에게 한 달에 서너 번의 길 떠남을 재촉하는 중이다. 그렇게 내 안의 성화에 쫓기듯 떠난 길 위에서 봄날의 신록이 무르익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노라면 나무들의 푸른 생명력에 마음은 맑아지고, 가슴은 저절로 두근대기 마련이다. 나도 그들도, 살아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즐거운 일임을 깨닫게 되는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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