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3년 12월 시간의 길이 (마종기 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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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도 어느덧 마지막 달에 접어든다. 이룬 것이 별로 없어서인지 해가 갈수록 세월이 빠르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20대는 20km의 속도로 세월이 가고, 60대는 60km의 속도로 더 빠르게 세월이 간다는 말을 누군가 정신신경학적으로 증명했다고 한다. 20대에는 뇌의 활동이 활발해서 단위 시간에 일어난 일을 다 기억하고 그 시간에 받은 기억의 용량이 많아 시간이 더디 가는 느낌을 받는 반면, 나이를 먹으면 뇌의 반응이 늦어지고 뇌가 기억하는 양도 적어져 시간이 빨리 가는 느낌을 준다고 하던가…. 시간 이야기를 하다 보니 오래전에 우화 같은 글에서 읽은 한 추장의 말이 생각난다. 남태평양의 사모아 섬, 그 정글 속에 살고 있는 적은 부족의 추장이 한번은 무슨 곡절로 문명사회에 여행을 가게 되었다. 몇 달간 문명국을 여행하고 돌아온 추장은 자기 부족을 모아놓고 여행담을 풀어놓는데 그의 황당한 말이 그대로 문명 비판의 정곡을 찌른다. 예를 들면 이런 말.
“명민한 부족민들이여, 문명국에 갔더니 보이지도 않는 ‘시간’이라는 요상한 것이 있었다. 사람들은 시간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조그만 기계를 팔목에 차고 다녔다. 눈을 한 번 감았다 뜨면 그것을 일 초의 시간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그런 것을 60개 모아놓고 일 분의 시간이라고 했다. 그 일 분을 또 60개 모아놓고 한 시간이라고 했고 다시 그런 한 시간을 24개 모아놓고 하루라고 말했다. 우리같이 아침에 눈뜨면 하루가 시작되고 그러면 각자가 맡은 일을 하고 저녁에 해가 지면 쉬기도 하고 놀기도 하고 잠자리에 들고 다음 날 아침 해가 뜨고 눈을 뜨면 새날이 되는 것인데, 그게 바로 문명인들이 말하는 하루라고 말할 수 있겠구나. 문명인들은 그런 하루를 산산이 쪼개놓고 시간이라고 부르면서 ‘시간이 없다’느니 ‘시간을 놓쳤다’느니 ‘시간에 쫓긴다’고 말하고 있었다. 심지어는 자기들이 만들어놓은 시간을 가지고 ‘시간이 없어 우리가 망했다’며 절망하기도 하고 ‘시간이 우리를 살렸다’고 외치기도 했다. 자기들이 만들어놓은 허무맹랑한 것에 매달려 안달하며 죽는 시늉까지 하는 것을 보고 나는 웃음을 참기가 힘들었다.”
하나 추장이 뭐라고 하건 우리는 어차피 문명인이고 그래서 시간이라는 괴물을 무시하고 살 수는 없다. 우리는 시간이라는 것을 유용하게 효과적으로 사용하는 사람을 한마디로 현명한 사람이라고 여긴다. 모든 사람에게 시간은 그 길이가 다르다. 그 값어치도 다르고 그 효율성도 다르다. 현명한 사람은 단위 시간 안에 많은 성과를 얻거나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덜 현명한 사람은 자기 소유의 귀한 시간을 잘 이용하지 못해 불행함을 느끼거나 한평생을 허둥대며 허비해버린다. 전부라고 할 수는 없지만 사회에서 존경받고 여유롭다는 사람은 자기 소유의 시간을 유효적절하게 사용하는 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내가 평생 생활신조같이 아껴온 말이고 많은 사람이 좋아하는 말 중 <논어>에 나오는 공자의 말씀이 있다. “지지자 불여호지자요, 호지자 불여낙지자라知之者 不如好之者 好之者 不如樂之者.” 아는 것은 좋아하는 것만 못하고 좋아하는 것은 즐기는 것만 못하다. 도를 아는 자는 도를 좋아하는 자만 못하고, 도를 좋아하는 자는 그것을 즐기는 자만 못하다는 말. 내가 의사였을 때 의학과 의술을 잘 아는 것이 중요하지만 그런 지식뿐만 아니라 의사로서 의술을 베푸는 것을 좋아하는 게 한 수 더 위고, 그보다는 비록 고생스러워도 환자의 건강을 위해 성심을 다하는 의사로서의 시간을 나름대로 즐기는 자가 최고의 의사라고 생각했다. 직장인이 자신의 직업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직업을 좋아하는 게 한 수 더 위이고, 그 보다는 그 직업 자체를 하루하루 즐긴다면 그보다 더 좋을 수가 있으랴. 그런 이는 바로 자기 생의 모든 시간을 통째로 즐기는 사람일 것이다. 시간은 그 길이가 아니라 질이, 시간의 용도와 효과가 사람을 행복하게도 하고 불행하게도 만든다고 믿는다.
생의 시간을 통째로 즐기는 사람. 순간의 기분, 하는 일, 가족과 친구와 어울리는 모든 순간을 진심으로 좋아해 생의 시간을 통째로 즐길 수 있다면 이보다 더 가치 있고 부유한 인생이 또 있을까요. 글을 쓴 마종기 씨는 의사라는 이성적 직업을 하루하루 즐기며 시인이라는 감성적 직업까지 즐거워한 지혜로운 ‘시간 부자’입니다. 그는 1959년 의대 본과 1학년 때 <현대문학>에 ‘해부학교실’ ‘나도 꽃으로 서서’ 등의 시를 발표해 등단했습니다. 1966년부터 미국에서 살며 오하이오 의대의 방사선과 교수와 아동병원 부원장 등으로 일하는 중에도 고국에 꾸준히 시집과 산문집을 발표했으며, 한국문학작가상 등 유명한 상을 두루 수상했습니다. 가수 루시드 폴과함께 쓴 서간집 <아주 사적인, 긴 만남>을 출간했고, 올해도 <우리 얼마나 함께> <이 세상의 긴 강> 등을 연이어 선보인 그의 글은 이성과 감성이 조화를 이룬 삶의 지혜를 생각해보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