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근길에도, 퇴근길에도 나는 늘 ‘명품 패션’과 함께한다. 명품 옷과 백으로 칠갑을 하냐고? 아니다. 143번 버스를 타고 조석으로 청담동 로데오 거리를 오가기 때문이다. 루이비통이며 아르마니, 프라다, 구찌, 까르띠에, 질샌더 그리고 조영남 씨가 ‘돌잔치 가봤니’라고 부르는 돌체 앤 가바나까지 운집한 거리를 관람석(비록 버스 좌석이지만)에서 즐기게 해주는 143번 버스에 감사하며, 눈 호사를 ‘원 없이’ 한...
어느 날 문득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빌리 조엘의 노래에 아무 이유 없이 눈가가 젖는다. 좀 황당했는데, 찰나의 깨달음이 번개처럼 나를 스쳐 간 것이다. 단 한 번뿐인 삶이 영롱하지 않다고 무를 수는 없는 노릇이다. 간절히 영롱하고 싶다면 이 무덤덤한 삶이 영롱해질 때까지 살아야 한다. 어떤 문은 닫히고 또 어떤 문은 열린다. 어떤 접시는 깨지고 또 어떤 접시는 멀쩡하다. 사물의 모든 이치가 투명해질 때 내가 ...
미국을 건너가서도 방랑기가 많고 평생 어디 매여 살 것 같지 않던 화가가 아주 예쁘고도 지적이며 집안도 좋은 미국 여성과 결혼을 했더라고요. 그녀를 닮은 예쁜 딸도 사진 속에서 웃고 있었습니다. 여기서도 삶이 허술해 보이고 성공할 것 같지 않은 이 남자가 보기에도 과한 여자를…. 어디가 뛰어난 구석이 있는 걸까, 그 미인이 빠진 매력이 어떤 부분일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오랜만에 우리나라에 다니러 온 그 화가...
대학 1학년 때였다. 여름방학을 끝내고 고향 파서막에서 40리 길인 밀양역으로 향했다. 그날 어머니는 “너 기차 타는 걸 봐야겠다”면서 함께 나서셨다. 어머니는 늘 늦지 않게 일찍 일찍 나서야 한다 하셨다. 어머니와 내가 버스로 밀양역에 도착했을 땐 열차 출발 시간보다 한 시간이나 더 전이었다. 8월의 불볕더위가 한창이었다. 나는 어머니와 함께 역전에 있는 다방에 들어갔다. 아마도 어머니 생애 처음으로 다방이...
어떤 부부가 오래 살았지만 자식을 두지 못했답니다. 그 때문인지 부부는 난 기르기에 열중하였습니다. 주변에 공장이나 시끄러운 곳이 들어서면 난 기르기에 적합치 않다고 이사하기를 일곱 차례를 하였다니, 사람들이 맹모삼천지교 孟母三遷之敎는 들어보았어도 난 때문에 일곱 번 거처를 옮기는 이 부부를 보고 유난하다고들 하였습니다. 난부부칠천지처 蘭夫婦七遷之處라고 하던가요? 그간 모은 난은 몇천 개의 숫자도 대단하지만 ...
금혼식을 맞이하는 부부가 있었답니다. 그러니까 결혼해서 50년을 같이 산 것이지요. 이 부부는 평생 큰 소리 한 번 내지 않고 금실 좋다는 평판이 자자하였답니다. 자식들이 합세하여 금혼식 기념 여행을 떠났습니다. 다음 날 아침 레스토랑에서 분위기를 만들어주기 위해 두 부부만 따로 자리하게 했습니다. 늘 그랬듯이 그날 아침에도 머리가 백발인 남편이 아내에게 빵을 떼어주는 노부부의 다정한 모습이, 다른 테이블에 ...
봄날에 시를 써서 무엇해봄날에 시가 씌어지기나 하나 목련이 마당가에서 우윳빛 육체를 다 펼쳐 보이고개나리가 담 위에서 제 마음을 다 늘어뜨리고 진달래가 언덕마다 썼으나 못 부친 편지처럼 피어 있는데시가 라일락 곁에서 햇빛에 섞이어 눈부신데종이 위에 시를 써서 무엇해봄날에 씌어진 게 시이기는 하나 뭐.- 나해철의 ‘봄날과 시’도대체 이렇게 시를 쓰는 시인은 어떤 분일까요?어떻게 이렇게 쉽고도 적절한 단어들을 엮...
“이번 호 몇 페이지에 나온 기사의 사진에서 본 건데요,그거 어디서 사면 되나요?”“네? 잠깐만요. 네, 제가 그 페이지를 펼쳤는데 어떤 걸 말씀하시나요?”“오른쪽 사진의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는 소품인데요.”“아, 네. 이걸 말씀하시는 거군요.”“그거 어디서 얼마에 파는지 알려줄 수 없나요?”“글쎄요….”“그것 좀 그분 댁에 물어봐서라도 알려줄 수 없나요? 어디서 샀는지…. 꼭 좀 알려주세요.”“아, 네. ...
“아, 이 양반 팔십둘에 돌아가셨네.”“누가 돌아가셨어요?”“측천무후.”“에잉? 누구?”잠시 그가 누구인지 생각하다가 거의 화를 내면서 되묻는 우리 어머니.“그 양반이 우리 친척이나 되우? 나한테까지 부고장 돌릴 일 있수?”최근 눈도 어두워지면서 더욱 향학열(?)에 불타는 아버지께서는 역사 소설을 읽어주는 테이프를 구하셔서 틈만 나면 리시버를 귀에 꽂고 들으십니다. 그러다가 측천무후가 돌아가셨다는 대목에서 리...
저것은 맨 처음 어둔 땅을 뚫고 나온 잎들이다. 아직 씨앗인 몸을 푸른 싹으로 바꾼 것도 저들이고, 가장 바깥에 서서 흙먼지 폭우를 견디며 몸을 열 배 스무 배로 키운 것도 저들이다.더 깨끗하고 고운 잎을 만들고 지키기 위해, 가장 오래 세찬 바람 맞으며 하루하루 낡아간 것도 저들이고,마침내 사람들이 고갱이만을 택하고 난 뒤, 제일 먼저 버림받은 것도 저들이다.그나마 오래오래 푸르른 날들을 지켜온 저들을 기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