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9년 08월 그 여름날의 어머니 (김언호 도서출판 한길사 대표)
-
대학 1학년 때였다. 여름방학을 끝내고 고향 파서막에서 40리 길인 밀양역으로 향했다. 그날 어머니는 “너 기차 타는 걸 봐야겠다”면서 함께 나서셨다. 어머니는 늘 늦지 않게 일찍 일찍 나서야 한다 하셨다. 어머니와 내가 버스로 밀양역에 도착했을 땐 열차 출발 시간보다 한 시간이나 더 전이었다. 8월의 불볕더위가 한창이었다. 나는 어머니와 함께 역전에 있는 다방에 들어갔다. 아마도 어머니 생애 처음으로 다방이라는 곳에 들어갔을 것이다. 손님은 서너 명밖에 없었다. 다방에는 인기 절정이던 성재희의 허스키한 목소리의 노래가 전축 스피커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보슬비 오는 거리에 추억이 젖어들어 / 상처 난 내 사랑은 눈물뿐인데 /
아, 타버린 연기처럼 자취 없이 떠나버린 / 그 사람 마음은 돌아올 기약 없네.
그때 어머니는 40대 중반이었다. 농사를 지어 우리 7남매를 학교에 보내던 놀라운 의지력을 갖고 계시던 어머니의 배웅을 받으면서 나는 덜컹거리는 열차에 몸을 싣고 서울로 올라왔다. 나의 대학 시절은 박정희 군사정부의 굴욕적인 한일회담을 반대하는 국민운동으로 소연했다. 1964년 3월부터 그 같은 한일회담을 반대하는 운동이 대학가는 물론이고 민족적인 양심을 가진 지식인들에 의해 치열하게 전개되면서 나라 전체가 요동치고 있었다. 해가 바뀐 1965년에도 이 운동은 잦아들지 않았다. 정부는 조기 방학으로 대학의 문을 닫게 했다. 나는 4월 중순 한일회담을 반대하는 데모에 가담했다가 서대문 구치소에 두 달간 갇혀 있어야 했다. 자유의 소중함을 실감했다고나 할까. 도둑들과 같은 방을 쓰면서 그들의 세계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일말의 연민 같은 것도 갖게 되었다. 우리 방 옆에 있던 사형수가 처형되던 날 밤, 소란스럽던 구치소가 적막같이 조용해지는 것도 체험했다. 6월에 풀려나 집으로 내려갔을 때 어머니는 휴, 한숨을 내쉬셨다. 놀란 가슴을 저어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유야 잘 모르지만 우리 아들이 감옥까지 가다니, 했을 것이다. 다시 여름방학을 끝내고 서울로 오기 위해 밀양역으로 향할 때 어머니는 역까지 같이 가자면서 또 따라나섰다. 어머니는 너무 나서지 말라는 말씀을 몇 번이나 했다. 밀양역에 도착해 나는 어머니와 함께 다시 그 다방에 들어갔다. 다방은 한산했고 성재희의 그 노래가 여전히 흘러나오고 있었다. 학교 공부를 하지 않았고 세상에 출입하지 않는 어머니지만, 부지런한 아버지와 함께 농사로 집안을 일으켜 세웠다. 험한 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 많은 제사를 다 치러냈다. 그 어머니와 함께 나는 두 번이나 역전 다방에 들어가 커피 같은 걸 마시면서 같은 유행가를 들었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그 여름날의 역전 풍경을 오늘 다시 떠올린다. 어머니는 그때 하얀 모시 치마저고리를 입고 있었다. 그보다 한참 후인 1987년 여름, 나는 한길역사기행단을 이끌고 낙동강 하류 유역 답사에 나섰다. 서울에서 부산까지의 길 영남대로를 연구한 고려대 최영준 교수가 안내했다. 소설가 김정한 선생에게 낙동강의 정신에 대한 특강을 청해 들었다. 일행 40여 명은 김해 일대를 답사하고 우리 집으로 향했다. 어머니에게 점심을 부탁드렸다. 마을 사람들이 도와주었다. 12시에 도착해 1시까지 점심을 먹고 다시 표충사로 갔다가 서울로 돌아왔다. 어머니는 음식을 잘한다는 소문이 나 있었다. 큰 농사를 꾸리려면 일꾼들을 많이 데려야 했고, 먹는 걸 늘 푸짐하게 내놔야 했을 것이다. 어머니는 감자와 수박을 먹고 떠나는 우리 일행에게 “우리 아들 잘 부탁합니데이” 하셨다.
올봄에 헤이리에 같이 사는 번역가 P 씨가 연로한 어머니를 모시고 진해 벚꽃놀이를 다녀왔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는 아, 했다. 어머니, 아버지가 계시지 않으니, 모시고 어디 갈 수도 없구나….
내가 뛰놀던 고향의 우리 집은 지금 비어 있다. 어머니, 아버지가 계시지 않으니 고향도 가지 않게 된다. 전화라도 해서 어머니 목소리라도 듣고 싶은데, 그 어머니가 계시지 않으니. 농사와 자식을 위해 생을 바쳐 헌신하신 어머니. 그 존재감이 가슴이 시리도록 절절해진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한여름의 폭염을 마다 않고 일하시던 그 들녘이 불현듯 보고 싶어진다. 어머니와 아버지의 인고의 정신이 서려 있는 논밭. 수천 마리의 새 떼가 하늘을 날고, 노을이 지평선에 내릴 땐 천지가 경이로웠다. 여름날이면 나는 어머니를 생각한다. 흰 모시 치마저고리로 차려입은 어머니가 내 앞에 서 계신다.
* 작열하는 햇살과 장맛비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는 여름날, 김언호 대표가 어머니 이야기를 잔잔히 들려줍니다. 1976년 한길사를 창립해 지금껏 책을 만들고 있는 그는 평생을 농사밖에 몰랐던 어머니에게서 끈기와 인내, 지혜를 배웠습니다. 이 여름이 가기 전에 어머니께 전화 한 통 드리거나, 고향집에서 어머니 좋아하시는 <가요무대>라도 함께 시청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