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9년 09월 행복한 유산일기 (이영혜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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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을 건너가서도 방랑기가 많고 평생 어디 매여 살 것 같지 않던 화가가 아주 예쁘고도 지적이며 집안도 좋은 미국 여성과 결혼을 했더라고요. 그녀를 닮은 예쁜 딸도 사진 속에서 웃고 있었습니다. 여기서도 삶이 허술해 보이고 성공할 것 같지 않은 이 남자가 보기에도 과한 여자를…. 어디가 뛰어난 구석이 있는 걸까, 그 미인이 빠진 매력이 어떤 부분일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오랜만에 우리나라에 다니러 온 그 화가가 보여주는 사진이랑 그의 얼굴을 찬찬히 다시금 봅니다. 어떻게 이런 미인을 얻었냐고 물었더니, 싱글싱글 웃으면서 자신의 미국 아내 만난 이야기를 합니다. 처음 그녀와 식사한 날, 식사 중에 자꾸 코가 나오려고 해서 “익스큐즈 미” 하고는 밖에 나가서 코를 풀고 들어왔답니다. 그 여성이 어디를 갔다 오느라고 실례를 청했냐고 묻기에 ‘코 풀러 갔다 왔다’고 대답했답니다. 그 여성은 이 대목에서 그만 화가에게 넘어간 것입니다.
서양에서는 이상하게 식사 시간에 코 푸는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지요. 저도 한두 번 경험했습니다만 식사하다가 심할 정도로 코를 팡팡 풀어대는 외국인들을 본 적이 있습니다. 어쨌든 그렇게 코를 풀어도 실례가 되지 않는데, 구태여 밖으로 나갔다 오는 동양에서 온 화가. 이 신선한 행동은 그녀가 생각할 때 거의 궁중 법도를 지키는 수준의 교육을 받은, 아주 예의 바른 남자로 여긴 것입니다. 참으로 어이없는 이런 이유 때문에 그녀의 마음이 다가가기 시작했답니다. 물론 이런 사실은 결혼한 후 들었다지만, 이 동양에서 온 남자가 보여준 조금 다른 태도가 모두 그녀에게 매력적이었다는 겁니다. 삶은 이렇게 어느 순간 극적인 주파수를 발한다고 합니다. 과학으로 판단하기엔 너무나 인간적이고 숫자로 말하기엔 너무나 아름다운 우리 삶의 오묘함, 사랑의 시작에 경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조그만 차이로 큰일을 해낸 자랑스러운 대한 남아라고 치켜세우면서도, 코 풀다가 결혼하게 된 남자라고 놀려댔습니다. 결국 우리나라 예절이 그를 성공시킨 것입니다.
문화는 정말 습習입니다. 계속되어온 관습. 우리는 예전에 남이 대접을 하면 ‘아, 잘 먹었다’며 트림을 해야 상차림을 인정하는 배려의 제스처였다지요. 그런데 지금은 서양 잣대를 가지고 그것이 좋지 않은 매너라고 자꾸 들어서인지 이제는 우리 눈에도 좀 안 좋아 보이긴 합니다. 그런데 아무리 서양 식탁에서라도 코 푸는 것 역시 옆에서 보기에 그다지 멋진 모습은 아닙니다. 우리가 다른 나라 예절도 예를 다하여 익히듯이 우리의 예절도 누군가가 스토리로 말해주면 참 멋있고도 국제적인 독특한 해설이 될 것 같습니다. 어쨌든 우리는 식탁 예절로 트림도 하지 말고, 코도 풀지 않는 두 가지를 다 익혀야 할 듯싶습니다. 이름 하여 우리는 예절에서도 혼돈의 시대를 살고 있다고나 할까요?
그러니 우리가 좀 어지럽습니까? 익히고 배울 것이 두 배니까요. 이렇게 글로벌해지기 때문에 오히려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더 알아야 하는 것인지 모릅니다. 문화적 배경을 아는 것은 적어도 남에게 지지 않을 수 있는 룰을 하나 더 갖는 셈입니다. 철학은 그래서 필요합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나를 지켜낼 수 있고, 기를 펴게 하는 것, 그리고 의미를 전달하여 남이 경청하게 만드는 힘을 갖추는 것입니다. 마치 몸의 병을 치료할 수 없는 의학이 가치가 없듯이, 우리 문화나 우리 것에서 아름다움을 찾아낼 수 없는 철학은 유익함이 없을 것입니다.
일본의 어느 작고 예쁜 전통 여관집의 젊은 주인. 그들 집안의 문장은 동전 여섯 개라는 설명을 시작하자 ‘하필이면 동전 따위를…’ 하며 듣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사람이 죽으면 저승으로 가는 뱃삯으로 여섯 냥이 필요하다고 믿었답니다. 그러니까 그만한 노잣돈은 있는 집안이어서 누구에게도 아부하거나 굴하지 아니하고, 옳다고 믿으면 충성을 다하는 기개를 가졌다는 내력을 이야기하는 주인 남자의 얼굴이 버젓하고 의젓해지고 있었습니다. 물건을 물려받은 것이 아니라 그런 의지를 물려받았다는 설명에, 제가 너무 상업적이라고 여긴 마음이 속으로 미안했습니다. 우리나라 상평통보같이 생긴 동전 여섯 개 그림을 쿠션에 프린트한 그 집의 문장이 오히려 멋지게 보였습니다. ‘아, 유산이 있으면 저렇게 패턴화해 활용해도 좋겠다….’ 결국 집안에서 남겨줄 유산은 그 집안만의 남다른 이야기를 문화적으로 잘 해설하는 삶의 기술인지도 모릅니다. <행복이 가득한 집>의 창간 22주년 특별 부록으로 선물해드리는 <행복한 유산 일기>는 가정을 남다르게 지키기 위해서, 국제적인 멋쟁이로 만들자는 작고도 큰 운동입니다. 유산이 있으면 없는 것보다 훨씬 든든합니다. 유산이 음식 속의 소금처럼 보이지 않는 것이면 평생을 간직할 수 있습니다. 유산을 남길 수 있는 가정은 정말 행복이 가득한 집입니다. 이것은 우리 열혈 독자들께서 보내주신 아이디어이기도 합니다. 이런 생각을 나누고자 하는 즐거움 때문에 매월 <행복이 가득한 집>을 발행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