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9년 10월 가을의 외로움 (장석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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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문득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빌리 조엘의 노래에 아무 이유 없이 눈가가 젖는다. 좀 황당했는데, 찰나의 깨달음이 번개처럼 나를 스쳐 간 것이다. 단 한 번뿐인 삶이 영롱하지 않다고 무를 수는 없는 노릇이다. 간절히 영롱하고 싶다면 이 무덤덤한 삶이 영롱해질 때까지 살아야 한다. 어떤 문은 닫히고 또 어떤 문은 열린다. 어떤 접시는 깨지고 또 어떤 접시는 멀쩡하다. 사물의 모든 이치가 투명해질 때 내가 살아 있는 게 기쁘다. 단 하나의 삶을 얼마나 많은 잡다한 열정들이 밀어올리고 있는가를 나는 갑자기 깨닫는다. 아아, 시월상달이다 ! “불행을 요리하는 방법,/ 나쁜 소식을 견뎌내는 방법,/ 불의를 최소화하는 방법,/ 신의 부재를 극복하는 방법”(심보르스카의 ‘광고’)을 모르는 이들에게도 가을의 혜택은 고루 미친다. 올해도 태풍 없이 맞는 이 가을이 기특하고 고맙다. 아람이 굵은 밤들이 찬 이슬에 함초롬히 젖은 밤나무 숲 풀밭 위로 툭, 투둑 하고 떨어진다. 화단의 맨드라미는 핏빛으로 붉고, 늙은 어매는 밤마다 알아들을 수 없는 잠꼬대를 한다. “울타리 밖에도 화초를 심는 마을이 있다/ 오래오래 잔광이 부신 마을이 있다/ 밤이면 더 많이 별이 뜨는 마을이 있다.”(박용래의 ‘울타리 밖’) 푸른 하늘과 잔광이 부신 가을 천지다. 밤이면 더 많은 별이 뜨는 마을, 어른들은 다들 편안하다.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밥은 달고, 근력은 여전하신가. 그렇다 하더라도 몸은 시들고 높이 매달린 것들은 여지없이 떨어진다. 초목을 비롯한 살아 있는 것들은 시듦과 조락을 피할 수 없는 노릇이다. 상고시대 이래로 가을은, 양은 가고 음이 천지간에 퍼지는 시절이니까 !
어느덧 대추나무 가지에 열린 대추들은 알이 굵고 붉어졌다. 하찮은 대추라 해도 저절로 익는 법은 없다. 대추도 역경을 견디고 시련을 이겨내야만 단맛이 배고 마침내 붉게 익는다. 대추 한 알이 그러하듯 인생 또한 고진감래 苦盡甘來가 아닌가. 나이 마흔 넘어 겨우 깨달은 진리다. 식멸되지 않은 망상에 시달리는 범부에게도 진리는 단순하게 다가온다. “대추가 저절로 붉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태풍 몇 개/ 저 안에 천둥 몇 개/ 저 안에 벼락 몇 개.”(장석주의 ‘대추 한 알’) 어느 해 가을에 적은 이 졸시 拙詩가 올가을 시구로 뽑혀 광화문 글판에 나붙었다. 시의 임자를 알아본 눈 밝은 이들에게서 반가운 인사를 받았다. 나는 대추를 새롭게 발견한 것이다. “진정한 발견의 항해는 새로운 땅을 찾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눈으로 보는 데 있다.”(마르셀 프루스트) 맞는 얘기다. 새로운 인생을 살고 싶다면 새로운 눈으로 인생을 바라보자.
가을은 여뀌와 황국 黃菊과 서리와 초빙 初氷을 거느리고 깊어간다. 기쁜 일도 없고 슬픈 일도 없는 날들이 한가롭고 평화롭게 흘러간다. 무서리 내리는 밤 섬돌 밑에선 귀뚜라미가 울고, 명월 아래로는 기러기 떼가 떠간다. 저 천하의 명필이 휘갈겨 써내려간 살아 꿈틀거리는 서체 書體 ! 오늘 낮에는 삼림욕장을 다녀왔다. 걷는 동안 좋은 생각을 품었다. “좋은 생각이란 걸으면서 젖어드는 생각들이다.”(니체) 다른 생각은 조금도 품지 않았다. 그저 그 길을 따라갔을 뿐. 가는 길에 살 오른 뱀을 보았다. 마주치는 순간 저도 나도 놀라 흠칫했지만 가는 길이 서로 달랐으니 상관하지 않았다. 산그늘 길어지고 붉은 해가 넘어간다. 쉬이 잠 못 드는 밤에는 여름 내내 붙들고 있었으면서도 끝내 다 읽지 못한 <벽암록>을 마저 읽는다. 짧은 산자락 아래에 집을 짓고, 아들을 낳고 딸을 낳고, 씨나 뿌리며 살고 싶었다고. 들찔레처럼 혹은 쑥대밭처럼 우거져 살고 싶다고 노래한 목월은 이렇게 쓴다. “그런대로 해마다 장맛은/ 꿀보다 달다./ 누가 알 건데,/ 그렁저렁 사는 대로 살맛도 씀씀하고/ 그렁저렁 사는 대로 아이들도 쓸모 있고/ 종일 햇볕 바른 장독대에/ 장맛은 꿀보다 달다.”(박목월의 ‘장醬 맛’) 망혼亡魂들조차 햇볕 바른 장독대 근처에 나와 앉는다.
장수하는 노인이 두엇 있는 마을은 무병 無病하고, 그런 마을의 장맛은 해마다 꿀보다 달다. 장맛이 다니 살맛도 씀씀하다. 우리 영혼도 숙성하고 단맛이 깊이 배어야만 한다. 그래야 참나를 만날 게 아닌가. 영혼에 덕지덕지 묻은 속진을 씻고 참나를 만나라 ! 그게 이 가을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의로움이다. 시인들은 우리 밋밋한 영혼에게 은근한 말로 꾄다. “나에게 영혼을 파십시오./ 다른 장사치들은 오지 않을 테니.”(심보르스카) 이 가을에는 다른 무엇도 아닌 시집에 고독과 범속함에 지친 영혼을 팔아보자. 올가을이 다 가기 전에 정금 正金의 언어로 가득 찬 시집 몇 권을 찾아 읽어보자.
ps 그렇지 않아도 며칠 전 광화문 사거리를 지나다 교보빌딩에 커다랗게 붙은 ‘대추 한 알’ 시구를 보고 가슴이 쿵 했더랬습니다. 가을의 절정에서 이렇게 장석주 시인이 엄선한 몇 편의 시를 들으니 이미 영혼에 단맛이 드는 듯합니다. 그의 제안대로 올가을이 가기 전에 시집 몇 권을 찾아 읽어야겠습니다. 시인이자 문학평론가로 활동하는 그는 최근 한국 근·현대문학사 1백 년을 수놓은 작가 1백11명의 삶과 문학 세계를 조명한 <나는 문학이다>를 펴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