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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대훈, 윤한순 씨 부부의 초여름 저장식 볕 아래 녹차부각 말리는 날
청보리 일렁이는 무딤이들을 마주하는 이곳 평사리에서 인생의 황혼 녘을 맞은 부부가 새벽 어스름부터 가마솥을 달군다. 예전에는 사대부가에서나 즐겼다는 부각을 만드는 참이다. 하동 녹차의 맛과 영양을 자연 그대로 저장하는 ‘평사리 최 참판 댁 녹차부각’ 영양 별미.

<토지> 최 참판 댁의 인심을 닮다
섬진강 강변을 따라 만발하던 벚꽃도 지고 강 건너에 흐드러지던 매화도 져서 상춘객의 발길은 뜸해졌지만, 이곳 경남 하동군 평사리는 박경리 문학의 정점 <토지>의 무대가 되는 곳이라 1년 내내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원래 지리산 악양골 기슭의 산골 마을로, 가까이 있는 문수골, 피아골, 화개골처럼 지리산의 다른 골짜기에 비해 널리 알려지지 않았지만 평사리가 있는 악양골은 지리산 둘레 가운데에서 가장 무연한 들판을 품고 있다. 30만 평이나 되는이 악양들판은 일명 ‘무딤이들’이다. 옛날 걸인들이 평사리에 들어오면 1년은 걱정 없이 얻어먹고 지낼 수 있었다는 이야기도 이 풍요로운 들판에 기인한 것일 터. 소설 <토지>에 등장하는 만석지기 최참판 댁의 들판이 여기였을까. 평사리의 모든 것은 <토지>의 무대가 되어 ‘최 참판 댁’으로 이어지는 듯하다.

새벽 어스름에는 몰랐는데, 날이 밝아오자 청보리가 일렁이는 ‘무딤이들’이 눈앞에 펼쳐진다. 그윽하고 너른 들판, 지리산과 섬진강의 혜택을 동시에 받아서인지 좁은 2차선 도로를 끼고 이어지는 평사리의 낮은 산비탈에는 매실, 밤, 감 등을 재배하는 과수원과 녹차밭이 연이어 펼쳐져 있다. 서대훈·윤한순 씨 부부가 가꾸는 매실 농원도 이 도로를 끼고 있다. 하동읍에서 손꼽힐 정도로 꽤나 큰 식당을 운영하던 그들이 산채 향기를 즐기며 황혼 녘을 보내려고 평사리 산골로 들어온 지 어언 6년째. 이제는 악양골 산자락에서 매실이며, 녹차 등을 심어 거두는 어엿한 농사꾼이 되었지만 요리하기 좋아하는 윤한순 씨는 솜씨를 숨길 수가 없었나 보다.

“허구한 날 사람에 치여 정신없이 살다가 촌에 들어오니 처음에는 낙원이 따로 없었제. 그런데 몇 년 그렇게 보내고 나니까 심심해 좀이 쑤시더라고. 그래서 혼자 이것도 해보고 저것도 해봤제. 그렇게 만들게 된 게 녹차부각이제.”

부각은 재료의 신선한 맛과 영양을 그대로 간직한 저장식으로 궁중이나 사대부 집안에서 즐겨 먹었다고 전하는 한국의 전통 먹을거리다. 이 지역에서는 결혼할 때 사주단자에도 넣는 귀한 음식이었단다. 채소나 해조를 살짝 말려서 찹쌀풀을 입혀 기름에 튀기는 것으로 사찰에서도 즐긴다. 그런데 녹차부각이라고? 녹차밭이 흔한 곳인 데다,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인 만큼 이 지역의 특산물인가 물었더니 그것도 심심해서 만들어본 것이란다. 그러더니 하얀 종이를 두 번 접어 건네는데, 거기에는 일명 ‘평사리 최 참판 댁 부각’ 만드는 법이 번호까지 매겨져 자세히 적혀 있다. 대충 훑어보아도 손이 많이 가는 전통 방법 그대로이고, 맛을 보니 평소 먹던 부각 맛과는 확실히 달랐다. 바삭하면서 쫄깃하고, 재료 본연의 맛과 향이 가득하면서 씹을수록 감칠맛이 난다.

판매할 목적으로 만든 것이 아니었으나 마을 부녀회 행사에 몇 번 만들어갔더니 녹차부각 맛을 본 외지인들이 알음알음 부탁을 해왔단다. 주문을 받다 보니 ‘평사리 최 참판 댁 부각’이라는 이름도 얻게 되었다고. 이제는 제법 알려져 부각을 만들 때 한 번에 1000~2000개 정도는 기본으로 만든다. 한데 사과 박스 하나 가득 담는 부각 값이 고작 5만 원이다. 들어가는 공을 생각하면 품값이 턱없이 적지만, 예부터 넉넉하기로 유명한 악양 인심이 있으니 서운하지는 않다며 한마디 보탠다. “‘평사리 최 참판 댁’ 이름값을 해야제.”

(오른쪽) 집 앞마당에서 녹차부각을 말리는 서대훈·윤한순 씨 부부.

자연 그대로의 향을 간직한 부각
문틈으로 새어 들어오는 장작 타는 냄새에 이끌려 마당으로 나가니 가마솥에서 스테인리스 스틸 솥까지 이어지도록 어느새 일자형으로 작업 공간이 만들어져 있다. 윤한순 씨는 같은 문화센터에 다니는 친구 두 분이 일손을 거들러 오기 전에 밑 작업을 마치느라 마당 이곳저곳을 잰걸음으로 동분서주한다. “햇볕이 좋을 때라야 부각이 잘돼. 아무리 좋은 재료를 써도 잘 마르지 않으면 바삭한 맛이 살지를 않제.”

오후에는 강바람이 꽤나 거세기 때문에 오전 중에 작업을 마쳐야 하는데, 평소 일을 시작하던 새벽 5시가 훌쩍 넘어가니 마음이 급해진 모양이다. 그런 와중에도 부각 만드는 과정을 자세히 설명해준다. “부각은 찹쌀죽을 발라야 튀겼을 때 맛있응께, 어저께 찹쌀을 3시간 정도 물에 푹 불려서 방앗간에 가서 빻아왔제.”

(왼쪽) 서대훈·윤한순 씨 부부의 집은 평사리 최 참판 댁 아래에 있다. 뒤로는 지리산 자락을 끼고 있고, 앞으로는 드넓게 펼쳐진 들판 무딤이들이 있어 수려한 풍광을 자랑한다.

찹쌀죽을 맛있게 쑤는데 찹쌀가루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국물을 우릴 재료. 남편이 일꾼 둘과 함께 오자 가마솥에 한 명, 스테인리스 스틸 솥에 한 명을 붙여놓고 잘 마른 나무에 불을 붙이게 하더니, 가마솥에 물을 부어 찹쌀죽 끓일 준비를 한다. “가마솥에는 물을 3분의 1만 넣어. 그래야 나중에 찹쌀가루를 넣고 죽을 쑤기가 편헝께.”

그러더니 채반에 다시마, 무, 양파, 마늘, 버섯, 생강, 마른 새우를 담아와 물이 끓기 시작하기 무섭게 솥 안으로 들이붓는다. 마른 새우는 양파 망에 담아 넣었다. 싱싱한 재료들은 감칠맛을 내는 비결로 국물 맛이 깊어야 부각도 맛있단다. 깊은 맛이 우러나도록 무가 투명해질 때까지 푹 끓이다가 재료들을 바가지와 체로 모두 건져낸 다음 어제 방앗간에서 빻아온 찹쌀가루를 넣고 죽을 쑤는데, 찹쌀 가루가 솥 바닥에 눌어붙지 않고 잘 풀어져야 하기 때문에 여간 힘이 들어가는 게 아니란다. 몸무게를 실어 이를 앙 물고 죽을 쑤다가도 몇 분이 지나면 “아이고, 팔이야” 소리가 절로 나온다. 찹쌀가루가 어느 정도 풀어져 되직해지면 소금과 멸치 액젓으로 간을 맞추고 땡초(풋고추) 다진 것과 녹차 가루를 넣어 맛을 낸다.

“간은 젓국으로 맞추제. 남들은 1년만 삭히면 먹는다지만 우리는 젓국도 한 3년은 돼야 먹어. 안 그러면 비려서 먹을 수나 있나? 그리고 땡초를 넣어야 해물 내가 안 나고 개운하제. 맛있으려고 새우까지 넣었는데, 비린내가 나면 워쩨?”

찹쌀죽이 누런색을 띠면 커다란 그릇에 담아내 얼마간 식힌다. 김에 고루 발라야 하기 때문에 열기를 빼야 하는 것. 그사이 커다란 김 상자를 가져오는데, 오늘 해야 할 양이란다. 상자 안에 완도산 김이 빽빽한데, 한 되에 100여 장이 조금 못 들어가니 다 하면 1700여 장 정도라고 대수롭지 않게 말한다.

1 찹쌀죽을 김에 고루 펴 바르는 윤한순 씨.
2 다시마, 무, 양파, 마늘, 버섯, 생강, 마른 새우 등을 넣고 팔팔 끓여 우린 국물은 감칠맛의 비결이다.

3 찹쌀가루를 넣어 죽을 쑤는 일에는 여간 힘이 들어가는 게 아니라 서로 번갈아가며 돕는다.
4 통깨는 찹쌀죽이 마르기 전에 뿌리는데, 고소한 맛을 더할 뿐 아니라 장식 역할도 한다.

5 1년 내내 마당에 쌓여 있는 장작.
6 녹차 가루 대신 고추가루를 넣으면 매콤한 고춧가루부각이 된다.


찹쌀죽의 열기가 어느 정도 빠지자 돗자리 위에 아낙 셋이 모여 앉아 커다란 대야를 뒤집어 북처럼 만들더니 그 위에 김을 한 장씩 올리고 찹쌀죽을 살짝 바른다. 그 위에 다시 김 한 장을 붙이기 위한 것이므로 너무 많이 바르면 오히려 김이 울어 모양이 살지 않는다. 김 두 장을 풀칠해 맞붙인 다음 그 위에 찹쌀죽을 듬뿍 바르고 모양이 흐트러지지 않게 잘 떼어다가 햇빛 아래 말리는데, 마르기 전에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통깨를 뿌리는 것. 고소한 맛도 더해주고 장식도 된단다. 햇빛에 말리면 부각 크기가 줄어들기 때문에 찜통에 넣어 수증기를 살짝 쐰 다음 한 장 한 장 다시 펴서 말린다. 보통 손이 많이 가는 게 아니다. 소박한 생김새와 달리 주로 사대부가나 궁중에서 즐겼다더니 시간과 공이 제법 많이 들어간다. 그렇게 만든 부각이 볕 아래 새들새들 말라가는 모습이 낯설지만 정겹다. 말린 부각은 튀김 기름에 부각이 잠길 정도로 넣고 튀기는데, 한 번 튀길 때 1~2장만 넣어야 서로 붙지 않는다. 부각이 희게 부풀어 오르면 건져내면 된다. 술안주로도 반찬으로도 그만이라고 자랑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먹을거리가 넘쳐나지만 제대로 먹고 사는 건 오히려 힘든 세상. 부각은 어린 햇순과 청정 해역의 김, 미역, 다시마 등을 이용해 영양분을 함께 섭취할 수 있어 채소를 즐겨 먹지 않는 어린아이에게도 좋은 간식거리가 된다는 귀띔도 잊지 않는다. 산에서 꺾은 가죽나물도 살짝 데쳐서 말린 다음 찹쌀죽을 바른 후 그 상태로 쪄서 갖은 양념을 넣고 무쳐먹으면 그 또한 별미란다. 또 녹차 가루 대신 고춧가루를 넣으면 매콤한 맛의 고춧가루부각을 만들 수 있다고. “자연에서 나는 모든 것이 부각 재료로, 물기가 많다면 살짝 데쳐서 말리면 되제. 그 맛과 향을 고스란히 담을 수 있으니 이만한 건강식품도 없당께.”
문의 010-7513-5050

글 신민주 기자 사진 민희기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1년 6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