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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의 고향을 찾아서, 남원 백화천초의 칼칼한 향과 은은한 단맛
밤꽃이 지고 장마가 오기 전, 미처 다 채우지 못한 통을 헐어 꿀을 딴다. 1년에 단 한번만 딸 수 있다는 토종꿀.첫서리 내리고 따는 꿀이라야 진꿀이라지만 여름 갈증을 풀어줄 시원한 꿀물 한잔 마시려면 분봉 후 바로 따내는 인증꿀이 제격이다.


(왼쪽) 벌은 이 섬세한 구조물을 짓고 그 안에 알뜰살뜰 꿀을 모은다. 건축학적으로 어느 공간을 가득 채울 때 가장 이상적인 방의 형태는 원형이 아니라 육각형이다. 벌들은 그 사실을 알고 지었을까?
(오른쪽) 흥부마을의 꿀 농사꾼 최종필 씨와 꿀 음료를 개발한 최인덕 씨. 토종꿀을 1년 이상 숙성시켜 독특한 향과 영양 성분이 담긴 음료를 내놓는다.


혀도 짧고 몸도 작은 토봉은 하루에 30km 반경을 날아다니며 꿀을 모은다. 부지런히 따 모은 꿀을 차곡차곡 쟁여놓은 솜씨가 그대로 드러나는 벌집을 보면 그 어떤 건축가가 그리도 섬세한 구조물을 만들 수 있을까 싶고 그 어떤 농부가 그리도 알뜰히 농사를 지어 모을까 싶다. 하루 종일 벌통을 들락거리는 벌이나, 아침저녁 지극정성으로 벌통을 돌보는 사람이나 한마음으로 통해야만 얻어지는 것이 꿀 한 방울인 것이다. 밀원 식물이 풍부해 전국 한봉꿀 생산량의 3분의 1을 거둔다는 지리산 자락. 전라도 남원과 경상도 함양을 잇는 경계선에 자리 잡은 인월면 성산리는 흥부가 태어난 곳이란다. 서른다섯 가구가 옹기종기 모여 앉은 집터마다 벌통이 한데 몰려 있다.
아카시아가 지고 밤꽃이 피기 전, 벌들의 분봉이 막바지에 이르렀다. 천지가 떠나가라 요란하게 붕붕대는 벌 소리가 숲 속에 가득하다. 한창 꿀 따기에 정신없는 일벌이 내는 소리인가 했더니 집에서 쫓겨난 숫벌들이 아우성대는 소리라고 한다. 새로운 여왕벌이 태어날 무렵이 되면 기존의 여왕벌은 직속 일벌들을 데리고 집을 떠나 새로운 집을 짓는 것이다. 벌받이라고 부르는 작은 나무판을 키 큰 나무 꼭대기에 연결해놓으면 집을 떠난 벌들이 일제히 몰려가 매달리는데 이 벌들을 조심스럽게 내려 새로운 벌통으로 옮겨준다. 이렇게 분봉을 하면 새롭게 꿀 농사가 시작되는 것이다. 분봉의 희생양은 바로 숫벌. 여왕벌과의 교미만을 위해 태어났지만 마땅히 할 일이 없어진 다음에는 일벌들에게 내쫓기는데 저희들끼리 갈 곳 모르고 우왕좌왕 뭉쳐서 군무를 벌이다가 하루만 지나면 죽어서 숲 바닥에 깔린다.
운이 나쁜 일생을 타고난 숫벌이야 어찌 되었든, 꿀은 일벌이 나르는 것이니 일벌이나 살필 일이다. 꿀들도 근무 조건이 맞아야 일을 열심히 한단다. 오전 9시에서 10시 사이는 꿀벌이 한창 활동하며 부지런히 꿀통을 들락거리는 모습을 볼 수 있는 시간이다.


1 꿀풀이라고도 하는 하고초는 지리산의 대표적인 밀원 식물이다.
2 벌받이라고도 불리는 나무판에 옛집을 떠난 벌들이 모여 있다. 이 많은 벌 중에 여왕벌은 단 한 마리. 나머지는 모두 일벌이다.


향이 순하고 덜 달아야 토종꿀이다 한봉과 양봉의 차이는 간단하다. 벌통을 한 군데 세워두고 1년 내내 토종벌들이 꿀을 모으면 한봉이고 밀원 식물을 따라 벌통을 이곳저곳으로 옮겨 다니며 서양 벌들이 꿀을 모으면 양봉이다. 한봉은 토봉이라고도 불리는데 벌통을 고정시켜놓고 철따라 피는 꽃들이나 나무의 수액을 빨아서 만든 꿀이라 향도 한 가지일 수가 없고 색도 거무스름하다. 잡화꿀인 것이다. 아카시아꿀이나 밤꿀, 유채꿀처럼 한 가지 이름이 붙은 꿀은 대개가 양봉꿀이다.
토종꿀은 종종 ‘한 숟갈만 먹어도 머리가 멍해지고 몸이 약한 사람은 그 자리에서 뻗어버린다’고 한다. 말짱 거짓말. 토종벌은 서양 벌에 비해 크기도 작고 혀도 짧다. 성정도 순하다. 순한 벌이 순한 꽃에서 빨아낸 꿀은 당연히 맛도 순하다. 덜 달고 향도 강하지 않아야 토종꿀인 것이다. 드물게 보는 석청이나 목청이라도 국내에서 생산된 것은 토종벌이 만든 것이므로 역시 순하다고 한다.
토종꿀은 첫서리가 내린 이후에 따는 진꿀이 최고다. 설탕물을 먹이지 않은 꿀이 진꿀인 것이다. 원래 토봉이나 양봉이나 1년 중 몇 번은 사료라고 불리는 설탕물을 먹인다고 한다. 월동 전후와 이른 봄, 분봉하기 전, 여름 장마철 등이 그런데, 꽃이 없는 기간이니 이때 설탕물을 먹이지 않으면 벌들이 그동안 애써 모아놓은 꿀을 모두 먹어버리거나 기진해서 죽어버린단다. 그래서 고육지책으로 따는 꿀이 인증꿀이다. 봄철에 분봉을 하고 나서 설탕물을 먹이기 전에 미리 꿀을 따는 것이다. 이때 딴 인증꿀은 진꿀과 매한가지라고 봐도 된다고. 설탕물을 끝까지 먹이지 않고 늦가을에 따낸 진꿀은 벌집에 꿀이 반도 채워지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벌들이 먹어버린 까닭이다.


3 갈색 포장은 1년 이상 숙성한 토종꿀을 넣어 만든 꿀 음료. 붉은색 포장은 근방에 많이 나는 고로쇠 수액에 오미자 원액을 소량 섞어 만든 음료이다. 달지 않고 맛이 순하다.
4 방금 딴 꿀로 만든 꿀물. 밀랍 성분을 정제하지 않아 뿌옇지만 구수하면서도 달콤한 맛이 그만이다.


꽃이나 나무 수액에서 뽑아낸 당분을 벌이 먹고 효소와 더불어 내놓는 것, 그것이 바로 꿀이다. 자당이 주성분인 설탕물을 먹더라도 벌의 침샘에 있는 전화효소의 작용으로 포도당과 과당으로 이루어진 꿀을 내놓는다. 분봉 이후 일정량의 설탕물을 먹인 꿀은 사양꿀이라고 해서 가격을 헐하게 받는다. ‘남들 설탕 줄 때 혼자 고집피우다가는 벌이 다 죽는다’는 말도 그렇거니와 ‘설탕물을 조금 먹였다고 해서 가짜 꿀이라고 섣불리 말할 수 없다’는 것도 틀린 말은 아닌 것이다.
“미련하기로는 사람이 제일이지. 배가 불러도 더 먹는 건 사람밖에 없으니까. 자연은 영악하거든. 꿀이 있으면 설탕물을 안 먹지. 배가 부르면 아무리 설탕물이 많아도 쳐다보지 않는 게 벌이야. 설탕물이 많으면 일 안 하고 그 물만 먹고 살 것 같아도 벌은 절대 그런 법이 없으니까. 사람도 건강한 놈이 많이 먹고 일 잘한다고, 벌도 건강한 놈일수록 설탕물 조금 먹고 기운 내서 더 많은 꿀을 따 오는 법이거든. 약한 벌이 제대로 못 채운 빈 벌집을 설탕물 안 줘 만든 것이라며 비싼 값에 속여 파는 인심이 제일 나쁜 것이지.”


5 한창 꿀을 채우고 있는 일벌들. 침샘에서 내놓은 밀랍 성분으로 채를 먼저 만들어두고 부지런히 들락날락하며 꿀을 채운다.
6 아래쪽의 색이 흐린 꿀은 설탕물을 많이 먹인 사양꿀이며 위쪽의 짙은색 꿀은 설탕물을 먹이지 않은 인증꿀. 사양꿀은 톡 쏘는 향이 강하고 맛도 더 달지만 인증꿀의 은은하고 싶은 맛은 따라가지 못한다.


벌이 먹을 꿀은 남기고 따는 농부 흥부마을의 꿀 농사꾼 최종필 씨가 마침 인증꿀을 따낸다기에 옆에 섰다. 사방에 붕붕거리는 벌들이 수천 마리. 하늘에서 벌 눈이 흩날리는 듯 하다. 목덜미며 머리에 벌이 달려들어도 쏘일 걱정보다는 호기심이 우선이다. 밀원이 좋으면 벌통은 10~11단까지도 쌓아 올리는데 맨 아래 단 입구로 들어간 벌들은 윗부분부터 꿀을 채운다. 당연히 꿀은 맨 위 단부터 잘라딴다. 6~7개 정도만 따는데 나머지 것은 벌들 먹이로 남겨놓는다. 벌들에게 설탕물을 먹이지 않는 양심은 벌집 남겨놓는 마음 씀씀이로 헤아릴 수 있을 것 같다.
하얀 밀랍으로 이루어진 벌집채 안에 꿀이 가득하다. 작년 가을부터 알토란같이 모아온 꿀이다. 추운 지방의 채는 가늘고, 따뜻한 지방은 넓다는데 따낸 꿀과 채를 함께 으깨서 삼베 보자기를 깐 소쿠리에 담고 밑에 양푼을 놓아 걸러낸다. 방에 군불을 때서 따뜻하게 하면 거르는 시간이 단축된다고. 칼로 대강 떼어낸 것을 한 조각 입에 넣고 씹으니 달콤하다. 온갖 꽃과 나무 수액이 어우러진 토종꿀은 칼칼한 맛이 뒷맛에 묻어난다더니 과연 그렇다. 최종필 씨는 알음알음으로 꿀을 팔기도 하지만 일부는 벌집채로 스테인리스 탱크에 넣어 숙성시킨다. 가공 음료를 만들기 위함이다. 1년을 숙성시키면서 자연 발효 과정을 거치면 벌집은 분리되어 자연스럽게 위로 떠오르고 아래 꿀물만 떠내서 쓰는 것이다.
흥부마을에서 꿀을 따는 서른다섯 집이 모여 만든 영농조합법인에서는 독특한 꿀 음료를 만들어 판매한다. 법인 대표인 최인덕 씨가 개발했다는데 1년간 숙성시킨 토종벌꿀이 20%나 함유된 음료다. 시중에서 흔히 접하는 꿀 음료의 경우, 꿀 함유량이 기껏해야 3% 내외이고 그것도 양봉꿀이 대부분인 데 비하면 그 맛과 향기는 대략 짐작될 터. 흥부가 태어났다는 마을의 특성을 살려 음료에 ‘흥부가 기가 막혀’라는 재미있는 이름도 붙였다. 맛을 보니 단맛도 강하지만 쌉싸래한 인삼 향이나 구수한 밤 냄새도 섞인 것 같다. 인근에 인삼 밭이 있다더니 맛에서도 확실히 차이가 난다. 벌집에 많다는 프로폴리스나 로열젤리, 화분 등이 그대로 숙성된 까닭에 향도 진하지만 영양 성분 역시 더 풍부해진다고 한다. 주당들의 속풀이에도 그만이겠지만 아침 굶고 나서는 등굣길이나 출근길에 가져가도 그만일 듯싶다.

귀하디귀한 영물, 토종벌 지리산 깊숙한 곳은 지대가 높아서 벌이 일하는 기간이 짧다. 3월 말에서 10월 말 사이, 짧은 기간 일하는 탓에 벌도 바쁘지만 사람도 마찬가지. 벌통 한번 세워놓으면 그것으로 끝이고 나중에 꿀만 따면 되는 줄 알았더니 매일 새벽마다 벌통을 들여다보면서 벌을 살핀단다. 분봉 철에 눈코 뜰 새 없는 것은 당연지사. 수시로 벌 상태를 살펴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다 채운 벌통을 외지인에게 도둑맞는 일도 허다하다니 벌통 지키는 일도 수월치는 않을 성싶다.
언제인가 공업용 호스로 설탕물을 끌어다 벌통마다 대주는 벌 농가의 모습이 방송에 나왔다 하여 한바탕 가짜 꿀 소동이 일었다 했더니, 제대로 된 토봉 농가에서는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는 얘기란다. 꿀들이 설탕물을 그렇듯 미련하게 먹지도 않거니와 재래시장에서 덤핑하듯 받는 꿀 가격으로는 그야말로 설탕물 값도 건질 수 없을 것이라는 계산에서다. 저급한 원당이라면 모를까. 흔히들 가짜 꿀을 식별하는 방법으로 하얀 결정을 꼽는데 그 또한 틀린 것이란다. 한봉이라 하더라도 벌의 먹이에 따라 결정이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도둑이 제 발 저리다고 괜한 걱정에 멀쩡한 꿀을 끓여서 내는 사람도 있지만 꿀을 가열하면 효소와 영양 성분이 파괴될 뿐이다. 아직까지 한봉으로 만든 토종꿀에 대한 등급이나 영양 성분을 표시할 수 있는 명확한 기준이 없어 꿀농사 짓는 사람이나 사 먹는 사람이나 불편하기는 매일반이다.
‘벌이 기운을 잃으면 오곡 열매가 모두 시원찮다’는 말이 있다. 호박, 딸기, 토마토 같은 과채류나 사과, 복숭아 같은 과일도 벌이 날아올라 수정을 해주지 않으면 열매 맺기가 어려운 까닭이다. 일교차가 심한 곳에서는 꿀도 적고 오곡 만물의 소출도 적은 법이다. 백화천초 百華天草가 아무리 무성해도 벌의 매개가 없으면 그것으로 끝일 뿐. 작고 여린 토종벌은 귀하디귀한 영물이다.

7 깊은 산속에 벌통을 놓아두고 재배하는 지리산 토종꿀. 토종벌은 반경 30km 내에 있는 꽃과 나무에서 수액을 빨아 옮겨 꿀을 만든다.

‘건강의 고향을 찾아서’는 한국벤처농업대학 설립자이며 농림수산식품부 제1차관으로 재직 중인 농업경제학자 민승규 박사와 함께 기획・구성한 건강의 고향을 찾아 떠나는 여행입니다.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09년 7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