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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하고 생각하는 셰프 서승호 씨 나를 키운 8할은 기본과 원칙
서승호 씨는 정통 프렌치 레스토랑 라미띠에의 오너 셰프였다. 2년 전 돌연 은퇴했던 그가 서울 강남 한복판에 디저트 전문점 데쎄르를 오픈했다. 프랑스 요리에서만큼은 최고봉을 이루었다고 누구나 인정하는 그가 디저트 분야에 또 다른도전장을 내밀었다. 지금의 그를 완성한 강력한 무기, 기본과 원칙으로 똘똘 무장한 채 말이다.
테이블이 네 개뿐이고 예약하지 않으면 식사할 수 없으며 비즈니스 미팅이나 프러포즈를 하면 백발백중 성공하는 곳. 정통 프렌치 레스토랑 라미띠에가 남겼던 신화다. 1999년부터 2006년까지 8년 동안 그곳을 이끌어왔던 이가 바로 서승호 셰프다. 당시 호텔을 제외하고 ‘맞춤식 메뉴와 서비스’를 선보인 유일한 레스토랑이었다. 1백 명 이상의 요리사를 배출했고 4천 명의 손님이 오갔다. 여전히 섬세한 음식과 창문에 아른거리는 촛불을 기억하는 이들이 많은 곳,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 부었던 그곳을 서승호 셰프는 마흔 살이 되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다른 이에게 맡겼다. 1년 동안 여행을 하고 서울에 돌아온 그가 이제는 프렌치 레스토랑이 아닌 디저트 전문점 데쎄르를 열었다.

음식으로 예술하는 사람, 셰프 서승호 씨가 요리를 시작한 것은 25세 때다. 공무원이었던 그는 부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경주 호텔조리학교에 입학하여 서양 요리를 배웠다. 남들보다 늦게 시작했고 주변에서도 반대했기에 필사적으로 매달려서 보란 듯 성공해야 했다. 학교를 졸업하고 조선호텔 양식 파트에서 근무했지만 요리를 하면 할수록 궁금한 것이 많아졌고 해답이 풀리지 않았다. 파리로 가서 제대로 배워야겠다고 결심했고 1996년, 1997년 2년 동안 호텔 드 크리옹, 자맹 등 유명한 프렌치 레스토랑에 근무하며 정통 프랑스 요리를 접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그는 그동안 가졌던 의문에 대한 답들을 찾을 수 있었다. 파리에서의 생활은 고되었다. 곳곳에 놀 것 많은 도시가 파리건만 그에게는 그럴 여유가 없었다. 아침 7시에 출근하면 생선을 다듬고, 9시부터는 채소를 썰고 소스를 끓인다. 점심과 저녁 시간에는 홀에서 밀려드는 주문에 정신없고, 영업시간이 끝난 후 주방 청소를 하면 자정이다. 그토록 치열하게 배우고 한국에 돌아왔는데 서울의 프랑스 요리 수준은 그가 떠나기 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프랑스에서 보고 배운 것을 그대로 응용할 수 있는 레스토랑을 만들어야겠다고 결심했고 그것이 라미띠에다.


1 가끔은 이렇게 데쎄르에서 가장 좋아하는 자리에 앉아 지나가는 이들을 쳐다본다.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던 라미띠에 시절에는 꿈도 못 꿨던 호사다. 
2 식사하러 온 손님 중 사진가가 있었다. 그가 촬영한 라미띠에의 음식들.
3 서승호 셰프가 추천하는, 프랑스 요리의 기본에 충실한 책들. 요리에 대한 전반적인 이론과 식재료의 특성 등에 관련된 책들이다. 
4 처음 요리를 시작했을 때 수업시간에 적었던 노트는 여전히 그에게 소중한 스승이다.

“라미띠에에 있던 8년 동안 정말 행복했습니다. 마치 신 내림 받은 사람처럼 요리했던 시절이에요. 상대방이 원하는 요리를 다 맞춰 냈으니까요. 요리를 하는 순간은 제 안에 있는 에너지가 다 나왔고, 모든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라미띠에는 제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레스토랑과 95% 부합하는 곳이었어요.” 사람들이 그토록 라미띠에에 열광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 요리에 대한 서승호 셰프의 철학이 음식을 통해 그대로 전해졌기 때문은 아닐까?

그가 생각하는 좋은 요리의 조건은 첫째, 사람에게 기운과 즐거움을 주어야 한다는 것, 둘째, 과정이 정확하고 재료의 출처가 분명해야 한다는 것, 셋째, 언제 먹었냐 싶을 정도로 속이 편해야 한다는 것이다. 입에만 달다 하여 결코 좋은 음식이 아니다. 그 후까지 책임지는 것, 그것이 진정한 셰프의 몫이다. 마지막은 먹는 이에게 메시지를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정성을 다해 만든 한 그릇 음식에는 세상을 움직이는 힘이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지금도 라미띠에의 음식보다 서승호 셰프가 하던 이야기가 기억에 남는다고 말하는 손님들이 있다. 덕분에 귀한 인연을 많이 맺었고, 아직도 그 연을 이어나가는 사람들이 있다. 올해 다섯 살 된 아들 현우의 이름도 손님으로 왔던 역학자가 선물한 것이다.


1 케이크를 굽다가 잘못된 점이 나왔을 때, 기본을 충실히 이해한 사람만이 더 빨리 문제점을 해결할 수 있다. 요즘에는 제과·제빵에 대한 기본 서적을 탐독하는 중이다. 
2 2년 전 파리에서 산 책으로 재료의 특성과 조리법에 대한 기본을 설명하고 있다. 
3 군더더기 없고 멋내지 않은 데쎄르의 디저트들. 밀가루 대신 아몬드 파우더를 주로 쓰는 것이 이 집의 특징이다. 마카롱과 티라미슈, 산딸기 젤리, 홍차 쿠키, 초콜릿, 피낭시에 등이 있다. 특히 티라미슈와 다크 초콜릿 무스는 깨끗하면서도 깊은 맛이 난다.

아니, 공부를 왜 안 해요? 바닥이 탄탄해야 탑을 높이 쌓아도 무너지지 않는다. 서승호 씨는 자신의 음식이 사람들에게 인정받을 수 있었던 것은 기본에 충실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기본은 그를 지탱하는 큰 힘이고 철학이다. 지금도 그는 썰기, 재료 손질법, 조리 원리가 나오는 기본서를 손에서 놓지 않는다. 1년에 요리책을 3백만~5백만 원 가량 구입하며 아직도 파리의 서점에 가면 조리 원리 관련 코너를 서성댄다. 세종대학교에서 요리 강의를 할 때 학생들에게 가장 인기가 많았던 이유도 레시피를 가르치기 이전에 조리의 기초와 문화에 대해 이야기해주었기 때문이다. “칼 쓰는 법, 음식이 생기게 된 배경, 재료의 특성 등을 알면 요리든 제과든 잘될 수밖에 없습니다. 맛이 먼저고 멋을 내는 것은 그 후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레스토랑에서는 멋을 먼저 내지요. 퓨전 요리다, 분자 요리다 하여 세간이 움직입니다. 하나를 채 완성하기도 전에 또 하나를 시작하는 가벼운 생각과 행동은 다시 모든 것을 반복하는 결과만 낳을 뿐입니다.” 요즘 그는 제과·제빵의 기본을 공부하고 있다. 밀가루와 달걀, 우유와 같은 식재료의 원리를 이해하고 특성에 맞는 조리법을 익히기 위해 노력한다. 며칠 전에는 여덟 가지 맛의 마카롱을 만드는데 그중 하나가 자꾸 터지더란다. 오븐 내부의 온도, 또는 파우더를 첨가할 때 부풀어 오르는 온도 둘 중 하나를 어떻게 정하느냐로 고민했다. 그런데 이 모든 문제에 대한 해답 역시 기본을 튼튼히 한 사람의 경우에 더 빨리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기본만큼 그가 중요하게 여기는 또 하나는 바로 단순함이다. 식재료도, 조리법도, 장식도 최소한으로 해야 맑은 호수에 얼굴 비치듯 재료가 가진 최상의 맛, 본래의 맛을 이끌어낼 수 있다. 그가 만드는 요리는 군더더기가 없다. “라미띠에를 처음 운영할 때 시행착오가 있었어요. 열 가지를 내놓았는데 세 개만 팔리고 나머지 일곱 개가 재고로 남는다면 결국 원재료 구매가를 상승시키는 주범이 되더군요. 쓸데없는 데 에너지가 나가는 거죠. 많은 걸 보여주려는 것보다 있는 것을 제대로 해서 내놓는 쪽을 선택했더니 더 신선하고 좋은 음식을 손님에게 제공할 수 있었어요.” 디저트도 마찬가지. 데쎄르에서 파는 제품도 개수가 많지 않다. 초콜릿으로 만든 여러 가지 주요 제품과 아몬드 파우더를 주재료로 하는 쿠키가 전부다. 모든 디저트는 장식이 없다. 제품에는 그 흔한 꽃 한 송이, 과일 한 조각조차 올라가지 않는다. 그러나 한 입 먹어보면 군더더기 없는 깨끗함이 느껴진다.


1 올해는 어머니에게 덧된장 만드는 법을 배우겠다는 서승호 셰프. 어머니 김창금씨는 그에게 최고의 셰프다. 요리를 정식으로 배우지 않았지만 원칙과 기본을 잘 지키기 때문이다.
2 어머니 집의 장독대에 놓인 소금. 간수를 빼는 중이다.

엄마와 닮은꼴 아들 서승호 셰프가 추구하는 기본과 단순함은 학교에서 받았던 교육, 레스토랑에서의 다양한 경험, 책을 통해 얻은 것들이다. 그런데 최근 그가 어머니 김창금 씨의 요리하는 모습을 보면서 깨달은 것이 또 하나 있다. “가끔 어머니가 사시는 조치원 시골집에 가요. 어느 날인가 어머니가 며느리에게 소금의 쓰임에 대해 하는 말을 듣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수업 시간에 제가 학생들에게 하고 있는 말을 똑같이 하시는 거예요.” 공부해서 터득한 것인 줄 알았는데 그게 늘 가까이 있는 어머니의 음식 철학과 생활 그 자체였다니. 코엘료의 <연금술사>에서 산티아고가 그토록 찾아 헤매던 파랑새가 사실은 처음에 자신이 서 있던 자리에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이런 심정이었을까. 그러나 만약 산티아고가 먼 여정을 거치지 않았더라면 보물이 묻혔던 자리를 몰랐을 것처럼, 서승호 셰프 역시 요리에 그토록 매달리지 않았더라면 어머니가 그러한 사실을 알고 있다는 사실조차 파악하지 못했을 것이다.

“어머니는 정말 요리를 잘하세요. 소금과 간장만으로도 맛있는 음식을 만듭니다. 제가 만난 최고의 요리사입니다. 요리를 배운 적은 없지만 기본이 탄탄하세요. 어머니가 만든 음식은 화려하지 않아요. 대표적인 음식으로 흰무리가 있어요. 시골에서는 백설기를 흰무리라고 합니다. 쌀가루와 소금, 물로만 만드는데 그 맛이 얼마나 깨끗하고 담백한지 몰라요. 프랑스에 있을 때 정말 맛있는 바게트를 먹는데 어머니가 만들어준 흰무리 맛이 떠오르더군요. 저희 어머니는 음식을 참 쉽게 만들어요. 남들이 어렵다고 하는 장도 간단하게 만들어요. 그런데도 깊은 맛이 나는 것을 보면 신기해요. 재료가 품은 맛이 가식 없이 느껴지지요.”


3 어머니가 만들어준 청국장과 백설기는 서승호 셰프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다.
4 참송이 버섯볶음과 샐러드는 어머니를 위해 준비한 것. 버섯볶음은 버터와 소금, 다진 양파만으로도 완벽한 맛이 난다.

그는 어머니에게 종종 요리를 해드린다. 어머니를 위해 만드는 요리 중 파르메산 치즈를 살짝 올린 버섯볶음이 있다. 프랑스식으로 발음하면 ‘프리카세 드 샴피뇽 소바주’. 향기가 진하고 기둥이 두꺼운 참송이 버섯을 볶을 때 넣는 재료는 단 세 가지. 다진 양파와 버터, 한주 소금이 전부다. 불필요한 동작 하나 없이 물 흐르듯 만든 버섯 요리는 먹는 순간 ‘맛있다’라는 생각 외에는 다른 생각이 들어올 여지가 없을 정도로 완벽하다. 그가 자주 사용하는 버섯과 양파는 감자와 함께 프랑스에서 요리의 기본이 되는 재료다. 전 세계 어디를 가나 구할 수 있는 재료며 대부분의 요리와 잘 어울린다. 처음에는 그 가치를 잘 모르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정말 중요한 재료라는 것을 알게 된다고 서승호 셰프는 말한다.

어머니가 해주는 음식 중에 아들이 가장 좋아하는 것이 청국장과 백설기다. 두부를 잘라 넣고 되직하게 끓인 청국장은 슴슴하면서도 깊은, 발효 음식 특유의 매력으로 그를 사로잡는다. 쌀가루와 소금, 물로만 만든 순백색의 백설기는 순수하고 깨끗한 맛에 배가 불러도 절로 손이 간다. 기본과 단순함이라는 확고한 철학을 지닌 셰프의 입맛에 이보다 더 딱인 음식이 있을까.

마흔하고도 두 해째를 바라보고 있는 서승호 씨. 프랑스 요리를 다시 할 생각은 현재로선 없다. 하고 싶은 요리를 원 없이 했기에 라미띠에를 그만두었을 때 후회는 없었다. 요리에서 한 발자국 떨어져서 보니 평소에 무심코 지나친 것들이 눈앞에 보이더란다. 아버지 제사에도 찾아뵙지 못했을 정도로 요리에 빠져 있던 그 시절보다 지금 배우는 것이 더 많다고 한다. 그리고 아직도 배울 게 너무 많다는 게 감사하고 행복할 뿐이다. 최근들어 디저트와의 열애에 빠져 있다. 기본과 원칙을 지키는 것에 사력을 다하는 그가 만들어낼 케이크와 과자는 과연 어떤 맛일까?

박은주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07년 9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