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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스타일]태신인팩 서명현 대표 하늘은 스스로 즐기는 자를 돕는다
인쇄・패키지 전문 기업 태신인팩 서명현 대표. 그는 당당하게 자신을 문화 사업가라 이야기합니다. 인류의 지식 산업 발전에 지대하게 공헌해 온 인쇄 산업이 문화 산업이 아니면 무엇이겠느냐고요. 3D 업종이라는 세상의 편견을 깨고 인쇄인으로 자긍심을 키울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마음의 고부가가치’ 때문이라 합니다. 그는 그것이 큰일이든 작은 일이든 스스로 가치와 의미를 찾아 즐기고 또 즐기라고 그는 말합니다. 먼저 마음이 부자가 되는 것, 서명현 대표가 말하는 성공 비결입니다.


수첩을 뒤져 보니 처음 그를 소개받은 것이 지난해 7월이다. 미술관 같은 사무실이 볼 만하다며 지인이 연락처를 건네줬는데, 날로 소심해져만 가는 성격과 무거워진 엉덩이를 탓하며 차일피일 연락을 미뤘다. 마치지 못한 숙제마냥 그의 연락처가 적힌 포스트잇을 모니터 한구석에 붙여 놓기를 8개월째. 마침내 그에게 전화를 걸어도 좋을 ‘명분’을 찾았다. <2010 서울리빙디자인페어>에서 마련한 명사들의 의자 전시에서 ‘태신인팩 대표 서명현’이라는 이름표를 발견한 것이다. “2년 전 유럽 출장길에 우연히 발견하고는 운반에 대해 생각해 볼 겨를도 없이 의자를 구입하고 말았다. 가까스로 현지 친구의 도움을 받아 의자를 보관해 놓고는 몇 회에 걸쳐 하나씩 서울로 운반해 왔다”는 문구와 함께 오리지널 장 프루베 의자가 전시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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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층 사무 공간에 마련한 라운지는 빈티지 가구와 아트 오브제로 꾸며져 있다. 자작나무 벽 안쪽으로 서명현 대표의 사무실이 있다. 2 차를 즐기는 그는 사무실에 다실을 마련해 놓았다. 단을 높이고 바닥과 천장, 벽을 모두 나무 소재로 마감한 것이 인상적이다.

미술관 같은 사무실 장 프루베 의자를 핑계 삼아 그의 사무실을 찾았다. 한참 멀리에서도 한눈에 들어오는 샛노란 개나리색 빌딩. 어디서 날아들었는지 벽에 머리를 처박은 자동차가 분홍색 엉덩이를 깜박이며 매달려 있는 모습이 가히 인상적이다. “재미있지요? ‘핑크팬더’라는 작품이에요. 몇 년 전 아트 옥션에서 구입한 건데, 2년 전 사옥을 지으면서 이곳에 설치했어요.” 작품을 설명하는 그의 표정이 싱글벙글이다. “건물 앞으로 금천고가도로가 지나는데 출퇴근 시간이 되면 이 길이 엄청 막혀요. 그 지루하고 짜증나는 시간, 이 앞을 지나는 운전자들이 잠시나마 즐겁기를 바라며 작품을 달았어요.” 그의 말마따나 금천고가도로를 이용하는 이들이라면 지날 때마다 무척이나 궁금할 것이다. ‘도대체 저 희한한 건물은 뭘 하는 곳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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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작나무의 횡단면을 이용해 마감한 벽 앞으로 자작나무로 제작한 사각 박스를 배열해 만든 책장은 서명현 대표가 직접 디자인했다. 4 현대 미술을 좋아하는 그는 각종 아트 페어를 찾아다닌다. 아직은 주목받지 못하는 젊은 작가들의 ‘내 맘에 들어오는’ 보석같은 작품을 만나는 재미가 그만이라고. 거대한 코끼리 오브제는 강성훈 씨 작품. 5 다양한 작품을 전시한 4층 사무실 앞 복도.

일단 궁금증부터 풀자. 이 희한한 건물은 인쇄・패키지 전문 기업 태신인팩의 사옥이다. 태신인팩은 기업을 상대로 하는 BtoB 기업이니 일반인들에게는 그 이름이 낯설밖에. 그러나 그 안을 들여다보면 그리 낯설 것도 없다. 대한민국 사람 열에 아홉은 태신인팩에서 제작한 포장재를 한 번 이상 개봉해 봤을 테니 말이다. 설화수, 헤라 등 아모레퍼시픽 화장품 패키지를 비롯해 설록차, 메디안 치약 등 무려 7천 5백 종에 달하는 소비재의 포장재를 태신인팩에서 생산하고 있다.
파격적인 외관의 건물 안으로 들어서니 일단 높은 천장고가 눈길을 끈다. 일정 층고를 확보해야 하는 인쇄 공장과 사무실을 결합한 건물로 짓다 보니 얻은 결과다. 4층에 자리한 사무실에 오르기 위해서는 계단을 이용해야 하는데 층층마다 회화, 사진, 조형물 등 다양한 현대 미술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미술관 같은 사무실’이라던 지인의 표현대로다. 4층에 오르니 건물 외벽처럼 노란색으로 칠해진 문이 나타났다. 안으로 들어서니 사무 공간이 펼쳐지고, 물론 이곳에도 곳곳에 미술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다음은 서명현 대표의 사무실이다. 자작나무 합판과 원목 마감재로 벽과 천장을 마무리하고 한 벽만 콘크리트 블록으로 변화를 준 공간에 다실 쪽 통유리창으로는 은은하게 햇살이 녹아든다. 마감재 선택부터 자작나무 모듈 책장, 앤티크 활자판을 짜맞춘 벽 장식까지 모두 그의 아이디어란다. 책장을 가득 채운 책과 디자인 소품, 사무실 여기저기 크고 작은 작품을 둘러보고, 장 프루베를 들먹이며 그의 아트 컬렉션에 대해 질문을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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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작나무 합판으로 마감한 벽 앞에 자작나무 합판으로 만든 회의 테이블이 놓여 있다. 은은하고 온화한 느낌 때문이기도 하지만, 자작나무 합판이 종이 패키지를 제작하는 레이저 커팅 과정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에 더 큰 애정이 간다. 뒤편에 걸린 사진은 이윤진 씨 작품. 2, 3, 4 4층 규모 사옥 곳곳에 현대 미술 작품과 디자인 가구 등 다양한 오브제가 전시되어 있다. 5 디자인 가구로 경쾌하게 꾸민 미팅 룸은 손님들을 위한 공간이기도 하지만 직원들의 휴식 공간이 되기도 한다.

명함 좀 만들어 줄래? 창가에 마련한 다실에 앉아 달큰한 철관음을 마시며 그가 이야기보따리를 풀기 시작했다. 지난해 창립 40주년을 맞은 태신인팩은 서명현 대표의 부친이 설립한 회사다. 학창 시절 아버지가 돌아가신 탓에 한동안 회사를 다른 이의 손을 빌어 운영했다고 한다. 아트 컬렉션에 대해 물었는데 옛이야기를 시작하더니 30대 초반에 인쇄 기술을 배우기 위해 잠시 머문 네덜란드와 독일로 이야기가 넘어갔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인쇄 사업한다고 하면 다들 충무로 인쇄 골목의 영세한 인쇄소를 떠올려요. 친구들도 제게 명함 좀 만들어서 보내 달라고 하는 걸요. 하하. 인쇄 산업을 그저 3D 업종 정도로 여기지 산업 자체를 잘 모르는 경우가 많아요. 그런데 유럽인들은 인쇄 사업한다고 하면 대접이 달라지는 겁니다. 인쇄를 문화 산업이라 여기거든요.”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 발명은 인류 근대사에 있어 하나의 혁명이었다. 종이와 인쇄업의 발달로 교육의 대중화가 가능해졌고, 이것이 곧 산업화로 대변되는 서구 근대화의 시발점이었다. 굳이 지난 세기를 들먹이지 않아도, 정보・지식・디자인・환경과 함께하는 인쇄 산업은 분명 지식 산업이요, 문화 산업이다.
우리의 인쇄 공장 환경이나 직원들의 근무 태도를 보면 인쇄업을 3D 업종이라 여기는 사람들의 생각이 틀린 것도 없어 보이더란다. 러닝셔츠 바람에 슬리퍼를 끌고 다니며 일하는 기술자들, 지저분하고 위험한 근무 환경. 그는 본격적으로 경영에 참여하면서 제일 먼저 작업복과 안전화 착용을 의무화했다고 한다. 그리고 단계적으로 인쇄 공장의 환경을 개선하기 시작했다. “직원들에게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힘들고, 더럽고, 위험해서 사람들이 기피하는 3D가 아닌 ‘문화 산업’이라는 자긍심을 심어줄 필요가 있었죠.” 이때 필요한 것이 예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것이 아트 컬렉션으로 가득한 미술관 같은 회사를 꾸민 이유다. 회사를 찾는 외부 사람들에게 인쇄 산업의 이미지를 새롭게 할 뿐만 아니라 직원들에게도 자부심을 심어주고 싶었다.
그는 이에 앞서 작업장 환경 미화를 시작했다. 작업장을 웬만한 사무실보다도 깨끗하게 변화시켰다. 쉴 새 없이 인쇄 기계가 돌아가는 작업장 벽에 미술 작품을 걸고 오래된 빈티지 인쇄기도 멋스럽게 전시했다. 이렇듯 그가 본격적인 변화에 두 팔을 걷어붙인 것은 1999년 청원 공장을 인수하면서부터. “인수 합병한 공장에 처음으로 내려가서 직원 식당에서 밥을 먹는데 국이건 반찬이건 모든 것이 고춧가루 범벅이더라고요. 주방에 가 봤더니 역시나 조미료 봉지가 가득이고요. 엠에스지 MSG 부작용이 얼마나 위험한지 알기에 제일 먼저 주방에서 조미료를 없앴죠.” 지금은 구내식당 밥이 정말 맛있다며 식단 자랑을 한다. “물론 식당 운영 비용이 올라갔죠. 그런데 맛있고 건강하게 먹으려면 당연한 거 아닌가요?” 근무 환경을 개선하고 직원 복지를 위한 투자에 적잖은 비용이 발생했지만 그는 응당 지불해야 하는 돈이라 말한다. 환경이 달라지자 직원들의 근무 태도가 달라지고, 이것이 생산성 향상과 매출 증대라는 결과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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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티지 활판으로 장식한 다실 벽면. 2 설화수, 아이오페 등 아모레퍼시픽 화장품 패키지 대부분을 생산하는 태신인팩은 고급 패키지 시장의 선두 주자다. 3 예술가의 공간처럼 문화를 생산하는 곳이라는 의미로 공장과 사옥을 청원 스튜디오, 금천 스튜디오라 이름 붙였다. 4 빈티지 포스터로 장식한 출력실.

마음의 고부가가치를 찾아라
“인쇄로 먹고사는 책장이이다 보니 책을 많이 봐요. 다 읽지 못하더라도 매달 수십 권의 잡지도 구입하죠. 잡지 한 권이 매달 수만 권이 아닌 단 한 권만 인쇄되는 책이라 생각해 보세요. 그 한 권을 위해 한 달 동안 편집기자, 사진가, 디자이너, 취재원 그 안에 담긴 각종 지적 콘텐츠…, 투입된 인력과 물량이 엄청 나지요. 그렇게 생각해 보면 잡지 한 권이 쉽게 봐지지 않아요.” 잡지장이를 앞에 두고 그가 잡지 예찬을 시작한다. “잡지는 궁극적으로 세상 사람들의 삶의 질을 높여주고자 하는 매체예요. 출판 같은 지식 산업은 열정과 봉사 정신이 없으면 할 수 없는 일이지요. 사업가 입장에서 보면 이보다 간단한 프로세스로 고부가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사업이 세상에 널렸거든요.” 출판을 빗대어 그는 ‘일의 가치’는 스스로 찾아가는 것이라 말하고 있었다. “인쇄인으로서 이 일은 문화 산업에 공헌한다는 자부심이 없으면 하지 말아야 해요. 새로운 문화를 창출하는 산업이라는 믿음으로,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개척해 나가야 하고요.”
태양이 만든 상자 특히 패키지 분야의 강자로 알려져 있는 태신인팩은 매년 산학 협동을 통해 학생들을 지원하고 있다. “산학 프로그램을 통해 개발한 패키징 디자인 데이터를 모아 해마다 도록을 만들어 갈 예정이에요.” 그 도록이 다시 학교에서 교제로 사용될 수도 있고, 이를 바탕으로 패키지 분야의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해 나갈 생각이다.
그는 환경 문제에도 관심이 많다. “소비자 만족과 관련한 환경 문제는 법적인 조항이 없더라도 한발 앞서 갈 필요가 있어요. 물론 비용이 늘어나니 우리의 고객인 기업을 설득해야 하는 문제가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그것이 기업을 돕는 길이죠.” 그는 1998년 업계 최초로 수성 잉크를 사용한 녹차 봉투지를 제작하고 친환경 소재인 소이 잉크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누가 시킨 건 아니지만 고비용을 감수해 가며 이러한 변화를 먼저 시도한 것은 소비자를 위함이기도 하고, 가깝게는 직원들의 근무 환경 때문이기도 하다. 청원 공장에는 태양광 발전소도 있다며 그가 자랑을 늘어놓는다. 아직은 30kW 정도의 작은 용량이지만 사무실과 복도 등 공장 이외의 시설에서 사용하는 전기와 일부 패키지 제작에 태양광 에너지를 사용하고 있다고. 직원들은 이 패키지를 ‘태양이 만든 상자’라 부른다.

(왼쪽) 5 그가 아끼는 빈티지 릴 플레이어. 스위스 나그라 Nagra 사의Ⅳ-SJ.

빨간 피터의 행복 그를 만나야겠다는 생각이 든 이유는 사실 장 프루베 의자 때문이 아니다. 아름다운 물건을 만나니 이성 따위쯤이야 잠시 접어놓을 줄 아는 ‘낭만적인 사업가’가 어떤 사람일지 궁금했다는 게 솔직한 이유다. 인터뷰와 촬영을 마치고 함께한 저녁 식사 자리. 넥타이를 풀어내듯 긴장을 덜어낸 그가 학창 시절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빨간 피터의 고백>을 공연하기 위해 무대 의상 빌리자고 무작정 추송웅 씨를 찾아간 이야기, 대학 축제에서 상을 받은 뒤 2년 동안 학교 축제마다 불려 다니며 개그 무대를 장식한 이야기, 계속 노래를 불렀다면 지금쯤 배철수 씨 대신 오후 6시에 FM 라디오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을 거라는 대학 가요제 이야기까지. 비즈니스맨으로 사업을 말할 때도, 학창 시절을 떠올릴 때도, 그림 이야기를 할 때도 그는 참으로 유쾌해 보였다. 인터뷰 도중 그가 말한 ‘마음의 고부가가치’가 떠올랐다. 세상만사 마음먹기에 달렸다고 마음의 부가가치를 이야기하는 그라면 무엇인들 즐겁고 유쾌하게 해내지 않겠는가. 머리 좋은 사람이 노력하는 사람 이기지 못하고, 노력하는 사람도 운 좋은 사람 이기지 못한다고 했던가. 오늘 유쾌한 낭만주의 사업가를 만나 한 문장 늘려 본다. 운 좋은 사람도 진짜 즐기는 사람은 이기지 못한다!

김성은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0년 5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