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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찾는 여행, 한옥 스테이
한 건축사무소가 조사한 내용에 따르면 10명 중 4명은 한옥에 살고 싶어 한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실제 한옥 생활을 실현하는 사람은 극히 드뭅니다. 무분별한 도시계획 덕에 남아 있는 한옥은 손에 꼽을 정도고, 실제 생활하기 위해 들여야 할 유지와 보수 비용 또한 만만찮으니까요. 최근 들어 전국에 산재한 유수한 고택을 찾아 며칠씩 묵는 ‘한옥 스테이’에 관심이 높아진 것도 이 때문입니다. 굳이 한옥의 정서적 미학과 건축적 장점을 말하지 않아도 하룻밤 묵어보면 자연과 교감하는 친환경 주택임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으니까요. 서울 도심 속 게스트하우스부터 한옥 부티크 호텔, 명문 고택까지, 올가을 우리의 정신을 풍요롭게 해주는 나를 찾는 여행, 한옥으로 떠나보기 바랍니다.

소풍’, 장지에 채색, 116×91㎝, 2009

조금씩 다른 날들
비 오는 소리에 잠이 깼다. 선잠을 잔 것도 아닌데, 지붕을 때리는 첫 번째 굵은 빗방울 소리에 화닥닥 잠이 깬 듯하다. 내가 특별히 잠귀가 밝아서가 아니다. 한옥에 살다 보면 믿기지 않게 가끔 이런 일이 생긴다. 한옥에 사는 사람이 모이면 자식 자랑을 늘어놓는 극성스러운 어머니들처럼 제 집 예찬으로 시끄럽다. 그들은 하나같이 한옥에 살게 된 뒤 “건강해졌다” “사는 것 같다” “행복하다”라고 말한다. 옆집에 살다가 현대식 주택으로 이사 간 친구도 한옥인 그 집에서 살 때가 자신의 생애 중 가장 행복한 시절이었다고 회고한다.
어릴 때는 한옥에 살아도 몰랐는데, 살수록 한옥의 매력은 깊고 풍성하다. 한옥은 특성상 사람의 근육을 고루고루 쓰게 하는 장점을 지닌 것 같다. 한옥에 살며 건강해졌다는 사람들의 말이 거짓일 리 없다. 서너 계단 올라간 곳에 있는 대문으로 들어가서, 서너 계단 내려간 마당에 내려서고, 다시 한두 계단 올라간 댓돌에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가면, 부엌은 다시 푹 꺼져 있다. 부엌 위에는 어릴 때의 추억이 꿀단지처럼 묻어 있는 다락방도 있다. 질그릇처럼 숨 쉬는 집의 아담한 방들, 햇볕이 늘 사선으로 들어오던 창고, 물이 콸콸 쏟아지는 마당의 수도…. 어제는 일찍 가을을 맛보고 싶어 친구들과 마당에서 저녁을 먹었다. 요즘처럼 계절이 바뀔 무렵의 한옥은 사람의 정서를 더욱 풍성하게 해준다. 남은 계절을 남김없이 다 느끼게 하고, 다가오는 계절을 설레는 마음으로 맞게 한다. 친구들은 어제 우리 집 마당을 믿고 모두 개를 데리고 왔다. 우리 집에도 개가 있어 그야말로 사람 반, 개 반이었다. 그런데다 한 친구를 마음껏 축하할 일이 생겨 우리는 연기를 겁내지 않고 고기까지 구웠다. 고기를 굽기 위한 도구를 광에서 꺼내고, 잘 쓰지 않는 큰 그릇들을 찾아 다락을 오르내리자 마당에 있던 그들이 계속 탄성을 내질렀다. 내가 마지막으로 술병을 찾아들고 다락에서 내려오자, 그들은 마술이라도 본 것처럼 일제히 박수를 쳤다.

“이 집에선 끝없이 뭔가가 나오네!” 굳이 의도한 것은 아닌데, 작디작은 나의 집은 여기저기 주머니가 많이 달린 옷처럼 뭔가를 자꾸 꺼내놓아 사람들을 감탄시킨다. 언제가 고층 아파트에 사는 친구 집에 갔다가 확 트인 풍광에 압도당한 적이 있다. 그 집은 마치 하늘 속에 떠 있는 것 같았다. 근사했다. 그런데 우리 집 골목으로 들어서는 순간, 나는 깨달았다. 그것이 내겐 불편한 느낌이었음을…. 나는 늘 하늘을 머리 위에 두고 산다. 정말이지, 내겐 오직 하늘만이 머리 위에 있다. 내가 살고 있는 이 집이 날마다 그걸 내게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하늘 아래 그 누구와도 수평 관계를 이루며 평등하게 살아가야 한다고….
한옥은 조금 부지런해야 살 수 있는 공간이다. 마당도 쓸어야 하고, 혹여 누군가 담장을 기웃거리지 않을까 조금은 신경도 써야 한다. 특히 낡은 한옥에서 겨울을 나기란 여간 쉽지 않다. 하지만 여름은 시원하고, 통풍도 잘되어 머릿속이 늘 쾌청하다. 문만 열면 바로 바깥이 되는 점 등은 사계절 모두 매력적인 요소이다.게다가 마당에 쌓인 눈을 밟을 때, 낙엽을 쓸 때마다 깨어나는 섬세한 감성과 낭만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는가. 게다가 방들은 모두 자그마해서 마치 어머니 품속처럼 포근하다. 크고 요란한 물건에 대한 집착을 버리게 해준다. 집이 그곳에 사는 사람의 의식까지 바로잡아주는 셈이다.작은 집에 사는 나의 경우엔, 겨울에 외투 한 벌 안 사면 그만이다.
이제 곧 나뭇잎이 마당에, 지붕에 내려앉는 소리를 듣게 될 날이 머지않았다. 싸락눈이 내리는 소리를 듣고 후다닥 일어나 창문을 열 날도…. 한옥에서 살아온 15년 동안엔, 계절이 성큼 변해 있어 깜짝 놀란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모든 감각이 살아 있어 하루하루가 모두 달랐기 때문이다. 돌아보면, 풍성하고 윤택한 날들이었다.

글쓴이 조은 씨는 경북 안동 출생으로 지난 1988년 ‘땅은 주검을 호락호락 받아주지 않는다’ 등의 시를 발표하며 등단했습니다. 서울 종로구의 소담한 한옥에서 반려견 또또와 함께 조용하면서도 치열하게 글을 쓰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는 산문집 <벼랑에서 살다>(샘터)를 통해 14평 한옥살이의 소소한 일상을 담기도 했습니다. 저서로는 시집 <따뜻한 흙>(문학과 지성사), 장편 동화집 <다락방의 괴짜들>(문학과지성사), 여행 산문집 <낯선 길로 돌아오다> (랜덤하우스) 등이 있습니다.

* 더 많은 정보는 <행복이 가득한 집> 9월호 198p를 참조하세요.

이지현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0년 9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