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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헌의 백가기행]부산 조효선 씨의 아파트 다실 다실을 통해 가내구원을 실현하다
국민의 약 60%가 아파트에 사는 한국은 아파트 공화국이다. 생활에 필요한 최소한의 것만 갖춘 생존형 주택 아파트. 그 메마르고 삭막한 공간에서 일상의 고단함을 달래기 어려운 현대인은 휴식과 구원을 찾아 집 밖으로 나선다. 그러나 조효선 씨는 아파트를 다실로 꾸밈으로써 가내구원의 길을 찾았다. 이 시대 아파트 다실의 가능성을 만나본다.


사서삼경과 골동 가구로 꾸민 다실 풍경. 60평대 아파트 공간을 모두 다실로 꾸몄다는 이 아파트에서는 각종 다구를 자랑하듯 늘어놓은 모습이나 자리를 옮길 수 없을 것같이 육중해 보이는 차탁을 찾아볼 수 없다.찻자리는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며, 공간을 비우고 단순함의 미학을 들이면 거실도 서재도 침실도 모두 다실이 될 수 있다고 조효선 씨는 말한다.

우리나라 부잣집 자녀들이 미국 유학을 갔다 와서 가장 하고 싶어 하는 사업이 있다. 내가 보기에 두 가지인데, 하나는 갤러리고 다른 하나는 고급 레스토랑이다. 한국에 돌아오면 서울 청담동 어디쯤에서 이걸 하고 싶어 한다. 왜 갤러리고 레스토랑인가? 아마도 갤러리와 레스토랑에서 미국 문화의 세련됨과 부를 압축적으로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미술품을 파는 갤러리를 거칠게 정의하면 색 色 사업이고, 레스토랑은 식 食 사업이다. 식과 색은 인간의 원초적 본능에 해당한다. 인간이 존재하는 한 없어질 수 없는 영원한 아이템인 것이다. 영원한 아이템은 영원한 사업이 된다. 식과 색은 그만큼 인간을 끌어당기는 강력한 힘이 있다. 근래에 필자가 발견한 또 한 가지 사실은 이 ‘식’과 ‘색’을 하나로 융합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다실 茶室이 바로 그 융합책이다. 다실에는 갤러리적인 색의 배합과 레스토랑이 주는 특유의 먹을거리 향취가 녹아 있다. 갤러리는 보기만 할 뿐 먹을 수는 없는 공간이다. 인간은 먹을 것이 없으면 본능적으로 허전하게 마련이다. 그런데 다실은 시각적으로 느끼는 세련됨과 무언가 마실 수 있다는 기대감을 모두 충족시킨다. 부산에 있는 조효선 씨의 아파트 다실에서 필자가 느낀 점이 바로 이것이다. 60평대 아파트 전체를 차 마시는 다실로 꾸몄는데, 들어서는 순간 갤러리와 고급 레스토랑이 합쳐진 듯 인상을 받았다. 물론 이 다실은 개인 집이다. 집 전체를 다실로 꾸며놓은 것이다. 이러한 대담함은 차에 매료된 마니아가 아니면 시도할 수 없다. 나는 그동안 우리나라의 수많은 집에 가보았다. 수백 년 된 종가부터 성북동의 전망 좋은 저택을 비롯해 지리산에 있는 3평짜리 토담집에 이르기까지. 그러나 아파트가 이렇게 사람을 매료시킬 수 있다는 사실은 조효선 씨의 다실에 가보고 처음 알았다. 아파트는 생존에 필요한 최소한의 것만 갖춘 집이라고 생각한다. 국민의 약 60%가 아파트에 사는 한국은 아파트 공화국인 셈인데, 아파트는 생존형 주택이기 때문에 낭만이 없다. 그러다 보니 녹색 낭만을 찾아서 한국 사람들은 너나없이 차를 타고 골프장으로 달려간다. 골프장에서 그동안 쌓인 ‘아파트 독’을 푸는 것이다. 아파트의 대척점에 골프장이 있다. 골프장을 찾는 것 외에 그 메마르고 건조한 시멘트 주택인 아파트를 환골탈태시킬 수 있는 비책은 없는가? 바로 집 안에 다실을 만드는 것이다. ‘비풍류처풍류족 非風流處風流足’이라는 선시 禪詩의 한 구절이 생각난다. 풍류가 전혀 없는 곳처럼 보였는데, 들어가보니 풍류가 넘치는 공간이라는 뜻이다. 정리하면 갤러리와 레스토랑의 융합이 다실이고, 이 다실을 다른 공간이 아닌 아파트에 만들어놓으니 아파트가 환골탈태했다. 환골탈태, 이것이 이 ‘아파트 다실’의 정체성이다.


1, 2, 3 현관에 들어서면 바로 왼쪽 방에 자리한 일본식 다실. 벽을 터서 부엌으로 통하는 통로를 만들었다. 족자와 다화로 장식한 도코노마 옆 통로로 들어가면 다구가 정리된 작은 공간을 지나 부엌이 나온다. 질석 가루로 만든 차분한 질감의 벽 마감재와 다다미가 일본식 다실의 정취를 더해준다.


파손된 백자 골동 다기를 금으로 떼운 모습이 멋스럽다.

조효선 씨는 독실한 불교 신자로 법명이 ‘마니주 摩尼珠다. 마니주는 원래 용왕의 뇌 속에서 나온 구슬을 이르는데, 사람이 이것을 지니고 있으면 불에 타지도 않고 독극물에도 해를 입지 않는다고 한다. 마니주는 또한 청정무구한 사람의 본래 마음을 뜻하기도 한다. 이 마니주의 효력으로 아파트를 바꾸었다. 마니주 보살의 60평대 아파트에는 5개의 다실이 있다. 현관 문을 열고 들어가면 바로 왼쪽에 다실이 하나 있다. 바닥은 다다미로 되어 있다. 그 다음에는 거실 전체가 하나의 다실로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부엌도 다실인데 10명 정도 앉을 수 있는 탁자와 의자가 놓여 있다. 안방 또한 다실이다. 그리고 안방 바로 옆에 또 다실이 있다. 이렇게 한 집 안에서 다섯 군데나 다실로 꾸밀 수 있는 핵심 원리는 바로 단순함에 있다. 이 집에는 군더더기가 없다. 군더더기가 많으면 다실 분위기가 나지 않는다. 문제는 살림집에 필연적으로 따라다니기 마련인 일상용품을 어떻게 최소화하느냐다. 이 잡다한 일용품을 가능한 한 없애버리거나 안 보이는 곳에 어떻게 수납하느냐인 것이다.
마니주에게 물었다. “어떻게 집 안 살림이 이렇게 간단합니까?” “다실 분위기는 단순해야 합니다. 단순한 집 안 분위기를 위해서 살림 도구를 치웠습니다. 사용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침대를 예로들어 들어 안방에 침대를 놓으면 면적을 많이 차지해 공간에 여유가 없죠. 침대가 놓여 있으면 허 虛가 생기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 대신 조선시대 양반들이 사용하던 나무 평상을 놓았습니다. 이 평상은 이불을 깔면 침대가 되지만, 이불을 걷으면 부피를 많이 차지하지 않으면서 차를 마시는 데 필요한 보조 도구로 이용할 수 있습니다. 평상에 앉아서 차를 마실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이불을 걷어놓으면 앤티크로 보여서 부수 효과도 있습니다. 대형 벽걸이 TV도 치웠습니다. 거실에 대형 TV가 있으면 번쩍번쩍하고 왠지 고요한 느낌이 없습니다. 그 대신 조그만 컴퓨터 모니터를 놓고 봅니다. 컴퓨터 모니터만 있어도 뉴스 등 볼만한 프로는 다 볼 수 있습니다. 소파도 치웠습니다. 다실은 방바닥에 엉덩이를 대고 앉는 좌식 문화에 속합니다. 소파가 있으면 좌식이 안 되고 공간을 점유하기까지 합니다. 거실은 비어 있어야지 들어오는 손님이 한가함과 시원함을 느낍니다. 소파는 신발을 신은 채 실내에 들어오는 서구 문화의 가구입니다. 그래서 신발을 벗고 들어오는 한국식 장판 문화, 더군다나 다실에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봅니다. 공간이 좁은 아파트에서는 특히 그렇다고 봅니다. 저희 집에는 장롱이 없습니다. 옷가지는 벽 속에 들어가게 만든 수납공간에 집어넣었죠. 침대, 대형 벽걸이 TV, 소파, 장롱이 없다는 점이 저희 집의 특색입니다. 없어도 생활하는 데 크게 불편하지 않습니다.”


5 보통 침실로 사용하는 안방도 다실로 꾸몄다. 골동 침상 위에 요와 이불을 더하면 침실이 되고 침구를 거두면 나면 여럿이 함께 하는 다회에도 공간이 넉넉한 다실이 된다.

단순함이란 두 가지다. 무식해서 단순할 수 있고 고도의 계산과 시행착오를 거쳐 도달하는 단순함이 있다. 전자와 후자는 물론 다르다. 여기서 다실이 지향하는 단순함이란 후자의 경우다. 이것도 해보고 저것도 해보고 온갖 시도를 다 해본 다음에야 비로소 단순함으로 되돌아간다. 이때의 단순함은 어떤 효과를 내는가? 첫째는 편안함이다. 복잡하면 피곤하고 단순하면 편안하다. 아마추어는 같은 주제라도 이야기를 복잡하게 하지만, 프로는 간단하게 이야기할 수 있다. 핵심이 무엇인지를 알기 때문에 간단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이다. 핵심이 무엇인지를 안다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인가. 많은 수업료를 지불하고 도달하는 경지다. 핵심만 이야기하면 듣는 사람도 편안하다. 둘째는 효율적이라는 점이다. 복잡하면 번거롭다. 이를테면 제조 공정을 줄이는 것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부품 100개를 쓰는 것보다 10개만 써서 할 수 있으면 10개가 훨씬 낫다. 가짓수가 적을수록 기능적이고, 효율적일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단순하다는 것은 고지에 이르렀음을 뜻한다. 적어도 다실을 꾸미려면 이러한 단순함의 경지에 대한 고찰이 있어야 한다. 복잡함이 주는 화려함 뒤에 비효율과 불편함이 있음을 겪어보아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다실은 왜 단순해야 하는가? 마음을 쉬게 하기 위해서다. 다실은 일단 복잡한 마음을 쉬게 하는 데 일차적 목적이 있다고 본다. ‘휴거혈거 休去歇去 철목개화 鐵木開花’라는 선구 禪句가 있다. ‘쉬고 또 쉬면 쇠로 된 나무에 꽃이 핀다’는 뜻이다. 쇠로 된 나무에 꽃이 피려면 무조건 쉬고 보아야 한다. 그만큼 휴식이 중요하고 필요하다는 것이다. 다실은 바로 이 휴식의 공간이다. 현대인에게 구원이란 다름 아닌 릴랙스다. 쉬는 일이다. 쉬어야 구원받는다. 먹고사는 일에 너무나 긴장되어 있다. 문명은 온통 긴장으로 둘러싸여 있다. 문명은 자연과 멀어질 수록 발달하기 때문이다. 이 긴장을 어떻게 릴랙스시키느냐? 어떻게 쉴 수 있느냐? 현대 문명의 큰 과제다. 쉬기 위해서 집을 나가 또 다른 공간으로 이동해야 하는가? 다실은 이동하지 않고 집 안에서 구원을 받기 위한 장소다. 이름 하여 ‘가내구원 家內救援’이다. 집 안에서 구원받자는 것이다. 집 밖으로 나가야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하면 이 역시 복잡한 문제가 발생한다. 그 자리에서 일괄 타결하는 것이 좋다. 다실을 꾸미는 것은 집 안에 예배나 예불을 드리는 성소 聖所를 만드는 일에 버금간다. 성스러운 공간이 덕지덕지 복잡해서야 되겠나. 성스러운 마음을 지닌다는 것은 마음이 한가해지면서 차분한 심정이 된다는 말이다. 마니주의 집 벽도 이러한 맥락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은은한 색깔이다. 그렇다고 가라앉은 색깔도 아니다. 차분해지기는 하지만 우울함을 주는 채색은 아닌 것이다. 여기에 다실의 묘용이 있다.


1 이 집의 거실에는 가구가 없다. 갤러리처럼 꾸민 거실은 마음에 여백과 휴식을 주는 비움의 공간이다.

아파트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면 왼쪽에 첫 번째 다실이 있다. 이 다실은 일본풍으로 꾸몄다. 우선 바닥이 다다미로 되어 있는데 다다미가 주는 촉감은 미묘하다. 바닥이 대리석으로 되어 있는가, 마루로 되어 있는가, 온돌로 되어 있는가, 카펫으로 되어 있는가, 다다미로 되어 있는가에 따라 분위기가 달라진다. 대리석은 차갑다. 인도의 사원은 바닥이 대부분 대리석으로 되어 있는데, 더운 나라에서는 시원한 느낌을 주면서 사람을 약간 긴장시킨다. 그 긴장은 종교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알맞은 긴장감이라고 나는 해석한다. 온돌은 한국에만 있다. 한국 사람치고 온돌방이 주는 익숙함을 거부할 사람은 없다. 방바닥이 따뜻하면 사람을 끌어안는 듯한 기운이 느껴진다. 마룻바닥은 대리석과 온돌바닥의 중간 정도 느낌을 주는 것 같다. 카펫은 아주 부드럽지만 오래 있다 보면 답답함을 준다. 이에 비해 일본 다다미는 독특한 재료다. 풀 냄새와 함께 야생의 냄새를 풍긴다. 냄새 때문일까, 실내에 속하면서도 실외의 자연이 주는 느낌을 모두 담은 재료가 다다미라고 생각한다. 일본 다실은 다다미가 필수다.
이 다다미가 깔린 다실에는 벽 한쪽에 한문을 쓴 족자도 걸려 있고, 그 족자 밑에는 다화 茶花가 꽂혀 있다. 다화는 생화를 사용하는데 모란과 작약을 일급으로 친다. 그리고 방에 찻상과 찻잔 몇 개만 있고 다른 장식은 아무것도 없다. 크기는 4평 정도. 족자는 여러 개를 돌려가면서 걸어놓는다. 내가 본 글씨는 ‘응무소주 이생기심 應無所住 而生其心’이었다. <금강경>에 나오는 대목이다. ‘집착하지 않고 그 마음을 낸다’는 뜻이다. 그렇다! 오늘 하루도 세파에 부딪치면서 희로애락을 겪겠지만, 저녁에 집에 돌아와서는 이 다실에 들어와 집착하지 말자고 마음을 다시 다잡는다. 마음을 다잡기만 하면 너무 건조하니 족자 밑에다 예쁘면서도 단출한 꽃송이를 갖다 놓는다. 그 꽃송이를 보면서 온화하고 풍요로운 속마음을 키우는 것이다. 이것이 곧 예배가 아니겠는가.


2 모시 조각보, 백자 항아리, 골동 다기로 장식한 주방은 입식 다실이다. 오른쪽의 수납장은 미국의 골동이라 할 수 있는 오리지널 스티클리 가구다. 유리문에 한지를 바르고 다구 수납장으로 사용한다.
3 향 중에서 으뜸이라는 침향 덩어리를 수석처럼 다실 한구석에 장식해놓았다.


침실 옆에도 역시 다실이 하나 있다. 여기는 집주인이 놀러 온 친지들과 편하게 앉아 차를 마시는 공간이다. 다다미방 다실이 절차와 의례가 있는 엄숙한 다실이라고 한다면, 이 공간은 허물없이 편하게 마시는 다실이다. 말하자면 접빈다실 接賓茶室이다. 벽에는 고서가 놓여 있고 찻상이나 다구가 대부분 골동이다. 왜 골동인가? 가만히 생각해보니, 시간을 확장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골동은 수백 년 전 사람들이 쓰던 물건이다. 자연히 골동품을 사용하다 보면 수백 년 전에 이 물건을 쓴 사람과 그때의 분위기를 회상하게 된다. 그때 이 물건을 손으로 만지던 사람의 심정은 어땠을까? 시간이 수백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지금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수백 년 전까지 스펙트럼이 확장되는 것이다. 시간이 확장된다는 것은 인식의 폭과 감정의 폭이 그만큼 확장된다는 의미고, 그 수백 년과 내가 시간적 연대 내지는 시간적 공통체임을 확인하는 의미가 있다. 그래서 어쨌다는 것인가? 나는 그 대답을 “덜 외로워지는 것이다”라고 한다. 나 혼자만 인생의 유한함을 뼈저리게 느끼는 것이 아니고 과거 수백 년 전 사람들도 나와 똑같이 뼈저린 생각을 했음을 알면 덜 외로워진다. 왜냐하면 이것이 삶의 철리 哲理니까. 철리를 어떻게 벗어나는가. 벗어나지 못한다. 그렇다면 받아들이자. 골동품을 쓰는 이유를 댄다면 바로 이것이다.
다실은 성소다. 아파트에 다실을 만들면 콘크리트 덩어리가 향기를 머금은 가내구원의 장소로 변한다. 한국 사람 60%가 아파트라는 콘크리트 덩어리에 사는 이 시대에 다실은 콘크리트 독을 뽑아내는 최적의 해독제라고 생각한다. ‘북커남차’다. 한국의 북쪽 서울은 현재 커피가 대세지만, 남쪽인 부산은 차가 대세를 이루고 있다. ‘남차 ’ 바람의 중심에 부산의 아파트 다실, 마니주의 아파트 다실이 있다. 이 남차 바람이 어디까지 불 것인지 지켜볼 일이다.

청운 靑雲 조용헌 趙龍憲 선생 동양학자이자 칼럼니스트인 조용헌 선생은 ‘백가기행’을 통해 가내구원 家內救援을 이야기합니다. 위로와 휴식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집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지난 1년간 <행복>과 함께 각양각색의 집을 돌아보며 그가 찾아낸 가내구원의 공간은 다실, 구들장, 중정이라 합니다. 그중에서도 현대인이 꼭 갖추어야 할 공간으로 다실을 주목하고 있습니다. 저서로는 <5백 년 내력의 명문가 이야기> <조용헌의 고수 기행> <그림과 함께 보는 조용헌의 담화>, 그리고 지난해 가을 출간한 <조용헌의 명문가> 등이 있습니다.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0년 3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