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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옥을 찾아서] 선대가 쌓은 덕을 후대가 공들여 잇는다 하회마을 명문 고택 북촌댁
1박2일 동안 2백여 년 세월을 지닌 고택이 지닌 진가를 소상히 알기란 터무니없이 짧다. 학서 류이좌 선생의 7대손으로 이곳 하회마을 북촌댁을 지키고 있는 류세호 씨가 꼽는‘한옥에서 꼭 놓치지 말아야 할 순간’은 솟을대문 안 세상을 더욱 신비롭게 만든다. 안동 하회마을의 명문 고택 북촌댁에서 보낸 귀하고 평온했던 하루 풍경.

당호가 화경당和敬堂인 하회마을의 명문가 류씨 집안 고택은 이 마을 북촌을 대표하는 큰 집이라 해서 ‘북촌댁’이라 이름 지어졌다. 더불어 ‘적선지가積善之家’(착한 일을 많이 한 집)로 잘 알려져 있다. 착한 일을 한 집이라….
북촌댁 솟을대문 바깥에 인접한 아홉 채의 초가가 이를 증명하는 첫 번째 단초다. 보통 양반가에서는 대문가에 행랑채를 두어 집안에서 부리고 있는 노비를 기거하게 하는데, 북촌댁의 노비들은 모두 대문 밖에서 살림을 사는 외거外擧 노비였다. 비록 노비였지만 이들 역시도 일가를 이루고 하루 일과를 마치면 주인집과는 별도로 자신만의 일상을 꾸리도록 한 상전의 아량은 북촌댁을 처음 일군 류사춘 공과 그의 아들 학서 류이좌 선생부터 이어져 내려왔다. 비단 거느리고 있는 몸종에게만 ‘베풂’이 있었던 것이 아니다. 북촌댁 뒷간은 흥미롭게도 담장 안과 밖 사이에 걸쳐져 있다. 뒷간의 문이 담장 안에도 밖에도 있는 기이한 모습. 이는 북촌댁 사람들은 물론 길가는 이들도 급할 때 누구나 뒷간 사용을 사용할 수 있도록 한 것으로 그 발상이 유머러스하면서도 훈훈하다. 정조대왕 당시 예조*호조 참판을 지낸 고관대작 류이좌 선생이 이처럼 지나는 행인의 말 못할 사정에도 마음을 썼으니 이 댁을 가히 적선지가라 불러도 모자람이 없겠다.

(왼쪽) 하회마을 북쪽의 부용대芙蓉臺에서 바라보자면 낙동강이 ‘S’자 모양으로 마을을 휘감아 돌면서 흐르고 있다. 북촌댁 큰사랑 뒤편의 3백여 년 된 소나무도 강줄기의 흐름과 같은 형상으로 성장했다. 절묘한 인연이다.

(왼쪽) 중간사랑 화경당에서 바라본 북촌유거 전경. 큰사랑인 이곳은 두리기둥에 팔작지붕, 조선 철종 당시 명필인 해사 김성근 선생의 글씨가 새겨진 현판 등으로 풍모를 갖추고 있다. 
(오른쪽) 북촌유거 누마루는 동쪽으로 하회의 주산主山인 화산花山, 북쪽으로는 부용대와 낙동강, 남쪽으로는 남산과 병산 등 하회마을의 ‘명풍광’을 한눈에 감상할 수 있는 명당이다.

이 댁 류씨 집안의 자손들에게 대물림되었던 것은 비단 유전자뿐만은 아니었다. 정조 21년에 시작 철종 13년 완공까지, 류사춘 공이 시작해서 아들 류이좌 선생과 증손 류도성 선생까지 3대에 걸쳐 65년 동안 이 집을 짓는 데 공을 들였던 것. 을해년 류도성 선생의 일화는 선대의 마음 씀씀이 역시 고스란히 물려받았음을 알려준다. 당시 엄청난 홍수로 하회마을을 돌아 흐르는 강물이 넘쳐 흘러 마을 사람들이 강물에 떠내려간다는 소식이 들리자 류도성 선생은 주저 없이 집 안에 쌓여 있던 춘양목 일체를 강물에 띄워 일부는 뗏목으로 사람을 구하게 하고 일부는 불을 질러 한밤중 구조 작업을 대낮처럼 환하게 했다. 이때 강물에 던져졌던, 수많은 마을 사람들의 목숨을 구했던 춘양목은 선대로부터 이어서 짓고 있는 집을 완공하기 위해 정성을 다해 마련해놓았던 귀한 건축자재. 지금처럼 길 잘 뚫린 도로로 운전을 해도 무려 왕복 두 시간이나 넘게 걸리는 봉화에서 공수, 하나하나 돌판 위에 찌고 말리고 다시 마당에 널고 말리며 수고스럽고 정성스럽게 만들어놓은 나무들을 마을 사람을 위해 단숨에 던진 류도성 씨의 도량과 배포는 수백 년이 지난 지금도 하회마을의 위대한 전설로 남아 있다.

하회마을 북쪽의 부용대芙蓉臺에서 바라보자면 낙동강이 마을을 휘감아 돌면서 굽이쳐 흐르고 있다.
북촌댁 큰사랑 뒤편의 3백여 년 된 소나무가 강줄기와 같은 형상으로 성장했다. 절묘한 인연이다.


(왼쪽) 북촌댁의 안채는 하회마을 사가私家 중 단일 건물로는 가장 큰 규모로 대갓집의 위엄이 명백히 감지된다. 중앙에 마당을 두고 전체 평면이 ‘ㅁ’자형으로 부엌, 안방, 대청, 고방, 윗상방, 툇마루, 아랫상방 등이 갖춰져 있다. 주인 류세호 씨는 이곳에서 기거한다.
(오른쪽) 큰사랑 북촌유거의 대청마루. 액자 속 붉은 홍패는 조선시대 과거급제자에게 국왕이 내린 합격증으로 이 집의 근간을 세운, 집주인 류세호 씨의 7대조 류이좌 선생이 정조대왕으로부터 하사받은 것. 현판에 새겨진 ‘석호’는 5대조인 류도성 선생의 호. 큰사랑의 방과 대청 사이에는 들어열개문을 달아 건물 전체가 하나가 된다. 창밖 풍경까지 치자면 방에서 낙동강 건너 부용대까지 이어지는 셈이다.

류씨 집안에서 만들어낸 전설 또 하나. 다름 아닌 ‘쌍벽雙璧’이라는 말이다. 류이좌 선생과 그의 종형 류상조 선생이 나란히 과거 급제하자 류이좌 선생의 모친이 이를 기뻐하며 지은 시가 바로 쌍벽가다. 선을 베푸는 마음 씀씀이와 학식을 두루 갖춘 선대의 기품과 지조가 이곳 북촌댁의 온전한 뿌리로 내려져 지금껏 하회마을의 명문 고택이라는 명망의 줄기를 뻗어나가고 있다.
북촌댁이 명문가가 되었던 것이 조상님의 은공 덕분이라면, 북촌댁이 2백여 년의 세월 후에도 여전히 명문 고택이 될 수 있었던 것은 후손의 노고 덕분이다. 지금 북촌댁을 지키며 선대 명맥을 고스란히 유지하고 있는 이는 류이좌 선생의 7대손 류세호 씨와 그의 아내 김일주 씨. 요즘 살기 편하게 창문이라도 유리 창호를 달아보고 부엌도 신식으로 개조해볼 법도 한데, 류세호 씨에게는 어림도 없는, 지금껏 단 한 번도 엄두도 낸 적 없는 일이다. 한옥의 가치를 따질 때 무엇보다도 ‘역사성을 얼마나 잘 보존하고 있는가’를 으뜸으로 치고 있는 그이기에 1년 열두 달 행여 북촌댁이 상할세라 낡은 고택을 보수하는 와중에 행여 본모습이 다칠세라 몸 쉴틈 없이 집을 살피며 노심초사한다. 혹시 지식 짧은 후손 탓에 선대가 물려준 귀한 유산에 누가 될까, 전국의 대목, 와공, 미장공, 구들공, 석공 등 한옥 장인들을 스승으로 삼고 한옥에 대한 옛 문헌들을 공부하고 또 공부했다.

수신와修身窩는 작은사랑으로 어려운 이웃을 생각해 언제나 삼가면서 겸손하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이는 적선지가積善之家로서의 마음가짐처럼 고스란히 후대에 전해지고 있다.

1 집안의 손자가 기거하던 작은사랑에는 안채로 드나들 수 있는 쪽문이 달려 있다. 7세부터 남녀부동석이었던 시대, 어린 마음에 보고 싶은 어머니 품으로 남들 모르게, 언제든 갈 수 있도록 배려한 사랑채의 ‘사랑’ 문이었다.
2 북촌유거의 방은 ‘田’자형으로 되어 있다. 안채 역시도 이와 같은 구조로 방 하나를 4개로 나누어 자는 곳, 책 읽는 곳 등으로 구분하여 쓰도록 했다.
3, 4, 5 2백여 년 전 모습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이 집에는 곳곳에 쓰임새 있는 살림공간들이 알뜰히 마련되어 있다. 큰사랑에는 방만큼이나 너른 다락, 안채 기둥 사이와 방에는 시렁 등이 있어 이불이며 세간 등을 챙기도록 했다. 
6 북촌댁은 정조 시대 예조*호조 참판을 지낸 류이좌 선생의 7대손 류세호 씨와 그의 아내 김일주 씨가 지키고, 가꾸고 있다. 이들이 앉아 있는 곳은 북촌댁의 안채 툇마루다.


북촌댁의 사랑채에는 큰사랑 북촌유거, 중간사랑 화경당, 작은사랑 수신와가 있다. 하회마을을 찾는 이들에게는 사랑채 마당을 공개하고 예약을 한 이들은 이곳에서 숙박도 할 수 있다.

류세호 씨는 작년부터 예약을 통해 일반인들도 이곳에 들러 묵을 수 있도록 한옥 체험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하회마을을 방문하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북촌댁의 사랑채 마당를 둘러볼 수 있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지만, 불면 날아갈세라 쥐면 터실세라 금지옥엽처럼 여기는 집의 안채에까지 외부 사람을 들이고 72칸 한옥을 속속들이 공개한 것은 의외. 물론 많은 이들에게 한옥의 아름다움을 몸소 경험하게 해주고 싶은, ‘적선지가’로서의 역할을 해야겠다는 책임감도 큰 몫을 했다. 이에 보태어 바로 류세호 씨가 북촌댁을 끔찍이 여기는 마음이 결정적인 이유가 되었다. 아무리 좋은 기계도 사용하지 않으면 고장 나기 마련이고 특히 한옥은 꾸준히 사용해야 오히려 빛이 나는 유기체. 매달 초하루에 군불을 때어 열을 뿜고 마룻바닥, 주춧돌, 기단의 돌에 적당한 그을음이 생겨야 온 집 안이 숨도 쉬고 튼튼해진다고. 사람의 손길과 호흡만큼 집을 집답게 해주는 에너지가 없기에, 북촌댁을 상속받은 재산이 아니라 조상에게 물려받은 문화유산이라 여기기에, 북촌댁을 고운 약골이 아닌 호방한 건강체로 가꾸고 싶은 마음에 하회마을 명문가의 솟을대문을 조심스럽게 열기로 한 것이다.

이 댁의 아름다움은 세상을 이롭게 했던 선대의 베풂과 선비로서의 학식과 기품으로 더욱 깊어진다.
세도가(勢道家)가 아닌 명문가(名文家), 고래등같은 기와집이 아닌 유서 깊은 양반 고택으로서의 면모가 이런 것일까.


1 또 다른 적선지가의 모습. 담장 사이에 있는 변소는 담장 안은 물론 밖에도 문이 달려 있어 지나가는 행인도 이를 사용할 수 있게 했다. 일종의 공중변소로서 얼굴 모를 이들의 형편까지 배려한 그 마음이 놀라울 따름이다. 
2 보통 양반집은 담장 안에 행랑을 두어 노비들을 기거하게 했는데, 류이좌 선생은 담장 밖에 행랑채를 두어 노비들도 출퇴근할 수 있도록 했다. 이 역시 적선지가積善之家다운 모습이다.
3 솟을대문(행랑채의 지붕보다 높이 솟게 지은 지붕)은 정3품 이상의 벼슬이 내려진 가문에만 세울 수 있었던 것으로 북촌댁의 위엄을 확인시켜주고 있다.

아내 김일주 씨는 내후년쯤 담장 밖 행랑채에서 한옥 체험을 손님들에게 음식도 대접할까 하는 계획을 세우고 있다. 이들 부부에게 아직은 누군가를 집으로 들이는 것이 조심스럽기에 지금은 숙박만 제공하고 있다. 한옥 구들장에서 자고난 개운한 아침, 끼니를 거르는 한이 있더라도 ‘한옥 박사’ 류세호 씨와 함께하는 72칸 북촌댁 한옥 투어는 절대 놓치지 말아야 한다. 문외한의 눈으로 보아도 ‘참 좋다…’는 감탄사를 감출 길 없는 이 댁의 반듯하고 평온한 풍경에 류이좌 선생의 7대손 류세호 씨의 해박하고 소상한 설명이 보태지면 북촌댁 솟을대문이 더욱 높고 단단해 보일 게다. 류세호 씨가 꼽는 ‘한옥에서 꼭 놓치지 말아야 할 순간’은 솟을대문 뒤로하는 발걸음을 더욱 아쉽게 한다.‘ㅁ’자 지붕틀 안에 들어온 보름달, 그 하늘에서 쏟아지는 별들, 우중 처마 끝 낙수 소리, 초저녁 툇마루에서 끌어안는 바람…. 못다 본 명장면에 마음 더욱 부풀어지는 까닭은 북촌댁 그곳에서 하룻밤 지내고난 감상 덕분일 게다. 문의 054-853-2110, http://bukchondaek.com

200년 고택에서 배우는 같아 보여도 알고 보면 다른 한옥의 면면


1 팔작지붕과 맞배지붕
(왼쪽) 지붕선이 용마루에서 내림마루로 이어지고 망와에서 다시 귀마루로, 지붕선에서 추녀 끝까지 2단으로 이어지는 모습이 ‘八’자를 이루고 있어 팔작지붕이라 부른다. 지붕 측면에 삼각형의 박공합각벽이 있다. 팔작지붕은 권위 있는 건물을 상징하는 지붕으로, 북촌댁 사랑채와 안채 등은 모두 이 모습을 하고 있다. 사진은 큰사랑 북촌유거의 팔작지붕.
(오른쪽) 팔작지붕과 달리 지붕선이 내림마루까지만 이어지는 간단한 지붕 형식. 한옥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지붕 형태로 주로 상류 주택의 행랑채와 서민 주택의 몸채에 이용되었다고. 사진은 북촌유거의 마굿간의 맞배지붕.


2 각기둥과 두리기둥
(왼쪽)  둘레를 모가 나게 깎아 만든 기둥. 두리기둥에 비해서 다소 격이 낮은 것으로 일반적으로 많이 사용하던 형식이다. 사진은 작은사랑 수신와 툇마루 풍경.
(오른쪽) 둘레를 둥글게 깎아 만든 기둥. 두리기둥은 적어도 정3품 이상의 벼슬을 한 이의 주택에서 가능한 것으로 큰사랑 북촌유거의 외부 기둥이 이리 되어 있다.


3 띠살창호문과 띠살들어열개문
(왼쪽)  가는 나뭇살을 동일하게 수직과 수평 방향으로 짜넣은 한옥의 창호 형식. 문과 함께 창에도 띠살창호문을 다는데 문이 하나일 경우 홑문띠살창호, 양쪽으로 여는 경우 양문띠살창호라 부른다.
(오른쪽) 공간을 분리하기도 하고 합치기도 하는 분합문(分閤門). 문짝을 위로 ‘들어올려 열 수’ 있어 들어열개문이라 부른다. 들어서 연 문을 서까래 아래 걸쇠에 고정시키면 방과 마루가 하나의 공간으로 이어지게 된다.


4 울거미널문과 판장문
(왼쪽)
  널빤지 위에 울거미(사방으로 테두리를 둘러 짠 틀)를 고정시켜 만든 문. 판장문에 비해서 격이 다소 높은 문으로 사랑채 창문으로 달기도 한다. 사진은 큰사랑 북촌유거의 창문.
(오른쪽) 나무 판에 가로로 띠장을 둘렀다 해서 판장문이라 한다. 주로 부엌, 마굿간 등 허드레일을 하는 곳에 달았다.


5 현판과 편액
(왼쪽)  글씨나 그림 등을 나무에 새겨 실외에 거는 판을 의미한다. 북촌댁의 큰사랑 북촌유거와 작은사랑 수신와의 현판은 당대 명필인 해사 김성근 선생의 글씨.
(오른쪽) 현판의 일종으로 여기에 액자를 두른 것이 편액이다. 북촌댁 중간사랑의 화경당 편액은 석봉 한호 선생의 글씨다.

도움말 류세호(학서 류이좌 7대손*북촌댁 주인)

심의주 편집장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08년 6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