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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05월 고향집을 팔고, 적다 (김탁환 소설가)

소설을 업業으로 알고 살아가지만 가끔 꼭 시를 쓰고픈 때가 있다. 내면의 울림이 너무 커서 이야기로 만들 수조차 없는 순간, 언어는 낯선 감정을 물어 와서 집을 집고 그것을 ‘시詩’라고 부른다. 5년 전, 경상남도 마산에 있는 고향집을 판 후에도 한참이나 시 비슷한 것을 쓰고 또 지웠다. 내가 고등학교 2학년이던 1985년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그 후로 17년 가까이 고향집 문패에는 아버지 이름이 그대로 적혀 있었다. 서울에서 대학교를 다니다가 가끔 귀향하면, 아버지 이름 석 자가 나를 먼저 반겼다. 낡은 문패를 볼 때마다 정신이 번쩍 들곤 했다. 이 삼층집은 어머니와 아버지가 피땀 흘려 장만한 터전이었고, 어머니는 이층과 삼층을 세놓아 그 돈으로 두 아들을 키웠다. 근검절약 외엔 다른 방법이 없었다.

내가 결혼을 하고 등단을 하고 충청도의 어느 대학에 자리를 잡은 후에도 어머니는 한동안 고향집에 머무셨다. 장남 구실을 하게 해달라고, 정성을 다해 모시겠다고 말씀드리면서도, 나는 어머니가 아마도 고향집에서 아버지의 낡은 문패와 함께 영원히 사시리라 상상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는 그 집을 파셨고 낡은 문패도 떼셨다. 여장부 같던 내 어머니는 그 사이 많이 늙으셨다.

지난겨울 다른 일로 마산에 갔다가 고향집 앞까지 갔다. 문패는 물론이고 건물 전체를 외장부터 다시 꾸며 무척 낯설었다. 대문 안으로 들어가서 이곳저곳 살피면 옛 흔적이야 한둘 찾을 수 있겠지만 나는 뒤돌아섰다. 이제부터 고향집은 내 기억에만 머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낡은 문패의 그 집은 소리로 만든 집이었다. 하루 종일 수많은 소리가 집으로 밀려왔다가 사라졌다.

멋지고 아늑한 소리도 있었겠지만, 내 귀에 가득 끓어오르는 소리는 자동차 경적이다. 고향집이 4차선 도로와 인접한 탓에 밤낮없이 경적이 울렸다. 이불을 덮고 누운 밤이면 그 소리가 더 높고 컸다. 동생과 나는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어쓰고 들려오는 소리에 따라 차 종류를 알아맞히거나 차 색깔을 추측하거나 승차한 인원과 운전수의 기분까지 상상했다.

다른 하나로는 거실이 내는 다양한 소리가 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어머니는 창문마다 철망을 다셨다. 건물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바람에 좀도둑이 잦았던 것이다. 거실에서 어머니가 계시는 안방 그리고 우리 형제가 머무는 공부방까지는 좁고 긴 복도가 있었다. 우리는 TV를 보거나 책을 읽다가 거실에서 조그만 소리라도 나면 귀를 쫑긋 세웠다. 소리의 종류는 다양했다. 유리창이 덜컥대는 소리, 소파에 올려두었던 책이 미끄러지며 떨어지는 소리, 마룻바닥이 미세하게 휘는 소리, 옆집 아기 울음소리가 유리창을 뚫고 들어오며 내는 소리, 벽에 걸어둔 액자가 흔들리는 소리, 때로는 생쥐가 거실 책장을 갉는 소리…. 그 소리를 듣자마자 어머니와 형제는 한마디씩 의견을 냈다. 그 의견에는 물론 좀도둑이나 강도 등 불행한 일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행복만 가득했다.

소리의 정체를 도저히 알 수 없을 때는 요정 팅거벨의 날개 소리거나 탁자 위에 둔 꽃들의 하품 소리로 간주했다. 그런 뒤에야 나는 장남에게 맡기라며, 하지만 여전히 두려운 마음을 품고 거실로 살금살금 걸어갔다. 마지막으로 어머니가 남몰래 흐느끼는 소리가 있다. 어머니는 형제가 잠든 후 홀로 신 앞에서 겸손하게 기도하셨다. 꿈결 따라 자주 ‘저 높은 곳을 향하여’라는 찬송가가 맴돌았다. 그것은 험한 세상과 맞서 가족을 지키려는 이 세상 모든 어머니들이 내는 투명하고 맑은 노래다. 종교를 가졌는지 아닌지에 상관없이 인간은 나약한 존재이며, 그 막막함을 솔직히 고백하는 영혼은 아름답고 귀한 법이다. 무엇인가 그리울 때 나는 눈을 감는다.

어둠이 짙을수록 풍광은 더욱 또렷하며 그와 더불어 많은 소리와 냄새와 맛과 감촉들이 살아나기 때문이다. 행복이 가득한 집은 어떤 집일까. 그곳은 소중한 기억으로 가득한 집이다. 팔리거나 허물어지더라도 그 집은 사라지지 않는다. 소리로 지은, 경상남도 마산시 양덕3동 166-47번지, 내 고향 삼층집처럼!


소설가 양귀자 님께서 ‘희망을 품게 만드는 새로운 작가’ 가운데 한 사람으로 꼽았던 소설가 김탁환 님께서 ‘행복한 가득한 집’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십니다. 소중한 기억으로 가득한 집이 ‘행복이 가득한 집’이라는 이야기에 정신이 번쩍 듭니다. 우리 모두는 저마다 소중한 기억으로 가득한 집을 갖고 있을 터이니 저마다 ‘행복이 가득한 집’을 제각각 갖고 있다는 말씀 같아서, 그리고 지금 이 순간 또한 훗날에는 기억으로 남게 되리라는 점에서
그렇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