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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04월 행복, 어쩌면 짙은 슬픔일지도 모르는 (함성호 시인)

시인 함성호 씨의 네 번째 글
행복(well-being)은 그 상태(지금, 여기)의 경험을 찾는 것이다. 유기농 채소를 먹는 게 웰빙은 아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어떤 만족을 주느냐가 더 중요하다. 만약 유기농 채소가 우리에게 어떤 만족도 주지 못한다면 그건 웰빙일 수가 없다. 사실 유기농 채소가 몸에 더 해롭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스탠퍼드 대학교의 제임스 콜먼 명예 교수는 그의 저서 <내추럴리 데인저러스>에서 ‘유기농=청정’이라는 상식을 뒤집었다. 자연에서 재배하거나 유기농으로 기른 농산물이 농약을 쳐서 기른 농산물보다 안전하지 않다는 것이다. 자연 농법으로 키운 식물일수록 천적을 물리치기 위해 자기를 보호하려는 메커니즘을 작동시켜 스스로 천연 농약을 만든다는 것이다. 실제로 일부 과학자는 천연 식물성 화학물질을 동물에게 다량 투여해 절반 이상이 발암물질인 걸 밝혀냈다. 농약을 전혀 쓰지 않는 천연 제품에도 천연 살충 물질이 들어 있다는 것은 충격이다. 콜먼 교수는 미국인이 매일 자연 식품을 통해 천연 살충제를 평균 1.5g씩 섭취한다고 했는데, 이는 하루에 섭취하는 합성 농약 잔류물보다 1만 배 이상에 상당하는 양이다. 또 유전자 변형 식품보다 유기농 농법으로 키운 작물이 오히려 위험하다. 농약 잔류물 때문에 죽었다는 사람은 한 명도 보고된 적이 없으나 음식을 통한 세균 감염으로 죽은 사람은 질병통제센터에 매년 수백 명씩 보고된다는 것이다.

콜먼 교수의 보고는 천연 자연 식품에 대한 경고인 동시에 무분별하게 상업자본의 논리를 좇는 웰빙 행태에 대한 경고다. 이는 건축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건축자재에서 뿜어져 나오는 유독 물질에 대한 경고는 얼마든지 강조해도 좋지만, 아무 근거없이 그리고 대안 없이, 천연 자재의 사용을 권하고 있는 것은 문제다. 이미 근대 이후 산업 시스템이 굳어버린 상태에서 천연 건축자재는 구축 방법도 그렇고, 단열이나 에너지 효율 측면에서 적절한 보완책이 마련되어 있지 않다.

그러다 보니 구조적인 취약점이 드러나고, 엄청난 건축 공사비가 예상외로 불어나게 마련이다. 더군다나 건축비를 순수하게 자기 비용으로 충당하는 예는 극히 드물다. 대부분 은행 대출을 끼고 이자를 내게 되는데, 천연 건축자재를 사용하는 집은 추가 공사비가 여기저기서 발생하고, 그나마 제대로 문제 해결을 못 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건축주는 어쩔 수 없이 선의의 피해자가 된다. 인드라의 집 짓기(지난 3월호 ‘정말 하고 싶은 이야기’ 내용 중)에서도 보듯이 집을 짓는 것은 오랜 꿈을 펼치는 것이다. 그 꿈 중 하나는 친환경적인 집에서 살고 싶다는 것도 포함된다. 그런데 그 꿈이 오히려 스스로의 발목을 잡는 경우를 나는 허다하게 보아왔다. 여기서 스스로라는 것은 건축가와 건축주, 시공자 모두를 포함한다. 결국 건축주는 스스로의 꿈과 어긋나버린 집을 부숴버리고 싶은 지경에까지 이르고, 설사 완공되었다 하더라도 엄청난 이자에 시달리다가 결국에는 그토록 오래 꾸어온 꿈을 포기하고 팔아버린다. 집을 짓는 일은 한두 해 계획해서 되는 일이 아니다.

그토록 오래 생각해온 계획이 불과 일 년도 안 되는 공사 기간 중에 물거품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이는 비단 천연 건축자재를 욕심내다 생기는 경우만은 아니다. 웰빙 식품, 웰빙 건축, 웰빙 병원, 웰빙 의류 등 이 모든 것에 붙은 웰빙이라는 수식어는 거짓이다. 그런 병원이나 건물이나 의류가 그렇다는 것이 아니다. 웰빙이라는 말이 수식어로 쓰이는 것이 그렇다는 말이다. 웰빙은 수식어가 될 수 없다. 웰빙은 상태이며 상태의 경험이다. 그리고 이 경험에 앞서 우리는 반드시 ‘왜?’라는 의문을 품어야 한다. 그 의문은 ‘이것이 나를 만족하게 하는가?’란 의문이다. 만족한다는 것은 한계를 미리 정해놓고 거기에 안주하는 것이 아니다. 만족한다는 것은 모든 가능성을 다 뒤져보았다는 것이다. 만약 행복이 외부에서 오는 것이라면 우리는 끝끝내 어딘지 모르는 거기에 닿지도 못한 채 죽고 말 것이다. 그러나 다행히 행복은 내부의 만족이며, 다 알다시피 파랑새는 언제나 집 안에 있다. 그러나 또한 집 안에서만 찾을 수 없는 것이 파랑새고, 행복은 바깥으로, 우리의 경험을 이끈 다음에야 집 안의 파랑새를 보여준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밥, 잘 구운 고등어, 아삭아삭한 김치, 아름다운 음악, 입에 발린 혐의가 짙음에도 듣고 싶은 칭찬 한마디, 이런 것이 우리를 행복하게 한다. 이것들이 명품이라서? 그건 아니다. 아주 평범한 것, 그것들에 감동할 줄 아는 삶의 경험을 찾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만족은 꼭 기쁨으로 오지는 않는다. 어쩌면 그것은 짙은 슬픔 속으로 우리를 집어넣을지도 모른다. 거기서 우리가 무엇을 경험하는지에 따라 우리의 삶은 변화될 것이다.

우리가 처음 웰빙이라는 단어를 만났을 땐 그것이이 혼탁한 지구를 구원하는 메시아의 메시지인 줄로 알았습니다. 하지만 ‘웰빙’의 대홍수 속에 살게 된 우리는 이제 그 말의 본뜻을 돌이켜보기 싫을 정도로 진력이 난 상태입니다. 시인 함성호 씨는 지난 넉 달 동안이 웰빙, 행복, 만족의 본뜻을 찾아 깊은 성찰을 했고, 그 고민의 흔적을 들려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끝맺음은 ‘행복, 어쩌면 짙은 슬픔일지도 모르는 것’입니다. 역시 찬찬히 곱씹어보셔야 마음에 내려앉는 이야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