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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03월 ‘있음의 의미’에서 ‘있다는 경험’으로 (함성호 시인)

시인 함성호 씨의 세 번째 글

어느 날 인드라는 자신이 아주 대단한 존재임을 느끼게 되었다. “나, 정말 대단하구나”라고 생각한 인드라는 우주산으로 올라가 거기에다 대단한 자신의 위용에 걸맞은 궁전을 짓기로 했다. 신들의 궁전을 전문으로 짓는 목수가 오고, 화려하고 진기한 자재가 속속 들어오면서 궁전은 날이 갈수록 그 위용을 더해 갔다. 그런데 인드라는 거기서 만족하지 못하고 점점 더 화려하고 위엄 있게 만들 것을 종용했다. 끝이 없는 인드라의 욕망에 지쳐버린 목수는 인드라에게 이렇게 하소연 했다. “신이여, 우리는 모두 영생불사 永生不死하는 존재입니다. 그러니 우리의 욕망도 불멸합니다. 그러니 신께서 자꾸 이러시면 저는 영원히 이 궁전을 짓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인드라는 목수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고 계속 궁전을 더 좋게, 더 위엄있게 지을 것을 명령했다. 결국 목수는 창조신인 브라흐마를 찾아가 이 끝없는 욕망의 집 짓기를 끝내기로 마음먹었다. 목수의 부탁을 받은 브라흐마는 걱정 말고 돌아가라고 목수를 타일렀다.

그 후 인드라의 앞에 어떤 어린 소년이 와서 말했다. “내 듣자니 그대가 그대 앞에 있었던 어떤 인드라도 지은 적이 없는 화려한 궁전을 짓고 있다면서요?” 이 질문을 받은 인드라는 의아했다. “내 앞의 인드라라니? 나 말고 이전에 또 인드라가 있었단 말인가?” 인드라는 소년에게 물었고, 소년은 웃으며 대답했다. “물론이지요. 우주의 바다에서 자는 비슈누의 배꼽 위에 있는 연꽃에는 브라흐마가 앉아 있지요. 브라흐마가 눈을 뜨면 세상이 존재하기 시작하고 인드라가 그 세상을 다스립니다. 그러다 브라흐마가 눈을 감으면 세상도 없어지고, 인드라도 없어집니다. 그러다 브라흐마가 눈을 뜨면 또 다른 세상이 시작하고, 또 다른 인드라가 나타나지요. 브라흐마의 수명은 43만 2천 년이지요. 그 세월이 지나면 브라흐마도 사라지고 새로운 브라흐마가 나타납니다. 그도 역시 43만 2천 년을 살다 없어지지요. 그러니 아무리 지혜로운 자도 이제까지 오고간 무수한 브라흐마의 수를 알지 못하고, 이제까지 오고간 더 무수한 인드라의 수를 알지 못합니다.”

그 때 개미떼가 바닥을 기어가고 있었고, 그것을 본 소년은 희미하게 웃었다. 기가 완전히 꺾인 인드라는 곧 집 짓는 것을 포기했고, 목수는 실업자가 되었다. 그리고 인드라는 출가하여 수행자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그런데 인드라의 마음을 알아챈 인드라의 아내는 수행자가 되려는 인드라를 말리기 위해 신들을 섬기는 승려를 찾아가 인드라를 말려 달라고 애원했다. 승려는 곧 인드라 신을 찾아가 무릎을 꿇고 말했다. “그대는 신들의 왕입니다. 그대는 이 시간의 무대에서 브라만의 신비를 드러내는 분입니다. 이것은 아무나 누리는 특권이 아닙니다. 그러니 이것을 영광으로 아시고 전생과 다름없이 사십시오. 그대와 그대의 아내는 사실은(아트만과 브라만이 그렇듯이) ‘하나인 둘’입니다. 출가하기보다는 여기서 그 신비를 알게 되길 바랍니다.” 인드라는 승려의 충고를 받아들여 요기가 되겠다는 생각을 버리고 브라만을 체현 體現할 것을 결심한다.

<우파니샤드>에 나오는 이 이야기는 한꺼번에 너무 많은 화두를 우리에게 던져준다. 첫째는 집 짓기로 대표되는 욕망의 문제다. 둘째는 집 짓기로 벌어지는 해프닝이 끝나면서 다시 생성되는 문제, 즉 그 후로 목수는 집을 짓지 못했다는 것이다. 인드라가 집 짓기를 끝내는 것은 목수가 원하던 결말이었다. 그러나 결국 그는 자기가 원하는 일이 자기의 의무(업; 다르마 dharma)를 저버린 일이라는 사실을 몰랐다. 그는 결국 타인의 욕망의 굴레에서 벗어나자마자 자신의 욕망에서도 내쳐진다. 셋째는 요기가 되는 일과 아내의 곁 사이에서 번민하는 인드라의 모습이다. 인드라는 비슈누(소년은 비슈누의 화신이었다)의 충고대로 스스로의 한계를 깨닫는다. 이 깨달음으로 그는 요기가 될 것을 결심하지만, 결국에는 승려의 충고를 받아들인다. 요기의 길이든 아니든 브라만을 체현하는 데 있어 그 둘은 다를 게 없다는 것이다. 결국 인드라는 목수와 달리 이 시간의 무대에서 자신의 의무, 다르마를 계속 짊어지기로 한다. 그것은 이 영원한 시간 속에 놓인 바늘 끝만큼도 안 되는 스스로의 자리를 기꺼이 감내하겠다는 태도다. 그렇다고 목수는 계속 집 짓기를 해야 했을까? 그것은 아닐 것이다. 이 이야기가 우리에게 전해주는 의미는 아마 이것일 것이다. 여기에 왜 있을까? 하는, 의미를 찾기보다는 여기에 있다는 경험을 찾으라는 것.

그 경험을 통해 우리는 우리 생의 의무를 알 수 있고, 우리의 의무를 다하다 갈 수 있다. 인도의 신화는 이 의무에 대해 여러 번 강조한다. 왜냐하면 이 의무야말로 우리의 경험을 개인적인 것에서 사회적인 것으로, 공공적인 것으로 확장시키기 때문이다.

“여기에 왜 있을까”가 가장 중한 존재의 고민인 줄 알고 살았습니다. 한데, 이 철학적인 시인은 그것 대신 “여기에 있다는 경험”을 찾으라고 말하는군요. <우파니샤드> 속 긴 이야기를 인용한 그는 한 걸음 더 나아가 ‘개인의 의무와 공공성’까지 말하려 합니다. 두세 번 곱씹어 읽어야 그 뜻이 비로소 잡히는 글입니다. 뜸 들이듯 시간을 충분히 열어두고 찬찬히 읽어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