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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07월 병, 그 낯선 길목에서 (오정희 소설가)

소설가 오정희의 세 번째 글
오래전에 쓴 글을 읽다가 문득 느껴지는 격세지감에 슬며시 웃음이 나왔다. ‘병이 손님처럼 찾아왔다’라는 문장으로 서두를 열어 ‘병에는, 자기 방기 自己放棄라는 자유와 해방의 면책특권이 부여된다. 그저 견딜 만한 정도의 아픔과 불편이라면 1년에 한두 차례쯤 병치레를 구실 삼아 한껏 게으를 수 있는 시간을 갖는 것도 괜찮으리라’라고 맺고 있는 그 글에서는 병에 대한 불안이나 두려움, 고통이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병이라는 특별한 상태를 즐기는 마음이 엿보였다. 초청객이든 불청객이든 ‘손님’은 일정 기간이 지나면 떠나게 마련이고, 어지간한 병쯤이야 쉽게 털고 일어날 수 있는 튼튼한 젊음의 날들이었으니 병을 ‘손님’ 운운하며 여유롭게 비유하는 멋을 부리기도 한 것이리라. 옛 글을 읽노라니 식구들이 나간 빈집의 적요로움 속에 홀로 누워 앓는 외로움과, 허용된 게으름에 자신을 내맡기던 시간들이 세월 저편에서 떠올랐다. 자리걷이를 하고 일어날 때의, 먼 여행에서 갓 돌아온 듯 서먹하고 신선한 기분과 다시 태어난 마음으로 열심히 살고자 새삼 솟구치던 용기도 그립게 떠올랐다.

“어르신, 감기 조심하세요” “낙상하시면 큰일 나요” 소리를 심심찮게 듣는 지금이라면 ‘병이 손님처럼 찾아왔다’라고 쓰지 않았을 것이다. 손님이라니. 나이 들어갈수록 질병이 구체적 현실로 다가오면서 몸의 작은 변화나 이상 징후에도 저승사자인 양 겁먹지 않던가. 과민한 건강주의자가 되어가면서 은연중 건강은 ‘선’이요 병은 ‘악’이라는 단순한 이분법적 사고에 물들어가는 것도 한 이유가 될 것이다.
평생 앓는 일이 없는 사람은 없을 텐데 인생 여정에서 병의 시간은 계산되지 않는다. 때문에 병이 들면 방심하고 걷다가 허방에 빠지거나 예상치 못했던 복병을 만난 듯한 당황함과 황망함에 어쩔 줄 모르게도 된다. 계획에 없던 일이니 난처한 궤도 이탈이기도 할 것이다. 이뿐인가. 자동화 시스템으로 가동되던 몸은 인위적인 갖가지 치료법으로 조절해주어야 하는 대상으로 전락한다. 병 없이 건강한 몸으로 팔팔하게 살다가 자는 듯 눈감는 것이 만인의 소망이지만 그러나 어쩌랴. 병고 또한 피할 수 없는 자연의 섭리인 것을. 그래서 지혜로운 사람들은 내 몸을 숙주 삼아 깃들고 둥지 트는 병에 대해, 밉고 싫지만 맘대로 내칠 수도 없는 벗처럼 잘 달래어 내보내거나 덧들이지 말고 평생 보듬어 함께 살아가야 한다고 타이르는가 하면, ‘몸에 병이 없기를 바라지 말라’는 말로 우리 모두 연약하고 소멸하는 존재라는 사실에 겸손하라고 가르친다.

기억 속 어린 시절의 풍경에는 이마에 흰 끈을 질끈 동이고 어둑선한 방 안에 누워지내시거나 볕바른 툇마루에 나앉아 저만치 허공에 눈길을 준 채 가만히 아픔을 견디는 병든 노인네들이 계시다. 그분들은 ‘늙어서 그런 걸 어쩌겠나’라거나 ‘아파야 죽지’라는 말씀으로 당신이 겪고 있는 병고를 당연하게 받아들이셨던 것 같다. 그때는 어느 집에나 늙은이와 늙어가는 이와 젊은이와 어린아이가 있었다. 각기 다른 속도와 감각으로 흐르는 성장과 노쇠와 병고와 죽음에 이르는 시간들이 한 공간에서 어우러져 자연스러운 인생의 흐름과 파노라마를 이루면서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대해 학습시켰던 것 같다.
질병의 고통과 두려움에 지배당할 때 우리는 다만 ‘육체의 노예’ ‘앓는 짐승’에 지나지 않는다는 열패감에 빠지게 마련이다. 무엇엔가 떠밀리듯 정신없이 앞만 보고 달리던 걸음이 누군가의 억센 힘에 발목 잡혀 멈춰지고, 끝없이 뻗어 있으리라고 생각한 길이 뚝 끊겨 있는 것을 보게 된다. 낯선 곳 혹은 막다른 길에 부닥쳐 우두망찰하다가 자신이 맞닥뜨린 것이 바로 자신에게 던지는 실존적 물음에 다름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다. 통각만이 살아 있는 동물에 지나지 않는다는 열패감이 바로 자기 존재와 삶의 의미에 대한 본질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질문을 낳는 이 아이러니라니!

오정희 선생이 그러했듯 우리도 하루하루 늙어갈 것이고, 점점 병 앞에서 겸손해질 테지요. 하지만 아직은 병에 대해 허세와 강짜를 부리고 싶은 걸 보니 우린 아직 청춘인가 봅니다. 생을 깊숙이 바라보고 경험한 사람만이 들려줄 수 있는 어질고 깊은 이야기에 오래 마음이 머뭅니다. 이 여름, 나무 그늘 아래 누워 선생이 들려준 ‘병에 대해 정말 하고 싶은 이야기’를 오래 곱씹어 보세요. 생을 청안하게 바라보는 계기가 될 것이 분명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