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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05월 봄의 뜨락에서 (오정희 소설가)

소설가 오정희의 첫 번째 글
절기상 봄이 왔어도 봄은 아니라고, 변덕스러운 날씨에 움츠린 몸을 펴지 못하고 지내던 어느 날, 문득 부엌 환기통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와락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작년에 이어 올해도 박새 부부가 찾아든 것이다. 작년에 왔던 그 새들일까?
이사 오던 첫해 봄 어느 날 부엌 환기통에서 정체불명의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금속판의 울림 탓도 있겠지만 망치로 두들기는 듯 탕탕거리고 우득우득 뜯어내고 바각바각 긁어대는 소리가 장히 대단하였다. 처음에는 쥐인 줄 알았다. 쫓아 내보내기 위해 환기구 덮개를 탕탕 치면 그때뿐 잠시 후 그 소리는 다시 들려왔다. 환기통 안에서 대단한 공사가 벌어지는 것 같았다. 마지막 방법으로 환풍기 작동 스위치를 눌렀다. 쥐가 튀어나오리라 예상했건만 작은 깃털과 비닐 조각, 가늘고 짧은 나뭇가지가 바람의 기세를 타고 흩어져 나오는 것을 보며 아차 싶었다. 새가 둥지를 짓고 있었던 것이다. 그 후로는 음식을 만들면서 냄새와 연기를 빼야 할 때도 환풍기를 틀지 않았다. 눈앞의 얇은 금속판 안쪽에서 새가 알을 품고 있구나, 곧 새끼가 태어나겠구나 생각하면 귀한 선물을 받고 있는 듯 고맙고 조심스러워졌다. 부엌 창을 통해 부리에 무엇인가를 물고 환기통으로 부지런히 드나드는 작은 새를 보면 그의 헌신적 노역이, 애처롭고 연약한 작은 생물체의 삶이 눈물겹기도 하였다. 어느 날부터인가 새끼 새들의 여린 지지거림이 들려오고 또 어느 날부터인가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으면 이 둥지에 깃들였던 새들이 제 목숨껏 운명껏 살기 위해 떠났구나, 뿔뿔이 헤어졌구나, 연약한 날개로 혼자 살아갈 수 있을까, 조금은 스산한 마음이 되었다.

봄은 생명과 부활의 계절이다. 무논에서는 떠나갈 듯한 개구리 울음소리, 낮은 산에서는 산비둘기 구구대는 소리, 꿩꿩! 꿩이 우는 소리가 정적을 휘젓고, 화사한 햇살 아래 폭죽처럼 현란하게 피어나는 꽃을 보노라면 천지간에 가득한 생명의 찬가,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축복의 말씀이 들리는 듯하다. 땅을 기는 작은 곤충들은 그들대로 짝과 먹이를 찾는 생명의 잔치로 또 다른 한세상을 연다. 겨우 며칠, 혹은 한 철이나 일 년 정도, 자기에게 주어진 삶이라는 과제를 완수하기 위해 그렇듯 필사적으로 살아내며 종족을 남긴다는 법칙과 질서에 충실한 것이다. 매미는 고작 열흘 정도 부여된 지상의 삶을 위해 7년 동안 어두운 땅속에 있어야 한다고 하는데, 긴 세월 살아내는 우리 인간은 이 세상에 오기 위해 얼마만 한 어둠과 윤회의 먼 길을 거치는 것일까. 봄이 무르익어간다는 것은 내게 김매기의 시작, 풀과의 전쟁이 시작되었음을 뜻한다. 끊임없이 돋아나는 풀을 가차 없이 뽑아내면서도 메마른 땅속에서 최소한의 생존 조건을 찾아 필사적으로 뒤엉켜 뻗어가는 뿌리에 매번 감동과 함께 일말의 죄책감을 느끼곤 한다. 우리가 하잘것없는 잡초라 일컬으며 함부로 뽑아버리는 그것들이 살기 위해 얼마나 온 힘을 다 바치고 있는가를 보기 때문이다. 오직 살고자 하는 그들을 한 번의 호미질로 뽑아내 팽개치는, 생사 여탈의 권한이 내게 있는 것일까. 생명이 있는 것은 다 아름답다. 슬프고 아프고 기쁘고 안타깝다. 갓 태어난 아기를 향해 “네가 어디에서 왔니?”라고 묻지 않은 부모는 없을 것이다. 우리는 진정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 것일까 하는 물음은 영원한 화두이자 예술과 종교와 철학의 근원적 자리이며 우리를 끝없는 겸손과 하심으로 이끄는 길잡이일 것이다.

혹자는, 우리는 너무 살려고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말로 오로지 쾌락과 동물적 본능에 충실한 현 세태를 개탄하며 삶에 대한 우리의 태도에 반성을 촉구했지만, 이 밝은 봄날의 뜨락에서 나는 살고 싶다, 더 살고 싶다고 중얼거린다. 갓 피어나는 꽃에서, 그 꽃의 시듦과 조락과 떨어져 내리는 씨앗을 동시에 바라보는 나이에 이른 지금, 살아 있다는 것이 바로 행복이며 그것으로써 충만한 생명의 소리이고 환희임을 아는 까닭이다.

“대한민국 작가 지망생의 모범적인 교과서, 문인 1백 명이 뽑은 ‘21세기에 남을 고전’에 가장 많은 8편이 추천된 작가”라고 딱딱하게 소개하고 싶지 않습니다. 대학 신입생 시절 오정희 선생의 <유년의 뜰>을 읽은 후 20년 가까이 전 그의 충실한 팬이었습니다. 그는 ‘일물일어 一物一語’, 곧 하나의 사물을 나타내는 단어가 오직 하나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치밀하게 써온 탓에 그동안 우리는 다섯 권의 소설집, 한 권의 장편소설만으로 그를 만났습니다. 감질나게, 갈급하게 보아오던 선생의 글을 앞으로 네 달 동안이나(!) <행복>에서 만나게 됩니다. ‘생로병사’라는 주제를 일상 속의 이야기로 풀어낼 생각이랍니다. 선생만의 ‘드러내면서 숨기는 글쓰기’는 첫 번째 글부터 빛나고 있습니다. 저는 “나는 더 살고 싶다”라는 문장에서 마음이 멈추고 말았는데, 여러분은 어디에서 마음을 내려놓으셨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