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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02월 조르바, 지금 이 순간 뭐 하는가? (이윤기 소설가)

열 살 남짓 되던 무렵, 안중근 의사 이야기를 감명 깊게 읽었다. 갓 태어난 아기 응칠(안 의사의 어린 시절 이름)의 등에 북두칠성 모양의 점 일곱 개가 찍혀 있었다고 했다. 그 대목이 참 인상적이어서, 저고리 벗고 어머니에게 내 등에도 혹시 그런 점이 없느냐고 물었던 적이 있다. 그런 점이 없다고 해서 나는, 훌륭한 사람 되기는 글렀구나, 하고 가볍게 실망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덜떨어져도 한참 덜떨어졌던 나는, 광복절인데 하늘은 어째서 여느 때의 하늘과 똑 같은가, 6월 25일인데 어째서 하늘은 핏빛으로 물들지 않을까, 이런 것들이 퍽 궁금했다.

나는 ‘의미 부여’에 대해 쓰고 있다. 그 어린 나이에 나는 자꾸만 어떤 사상 事象에 의미를 부여하고, 나 자신을 그 의미 체계에 가두고 싶어 했던 모양이다. 중학교 시절부터는 교회를 들락거리면서 크리스천들과 합류함으로써 비슷한 의미 체계를 공유한 동아리와 무리를 짓는 것이 편했다. 김춘수 님의 시 ‘꽃’을 읽고 마음 바닥으로부터 소스라침을 경험했던 것도 그 무렵이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중략) /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의미가 되고 싶다.”

나는 이 시를 많은 친구에게 소개했던 것 같다. 처음에는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던 친구들이 시에 공감하는 순간 ‘잊혀지지 않는 의미’가 되어가는 것 같았다. 사춘기 이후 무수한 의미 체계의 망상조직 網狀組織과 합류했다. ‘의미의 철학’과의 야합이었다. 그런데 청년 시절이 되면서 ‘의미 부여’는 모든 슬픔의 씨앗이 아닐까 싶어지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나는 의미를 부여하는 버릇을 버렸다. 이 시를 김춘수 님의 대표작으로 꼽는 사람들에게 나는 무척 골이 난다. ‘의미의 철학’과의 만남을 노래한 초기작일 뿐이다. 요즘, 만난 지 100일이 되었다고 쌍가락지 나누어 끼고, 1년이 되었다고 ‘커플 룩’이라던가, 거의 같은 옷 나누어 차려입고 다니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나는 그런 의미 부여가 장차 사랑이 뜻대로 풀리지 않을 경우 그들을 얼마나 울적하게 할 것인지 걱정하게 된다. 나는 이런 일련의 생각을 ‘탈의미의 철학’이라고 부른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거닐었다고 해서 해운대 백사장의 그 모래를 밟던 사연을 각별하게 기억해주기를 바라는 데서 유행가는 시작된다는 것이 나의 오래된 생각이다. 함께 놀던 님들이 지금은 어디에 있느냐고 자꾸 유달산을 조르지 말아야 한다. 해운대 모래는 모래, 유달산은 유달산이다. 거기에 의미를 부여하기 시작하는 순간부터 우리는 백사장 모래와 유달산의 참의미로부터 장님이 된다. 언필칭 비극의 씨앗이다. 백사장과 유달산은 그냥 거기에 있던 것들이다.
미국과 한국에서 약 15년 동안을 각별히 사귀어 모시던 선배가 있었다. 5년 전에 돌아가신 이분, 평소에는 담배를 피우지 않는데도 내가 그의 미국 집 벽난로 앞에서 담배를 피우면 몇 대씩 빼앗아 피우고는 했다. 중독되면 어쩌시려고요? 걱정스러워하는 나에게 그는 명쾌하게 영어로 대답했다.

“No attachment, no detachment(집착 없는데 해탈 없지요)!”
무분별한 의미 부여와 집착은 우리의 감옥이 될 수도 있다는 소식 아닌가?
내가 참 좋아하는 소설 속 인물 <그리스인 조르바>의 어록.
“중요한 것은 오늘, 이 순간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나는 자신에게 묻지요.
‘조르바, 지금 이 순간에 자네 뭐 하는가?’
‘일하고 있네.’
‘잘해보게.’
‘조르바, 자네 지금 이 순간에 뭐 하는가?’
‘키스하고 있네.’
‘잘해보게. 키스할 동안 딴 일일랑 잊어버리게. 이 세상에는 자네와 여자밖에는 아무것도 없네. 키스나 실컷 하게.’”

<행복> 독자를 위해 이윤기 선생이 들려주는 두 번째 이야기입니다.
“의미 부여는 모든 슬픔의 씨앗이 아닐까”란 문장에서 한 번,
“집착 없는데 해탈 없지요”란 문장에서 한 번,
“중요한 것은 오늘, 이 순간에 일어나는 일”이란 문장에서
마지막으로 또 한 번 밑줄을 그었습니다. 그러곤 깊은숨 내쉬고 생각합니다.
‘나는 지금 이 순간에 뭐 하는가?’
여러분은 지금 이 순간 뭐 하시나요?
이윤기 선생의 글을 새해 벽두부터 만나는 것, 참 행운입니다.
2010년의 하루하루엔 딴 일일랑 잊어버리고 지금 하는
‘그 일’만 ‘실컷’ 하며 ‘잘’ 살아보렵니다.
그럼 ‘지금 이 순간에 뭐 하는지’ 스스로 알게 되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