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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01월 사랑을 쓰려거든 연필로 쓰라니! (이윤기 소설가)

지난 한 주일 내내 옛날에 내가 국어사전 속표지에다 그렸던 그림을 생각했다. 왜 그랬는가 하면, 세밑에 독자들에게 던져줄 메시지 한 줄 찾아내느라고 그랬다.
국민학교 졸업하면서 상을 받았다. 한 5백 쪽 정도 되었나, 꽤 도톰한 국어사전이었다. 청소년 시절, 내 공부방이 산사태를 만나면서 수백 권의 책을 잃는 바람에 지금 그 사전은 내 수중에 없다. 하지만 나는 그 사전 속표지에다 내 손으로 그렸던 그림은 생생하게 기억한다.
등대. 어둠 속에서 빛줄기를 양쪽으로 좌악 비추는 등대. 그리고 그 등대로 오르는 희미한 계단. 계단 아래쪽에다 국민학교를 갓 졸업한 소년이 쓴 잠언 한마디. 아마 이런 뜻이었을 것이다. “희망의 등대에 오르려면 실천의 계단을 올라야 한다.”

소년은 ‘실천의 계단’을 ‘희망의 등대’에 오르는 한 과정이라고 파악하고 있었음에 분명하다. 이제 60대 중반으로 접어든 그 소년, 생각이 많이 바뀌었다. 그는 더 이상 ‘실천의 계단’을 ‘희망의 등대’에 오르는 한 과정으로 보지 않는다. 그는 실천의 계단과 희망의 등대를 동일시한다. 희망의 등대는 ‘지금’, ‘여기’에 있는 것이지, 실천의 계단 저 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그는 믿는다. 행복에 대해서도 그는 똑같은 믿음을 가지고 있다.

나에게는, 세밑은 크고도 바람직한 결심의 밑그림이 그려지는 시기, 설날은 그 결심이 실천에 옮겨지는 첫날이라고 믿던, 어리고 어리석던 시절이 있다. 그러던 내가 어느 한순간, 설날에다 의미를 부여하는 어리석은 짓을 그만두었다. ‘의미 부여’는 들쩍지근한 비극의 씨앗이라고 믿게 된 순간이기도 하다. 나에게는 ‘지금’, ‘여기’가 소중하다. 어린 시절의 나는 밤바다를 밝히는 희망의 등대가 되고 싶었던 모양이나, 지금의 나에게 그런 것은 없다. 따라서 희망의 등대에 오를 일도 없다. 계단을 오르는 순간순간이 나에게는 소중할 뿐이다. 따라서 설날은 지구가 한 주기의 공전 公轉을 완료하고 새로운 공전을 시작하는 날일 뿐 나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 나는 계절에도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자연은 인간을 위해서 계절의 주기를 반복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천지불인 天地不仁. 자연은 인간에게 어질지 않다. 자연에게 인간은 추구 芻狗, 짚으로 만든 개에 지나지 않는다. 노자 老子 말씀 이 한마디를 읽는 순간 나는 얼마나 놀랐던지. 그때부터 나는 ‘지금’, ‘여기’만을 소중하게 여기면서 살고자 애쓴다. 나는 내 가족과의 행복 같은 것도 따로 설계하지 않는다. ‘내’가 그들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지 그들이 ‘나’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오로지 이 믿음에만 의지해서 살 뿐이다. 행복은 내가 덤으로 누리는 마음의 한 상태다.

‘꿈으로 가득 찬 설레는 이 가슴에 사랑을 쓰려거든 연필로 쓰세요….’ 이렇게 시작하는 유행가를 처음 들었을 때 나는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어째서 연필로 써야 하는가 하면, ‘사랑을 쓰다가 쓰다가 틀리면 지우개로 깨끗이 지워야 하니까’ 그렇단다. ‘처음부터 너무 진한 잉크로 사랑을 쓴다면 지우기가 너무너무 어렵’기 때문에 그래야 한단다. 도대체 지우개로 지우는 상황이 전제되는 사랑을 왜 시작하는가? 이 노래 지은 사람, 이 노래 부른 사람,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는지 퍽 궁금한데, 모르기는 하지만 아직도 쓰고 지우기를 되풀이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가수였다면 이런 노래 부르기는 끝까지 거절했을 것이다.
지우기가 전제되어서는 안 된다. 지우개가 필요 없는 나날, ‘지금’, ‘여기’에서 사는 참살이의 나날이 되어야 한다. 따라서 새해 첫날의 결심 같은 것은 새삼스러운 것이다.
어느 구도자가 산중에서 도를 닦고 있는 스님에게 여쭈었단다.
“스님, 대도 大道에 이르려면 어찌해야 합니까?”
그 스님, 지팡이로 땅바닥에다 줄을 하나 좌악 그으면서 이러시더란다.
“지금, 여기서부터 시작하거라.”

ps. 이윤기 선생은 글 부리고 말 부릴 때마다 묻는다고 합니다.
“소통을 원하는가, 과시를 원하는가?” 이번에도 이렇게 근사하게 소통하는 글로 <행복> 독자를 만났습니다. 희망의 등대는 지금, 여기에 있는 것이지 실천의 계단 저 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평범하고도 경이로운 메시지가 그것입니다. 새해를 시작하는 우리가 오래 되새겨야 할 이야기입니다. 외부 원고를 늘 사양해오던 그가 <행복> 독자를 위해 특별히 마음을 돌려준 덕에 앞으로 넉 달 동안 이윤기 선생의 ‘정말 하고 싶은 이야기’를 듣게 됐습니다. 행복합니다.
얼마 전 그의 에세이집 <잎만 아름다워도 꽃 대접을 받는다>와 그가 번역한 <장미의 이름>(열린책들 세계 문학 시리즈)이 나왔습니다. 또 행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