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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12월 이 겨울, 시를 읽는 마음 (최영미 시인)

내가 좋아하는 세계의 명시들을 소개한 <내가 사랑하는 시>를 펴낸 뒤에 시를 읽는 일이 많아졌다. 아름다운 문장을 소리 내어 읽는 특별한 즐거움을 오래 잊고 살았던 터라, 방송에서 신문에서 잡지에서 나를 찾으면 기꺼이 고마운 마음으로 달려가곤 한다. 전업 시인이 되어 시집을 비롯해 산문집과 소설을 여럿 출판하면서도 요즘처럼 즐거운 마음으로 신간을 홍보하기는 아마도 처음인 것 같다. 방송국에서 찻집에서 사람들에게 내 머릿속의 보물을 꺼내어 자랑하며, 같은 말을 반복하면서도 내 입은 지치지 않는다. 내가 사랑하는 시를 말하며 살아 있다고 느끼니, 어린 시절의 취미가 ‘일’이 되었으니 내 꿈을 이루었다고 말해도 틀리지 않으리. 고백하건대, 나는 시를 쓰기보다 읽기를 더 좋아한다! 눈으로만 보지 말고, 소리 내어 읽어야 시를 제대로 감상할 수 있다.
2천 년 전, 2백 년 전에 활활 타오르다 꺼진 언어들을 다시 불러내어, 마치 미라를 감싼 붕대를 풀듯 한 구절 한 구절 그네들의 오래된 사랑과 분노를 되살리며, 그녀 혹은 그를 사로잡았던 마음의 비밀을 추적하며, ‘입으로 머리로만이 아니라’ 온몸으로 시를 암송하며, 그들의 목소리가 자신의 목소리와 섞이는 기쁨을 맛보시기를. 몰입하여 낭독하는 어느 순간 당신이 그가 되는 기적을 체험해보시기를. 사포(인류 최초의 여성 시인)와 셰익스피어와 김기림의 머릿속으로 들어가는 지적인 모험을 시도하시기를 독자에게 권한다. 이것은 우리 인간이 불멸을 획득하는 가장 싸고도 안전한 방법이니, 문명인이라면 자신의 애송시가 한두 편은 있어야 한다.

며칠 전 한국방송과 대한출판문화협회가 주관하는 ‘2009 북 쇼’ 행사에 초대되어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시를 낭송하는 희귀한 경험을 하였다. 텔레비전 중계 카메라와 청중에 둘러싸여 이런저런 상념의 조각들이 뭉게뭉게 내 머릿속에 피어났다. 광화문 한복판에서 세종대왕과 이순신 장군의 호위를 받으며 대낮에 시를 읽는 영광을 누리다니. 세종대왕의 동상이 보이는 맨 앞줄에 앉아 내 눈은 노란 은행잎들이 흩어진 거리를 더듬으며, 경복궁 돌담길을 추억한다. 내 생애 가장 빛나던 길, 도서관으로 향하던 길, 도시락 가방과 책가방을 양손에 들고 노란 은행잎을 밟으며(내 발밑에서 바삭거리던 낙엽 소리와 감촉을 나는 아직도 기억한다) 중앙청에서 정독도서관으로 이어지던 길. 책 냄새를 맡으려고, 위대한 영혼들을 만나려고 일요일마다 새벽에 타박타박 집을 나왔다. 월말고사를 앞두고 시험공부하러 간다는 당신 딸의 거짓말에 속아, 순진한 우리 엄마는 3년간 정성껏 도시락을 싸주셨다.

도서관에서 빌려 읽은 고전 속의 명언들과 세계의 명시들을 공책에 베꼈다가, 학교 가는 길에 슬금슬금 외웠다. 집에서 학교까지, 평창동에서 상명부중 입구까지 버스로 세 정거장. 큰길이 끝나면 가파른 언덕을 한참 올라가는, 잰걸음으로 30분 거리를 걸어서 통학했다. 매일 반복되는 등굣길의 지루함을 잊으려 공책을 들고 시를 외웠다. 교실에 도착하면 책가방을 내려놓고 처음 하는 일이, 방금 외운 시들을 친구들 앞에서 낭독하는 것이었다. 한 군데, 두 군데 이상 틀리면 용서하지 못하고 다시 처음부터 시작했다. 그것들이 완벽하게 내 머리에 달라붙어 내 것이 될 때까지. 어제 외운 시라도 오늘 다시 복습해야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래, 나는 시에 미친 아이, 버스 값을 아껴 삼중당 문고를 사 보던 문학소녀였지.

시야, 고마워. 나, 너를 죽는 날까지 붙들고 살게. 양쪽에서 타들어가는 촛불처럼 금방 타올랐다 꺼질 운명일지언정, 내가 사랑하는 대지를 밝히며, 스러지는 꽃들을 노래하리. 가난한 사랑 노래를 부르며….

‘선운사에서’ ‘슬픈 카페의 노래’ ‘서른, 잔치는 끝났다’ 등 순결한 말더듬이 같은 그의 시를 읽어 내려가던 20대가 떠오르시나요? 밑줄 그어가며, 시집 한 귀퉁이에 달뜬 감상도 적어가며 시를 읽던 우리는 청춘이었습니다. 이 겨울, <내가 사랑하는 시>라는 책을 들고 우리 곁에 온 최영미 시인. “여러 삶을 살 수는 없지만 여러 시를 읽을 수는 있다”며 그가 건네는 시 예찬에 마음이 가는 건, 아직도 우리 맘이 푸르기 때문일 겁니다. 최근 그는 일기를 쓰듯 일상과 상념을 풀어낸 산문집 <우연히 내 일기를 엿보게 될 사람에게>도 출간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