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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11월 명품의 뿌리엔 아트가 있다 (이영란 <헤럴드경제> 부장)

출근길에도, 퇴근길에도 나는 늘 ‘명품 패션’과 함께한다. 명품 옷과 백으로 칠갑을 하냐고? 아니다. 143번 버스를 타고 조석으로 청담동 로데오 거리를 오가기 때문이다. 루이비통이며 아르마니, 프라다, 구찌, 까르띠에, 질샌더 그리고 조영남 씨가 ‘돌잔치 가봤니’라고 부르는 돌체 앤 가바나까지 운집한 거리를 관람석(비록 버스 좌석이지만)에서 즐기게 해주는 143번 버스에 감사하며, 눈 호사를 ‘원 없이’ 한다.
‘어느새 계절이 바뀌었구나’느끼게 하는 것도 명품 브랜드의 쇼윈도다. 그 ‘윈도 디스플레이 작품’(에르메스의 경우 플라잉시티, 배영환 등 실력파 작가들이 작업한다)을 감상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까르띠에는 로데오 거리에 단독 매장을 내면서 자그마치 1년여 동안 공사를 했다. 그렇다고 뭐 대단하게 특별한 매장이 탄생한 건 아니다. 지극히 까르띠에다운(그러나 이 점이 매우 중요하다!) 단정하고 우아한 매장이 모습을 드러냈을 뿐이다. 물론 까르띠에는 디스플레이도 늘 간단명료하다. 그런데 그 절제미는 (찬란한 빛을 발하며) 품격의 정수를 보여준다.

얼마 전부턴 프라다가 건물 전면을 하얀색의 가림막으로 덮어버려 “어쩐 일이지?” 하고 놀랐다. 가림막을 살펴보니 ‘내부 공사 중’이라고 쓰여 있다. 그런데 그 가림막조차 너무 산뜻하고 세련돼서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순간 최근 막을 내린 ‘프라다 트랜스포머’가 생각났다. 올 들어 나는 프라다의 문화 활동을 분석하는 논문을 쓰기 위해 자료를 검토하다가 사소하지만 놀라운 걸 발견했다. 그것은 트랜스포머 행사의 안내 요원, 기사 등의 유니폼을 프라다스럽게(?) 특별 제작해 디자이너(오너) 미우치아 프라다에게 보고하는 자료였다. 무엇보다 놀라웠던 건 미우치아가 머물 신라 호텔 객실 청소 요원의 근무복(흑백의 미니멀한 의상)을 제작한 후, 그 옷을 입은 여성들의 정면.측면 사진까지 첨부했다는 점이다. 순간 숨이 탁 막혔다. 적어도 자신을 둘러싼 반경 100m 안의 비주얼과 스타일은 ‘반드시 일사불란하게 통일돼야 한다’는 그 완벽주의에 기가 질린 것. 그의 완벽주의는 정평이 나 있지만 그 정도인 줄 몰랐고, 명품이 저절로 ‘뚝딱’된 게 아님을 절감했다.
그런데 더 흥미로운 건 이 깐깐한 여성이 예술에서만큼은 대단히 도발적인 것을 선호한다는 점이다. 패션에서는 ‘절제’를 금과옥조처럼 모시지만, 예술에선 ‘도발’(내지는 ‘전위’)을 극진히 모시니 양극단을 훨훨 오간다고나 할까? 게다가 요즘 프라다의 재무 상황이 썩 좋지 않음에도 미우치아는 ‘프라다 트랜스포머’라는 예술 프로젝트에 1백억 원이 넘는 예산을 쏟아부었다. 완벽하게 새로운 개념의 이 프로젝트는 미우치아가 건축가 렘 쿨하스와 손잡고 추진한 것으로, 서울의 궁궐(경희궁)과 회전하는 첨단 구조물의 만남이란 점에서 전 지구적으로 화제를 뿌렸다. 게다가 건축물이란 으레 ‘딱딱하고 한번 세우면 그만’이란 고정관념도 보란 듯 깨뜨렸다.

미우치아는 미술광이기도 하다. 남편과 함께 20여 년 전부터 미술에 관심을 갖고 각종 기획전을 개최해왔다. 루이스 부르주아, 데이빗 스미스, 애니시 카푸어 등이 밀라노의 프라다 갤러리를 거쳐 갔는데 이들이 유명하기 전에 발탁했으니 미우치아의 ‘예술적 더듬이’는 ‘초슈퍼급’인 셈이다. ‘예술이 없는 삶은 상상조차 할 수 없다’는 생각에서 출발한 프라다의 미술 사업은 수천억 원대의 아트 컬렉션으로 발전했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명품 브랜드가 오늘날 어떻게 명품이 됐는지, 그들이 정상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어떤 노력을 경주했는지 헤아려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명품의 뿌리에는 아트가 있으니까, 그리고 아트에는 명품이 추구하는 비전과 철학이 있으니까. 물론 명품 패션에도 지탄받아야 할 요소(호되게 비싼 가격 같은)가 없는 건 아니지만, 정점을 견지하기 위해 저들이 기울이는 예술적 노력은 살펴볼 만하다.

기술과 디자인력이 날로 평준화되고 있는 시대를 맞아 명품 브랜드는 예술에서 답을 찾고 있다. 명품 브랜드에 예술적 경쟁력이 없다는 건 ‘도태’를 의미한다. 초특급 명품 브랜드치고 예술과 협업하지 않는 브랜드는 없다. 모바일 미술전을 시도한 샤넬이 그렇고, 파리 불로뉴 숲에 대규모 미술관을 짓고 있는 루이비통이 그렇다. 또 최고 권위의 현대미술관을 운영하는 까르띠에도 빼놓을 수 없다.
따라서 만약 당신이 루이비통 매장을 찾았다면 그들이 매 시즌 기용한 아티스트의 카탈로그를 꼭 한번 살펴보도록 하자. 핸드백이며 지갑만 죽자 살자 연구(?)할 게 아니라, 이들이 자랑스레 비치해놓은 자료들을 들여다보자. 매장 한구석엔 이를 볼 수 있도록 근사한 소파도 준비돼 있다. 루이비통과 협업한 리처드 프린스며 무라카미 다카시의 화집을 보며 명품 업체가 어째서 예술과의 협업에 목을 매는지, 예술과의 파트너십이 어떻게 빛을 발하는지 살펴보는 건 의미 있는 일이다. 더구나 당대 최고의 아티스트들이니 당신의 예술 지수를 높이는 데도 좋을 것이다. 이 가을, 우리도 예술적 소비자가 되어보자. <행복이 가득한 집> 독자라면 충분히 그럴 만한 자질이 있을 테니까.

ps ‘3초백, 5초백, 7초백을 아세요?’라는 타이틀의 신문 기사를 많이들 기억하실 겁니다. 거리에서 3초마다 마주치는 루이비통 백을 3초백, 구찌 백을 5초백, 에트로 백을 7초백이라 한다는 이영란 기자의 기사를 읽고 그 절묘한 의미 부여와 네이밍에 무릎을 쳤지요. 그가 이번엔 명품과 아트의 함수관계를 ‘재미지게’ 탐구하는 글을 보내왔습니다. 그의 이 이야기처럼 우리도 명품의 ‘예술적 소비자’가 되어 보는 것은 어떨까요? 욕망이라는 이름의 명품, 그 안에 숨은 열쇠, 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