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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10월 더 행복해지기(이영혜 발행인)

“으메, 이거 무신 맛이여. 오줌 맛만도 못한 걸 어떻게 돈을 받고 팔 수가 있데그려. 물장사, 물장사라 카드니 이럴 때 쓰는 말인겨.” 고속도로 휴게실에는 쏟아놓은 승객들로 왁자지껄한데 어느 아주머니가 하는 말이었습니다. 무얼 가지고 그러는 걸까, 뒤돌아보니 이온 음료 캔을 한 모금 뱉어내면서 하는 말이었습니다. 제 손에도 같은 캔이 들려 있었으니 “몇 번 마셔보세요. 저도 처음에는 그랬다니까요. 나중에는 이게 제일 낫더라니까요”라고 말해주고 싶을 정도였습니다. 그렇지만 그 아주머니, 다시는 안 마실 것 같다고 혼자 확신하면서 제 갈 길 서둘렀지요.
중국 명▪청 시대의 가구는 요즈음 보아도 아주 적절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크게 과장된 장식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원나라 때의 가구에는 온통 어찌할 바 모를 정도로 전체를 과도한 장식으로 뒤덮은 것이 있습니다. 마치 손뜨개라도 하듯 장식한 의자를 바라보다가 문득 우리나라 베개 마구리가 생각났습니다.

우리에겐 매사에 튀지 않게 하는 것이 도리에 맞는다는 유교 사상이 하얀 옷을 즐겨 입게 만들었다고 합니다. 그러니 밖에서의 근엄하고도 선비적인 사회적 강요는, 아무도 안 보는 안방 여인네의 손에 의해서는 화려함으로 보상을 했다는 것입니다. 베개의 그만큼이라도 있는 색상을 다 동원하여 수놓아 즐김으로써 해방감을 맛보았다고나 해야 할까요? 이렇게 멋드러진 해석은 이어령 선생의 글에서 읽은 듯합니다. 대평원 유목민의 ‘겔’속에는 현란한 문양의 작은 카펫들이 부를 상징하고 내부를 장식하고 있는 것이 생각났습니다. 눈이 모자르게 펼쳐진 대평원은 시각적으로 자극이 거의 없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겔’속에서나마 그렇게 채웠다고 보아야겠지요. 이것은 인간이 가진 평범함에 대한 반항일 것입니다. 원나라의 매우 장식적인 의자가 특징 없는 대륙에서 한껏 공들여볼 집착의 대상이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이 미치니 예전에 손사래 칠 정도로 싫어 했던 그 가구들이 그렇게 싫지만은 않았습니다.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고만 있지 않는 것이 인간사인지 모르겠습니다. 아무리 좋은 것일지라도 그것이 오래 지속되면 평안한 나머지 자칫 무기력해지기 마련인데, 문명이 이만큼 달려온 것은 흰 것이 아무리 좋다 해도 베개 마구리에 수놓는 마음 때문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인생은 선택이 가득한 삶으로 이루어져 있고, 누구나 몇 차례쯤 늘 해오던 선택을 정반대로 함으로써 스스로의 방법에 반항해보고, 반역을 해보는 것입니다. 아주 힘이 들 때 오히려 차분하게 깨닫고 철이 들기도 하고, 반면 너무 안정된 것이 오히려 겁이 난다고 그 자리를 박차고 나오는 반전을 만들어내는 것입니다.이렇게 자기 스스로를 엎은 사람들이 대부분 성공을 하고 이야깃거리를 제공하는 것입니다. 가장 두려운 것은 다시는 사 먹어보려 하지 않아서, 또 한 차원의 맛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도 못하고 심지어 즐기지도 못하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행복이 가득한 집>이 너무나 행복하게 느껴지기 시작했습니다. 이대로 지내다 보니 남들 저만큼 갔을 때 우리만 ‘행복이 아득한 집’이 될지도 모를 정도로 우리는 행복했습니다. 독자 여러분이 더 알아차리기 전에 우리 스스로를 반역해보았습니다. 제호의 글자체도 바꾸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어느새 색을 가득 품은 사진에 많은 자리를 내주었던 문장들을 구해내고, 컴퓨터로 잃어버린 손맛을 살려내보았습니다. 그리고 기사를 작성하는 방법 역시 눈에 드러나지는 않을지 모르지만 속은 모두 조금씩이라도 바꾸었습니다. 창간 이후 올해로 스물한 해를 맞는 동안 세 번째의 시도인 것입니다. 이렇게 스스로의 행복에 반역함으로써 우리는 또 성장을 할 것입니다. 이 나라 최고의 독자를 모시고 있는 자존의 매체로서 그동안의 나른한 행복감을 과감히 떨치었노라는 보고를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