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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02월 행복하지 않을 자유 (김순덕 언론인)

나는 장영희 서강대 교수의 칼럼을 좋아한다. 착하고 곱게 세상을 보는 마음이 신문지 바깥까지 배어 나오는 데 감동한 나머지 팬레터를 보낸 적도 있다. 하지만 장 교수의 칼럼이 내 글과 나란히 실린 날이면 전전긍긍한다. 장 교수 글이 훨씬 좋은 건 어쩔 수 없다 쳐도, 독자들이 착한 신데렐라(장 교수 글)와 사악한 계모(내 글)를 보듯 비교할 것 같아 혼자 찔릴 때가 많다. “신문에 난 당신의 글을 읽으면 마음이 불편해진다”고 지적한 독자도 적지 않다(참여 정부에선 ‘세금 내기 아까운 약탈 정부’란 내 칼럼을 사회적 마약이라고 비난하면서 청와대 취재 금지 조치를 내리기도 했다). 나는 정중히 답장을 보냈었다. “저는 언론의 역할이 권력에 대한 감시와 비판이라고 믿습니다. 보고 나서 마음이 편안해지는 글을 원한다면 성경이나 불경을 보시지요….” 그래서 <행복이 가득한 집>에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는 심히 죄스럽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감하게 쓰기 시작한 이유는 행복해지는 길은 의외로 쉽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단언하면 다음과 같다. 눈·높·이·를·낮·추·시·오!

한때 국가의 1인당 평균 소득이 오른다고 해서 국민의 행복감까지 커지는 건 아니라는 이론이 정설로 인정받았다. 최근 쏟아지는 연구 결과는 다르다. 부국이든 빈국이든, 소득이 오를수록 전반적으로 국민의 행복감은 커진다는 거다. 무릇 정부는 경제에 힘써 국민을 잘살게 해줘야 한다는 점에선 세계적 공감대가 형성됐다고 할 수 있다. 문제는 그런다고 개개인의 행복도가 고르게 상승하지는 않는다는 데 있다. 2002년 노벨 경제학상을 탄 대니얼 커너만의 연구에 따르면 첫째, 행복이란 오래가는 감정이 못 된다. 지나봐야 예전에 어땠는지 알지 복에 겨운 그 순간은 잘 모르게 돼 있다. 그나마(또는 그래서) 다행이라면, 사람은 큰일엔 쉽게 익숙해져도 작은 일에는 끊임없이 자극받게끔 프로그램 돼 있다는 사실이다. 뼈 빠지게 돈 벌어 큰 아파트로 이사시켜준 남편에겐 고마움을 못 느끼면서 돈 안 드는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에 감동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둘째, 남의 행복은 나의 불행이다. 우리 집값이 1억 원 오른 걸 알고 흐뭇하다가도 옆 동네는 2억 원 올랐다는 걸 알게 되면 생각이 달라진다. 승진했다고 마구 행복해지는 것도 아니다. 그때부터는 승진 못한 과거 동료와 비교하는 게 아니라 이미 승진한 또 다른 사람과의 비교가 시작되기 때문이다. 그럼 누구도 불행해지는 사태를 막기 위해 모든 집값과 임금을 똑같이 하거나, 계급 없는 평등 사회를 이루면 모두 행복해질까? 결코 그렇지 않다는 건 근 20년 전 공산주의 국가들의 붕괴로 판명이 났다. 잘해도 인센티브가 주어지지 않고, 못해도 뒤처지지 않는 사람만 사는 사회는 제대로 굴러갈 수가 없었다.

 

셋째, 행복이란 이성 아닌 감정의 산물이다. 게다가 사람마다 행복의 변곡점이 다 달라서, 어떤 이에겐 물질이 행복의 원천일 수 있고 다른 이에겐 슬로 라이프가 행복일 수 있다. 게다가 우리 뇌는 이성을 작동시키지 못한 채 현실을 잘못 파악하고는, 진짜 행복하게 될 수 있는 결정을 거꾸로 피하는 경우가 많다. 희한하게도, 비관적인 사람은 이런 오류에 덜 빠지게 돼 있다. 그래서 남들은 희희낙락하는 상황에서도 현실을 정확하게 보고 “아니다”라고 외친다. 본인도 별로 즐겁지 않고, 남도 과히 즐겁게 만들지 못하는 사람이 알고 보면 사회에도 자신에게도 이롭다는 얘기다. 입에 쓴 약 같은 말씀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저명하고 유능한 학자들의 행복에 대한 연구를 종합해보면, 나의 결론은 불행히도 행복과는 거리가 멀어진다.

사소한 일상보다는 진짜 중요한 무언가를 위해서 지금의 행복은 유보할 수 있고, 당장은 괴롭더라도 더 나은 무언가를 위해 끊임없이 우리를 들볶을 것 같고, 설령 싫은 소리를 듣더라도 결국은 맞다고 판명될 소리를 해댈 사람도 있을 거다. 그러고 보면 행복해질 것인지 아닌지도 각자의 선택이고 책임인 것 같다. 행복해지지 않을 자유가 있는 사회엔 행복해질 자유도 있다. 더 중요한 건, 그런 각자의 자유를 너그럽게 인정해주는 것이고.


‘행복하지 않을 자유’를 요구하는 김순덕 님은 뼛속까지 언론인입니다. 당장의 행복을 자진 반납할 준비를 하고 더 나은 세상을 이루기 위해 현실을 날카롭게 바라볼 자유가 보장되기를 꿈꿉니다. 그가 예리하게 짚은 ‘행복에 대한 진실’을 읽으며 뜨끔합니다. 마음에 따라 상대적이고도 간사하게 들고 나는 행복 말입니다. 문득 우리에게 ‘싫은 소리’를 했던 사람들의 얼굴이 떠오릅니다. 부모님, 학생 주임 선생님, 회사 선배들…. 그들이 우리를 위해 잠깐 반납한 행복은 무엇이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