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Piet Oudolf 조경가 피트 아우돌프가 설계한 영국 서머싯주 브루턴의 농장 부지에 위치한 하우저 앤 워스 서머싯
최근 서울도시건축비엔날레를 총괄한 영국 디자이너 토머스 헤더윅의 인터뷰에서 오래 머무는 문장이 하나 있다. 빅토리아시대가 남긴 가장 큰 유산은 ‘나무’라는 말, 그리고 그 유산이 자신에게 큰 용기를 준 토대였다는 고백이다. 그는 당시 도시 곳곳에 심은 가로수와 공원 시스템을 ‘보이지 않는 인프라’라 설명했다. 그 결정 덕분에 지금까지도 풍부한 녹지를 누릴 수 있고, 이런 기반이 영국 디자이너들의 감각을 키운 토양이 되었다는 것이다.
1840년대 빅토리아 파크와 버컨헤드 파크는 도시의 녹지 개념을 새롭게 정립했다. 이후 새 거리마다 느릅나무·마로니에·라임트리를 규칙적으로 심는 문화가 자리 잡아 초록이 일상이 된 도시 풍경이 만들어졌다. 제국의 확장으로 다양한 식물이 유입되면서 정원 디자인도 빠르게 발전해 영국 특유의 원예 감각이 형성되었다.

ⓒThe Newt in Somerset 영국 리치먼드에 위치한 피터샴 너서리. 온실, 식물, 카페, 라이프스타일 숍이 하나로 이어진 런던의 복합 정원 공간.
이런 전통은 지금도 영국인의 일상을 지배한다. 첼시 플라워 쇼 같은 행사뿐 아니라 콜롬비아 로드와 포토벨로 마켓에서 화분을 고르는 사람들, 계절마다 프런트 가든을 새로 꾸미는 집들, 카페와 펍 앞의 화분들이 도시를 채운다. 단순한 장식을 넘어 ‘식재로 도시를 디자인하는 문화’가 생활 속에 깊이 스며 있는 셈이다.

ⓒPetersham Nurseries 영국 서머싯 지역에 위치한 컨트리 호텔·가든·농장 복합 공간 더 뉴트.
정원을 돌보는 일은 웰빙에도 긍정적이다. RHS 연구에 따르면 주 2~3회 정원을 가꾸는 사람은 우울감과 불안 지수가 낮았다. 이런 정원 문화가 한국에서도 생활양식으로 확장된다면 공공 조경을 넘어 시민이 스스로 만드는 도시와 일상이 새로운 모습으로 변화할 것이다.
〈행복〉은 영국의 정원 문화를 직접 경험하는 8박 10일 투어를 기획했다. 오랜 시간 가꿔온 고전적 정원부터 초기 영국식 정원, 아트&크래프트 정원, 그리고 동시대 정원까지. 영국 정원 문화가 도시와 사람의 일상 속에서 어떻게 살아 있는지, 그리고 그것이 오늘의 행복한 삶과 어떤 지점을 공유하는지를 살펴보는 여정이다. 이번 프로그램을 이끄는 정원 디자이너 이진을 만나, 그가 준비한 여정에 대해 들어보았다.

INTERVIEW 여행 멘토_ 이진 정원 디자이너
영국 정원이 보여주는 생활 태도
이진 정원 디자이너는 정책 연구가로 일하던 시절, 2016년 영국 특파원으로 머물며 결정적 깨달음을 얻었다. 아무리 훌륭한 정책을 만들고 실행 방안을 고민하더라도, 결국 사람들의 삶을 더 직접적으로 바꾸는 힘은 ‘동네 정원 하나를 잘 만드는 일’에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 이후 그는 정원 디자이너의 길을 선택했다. 이번 8박 10일의 여정에서 그는 10여 곳의 정원을 함께 살피며 영국 정원의 본질과 그 속에 담긴 철학을 전하고자 한다. 그 여정의 끝에서 우리는 어떤 발견과 즐거움을 마주하게 될까?
잉글랜드에는 역사적으로 등록된 1천6백여 개의 정원과 공원이 있다고 합니다. 이번 투어에 포함된 10여 곳은 어떤 기준으로 선정한 것인가요?
단순히 유명한 장소나 관광지만 훑고 지나가는 일정이 되지 않도록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이번 코스는 교외 정원과 도시 정원의 비율을 약 5:3으로 구성했습니다. 규모가 큰 교외 정원뿐 아니라, 영국에서 살아보지 않았다면 알기 어려운 의외의 정원도 포함했어요. 특히 영국의 도시에는 작지만 특별한 정원이 곳곳에 있습니다. 시골 정원이 무無에서 유有를 만들어낸 결과라면, 도시 정원은 여러 제약을 조율해 완성한 작품에 가깝습니다. 햇빛이 거의 들지 않는 환경, 문화재 건물로 인해 손댈 수 없는 구조, 젊은 층 중심의 밀집 주거지, 기존 수목 보호로 인해 하부 식재만 가능한 조건 등 제약이 많습니다. 그런데 이런 한계가 오히려 각 정원이 개성과 독창성을 지니게 하죠. 정원 문화가 자리 잡기 위해서는 누구나 언제든 찾아가고 애착을 느낄 수 있는 ‘일상의 정원’이 필요합니다. 영국에는 그런 정원이 충분히 존재하며, 이번 투어를 통해 이를 온전히 체감할 수 있을 겁니다. 투어를 마치고 돌아오면 마음에 오래 남는 장면이 분명 하나는 있을 것입니다.
왜 지금 ‘정원 투어’를 떠나야 할까요?
2026년에도 ‘콰이어트 럭셔리quiet luxury’ 흐름은 계속될 것으로 보입니다. 보여주기식 취향에서 벗어나 스스로에게 확실한 행복감을 주는 시간을 조용히 찾으려는 움직임이 활발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정원 투어만큼 적합한 방식도 드물다고 생각합니다. 영국 정원을 찾아가면 그들의 일상이 자연스럽게 드러납니다. 티타임을 즐기는 모습, 책을 읽으며 머무는 시간, 아이들과 함께 방문하거나 반려견과 산책하는 풍경 등 정원을 생활의 일부로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이 조용한 일상성 속에서 ‘정원을 어떻게 즐기는지’가 자연스럽게 체감되고, 이는 콰이어트 럭셔리의 본질과도 맞닿아 있습니다. ‘정원이 이런 효과를 주는구나’ 같은 예상치 못한 인사이트가 생기고, 정원을 바라보는 시야도 확장될 것입니다.
직접 참여할 수 있는 가드닝 프로그램도 있나요? 정원 문화를 깊이 있게 하는 경험 말입니다.
‘서지 힐 프로젝트The Serge Hill Project’는 톰 스튜어트 스미스 정원을 중심으로 운영하는 정원 문화 플랫폼으로, 단순한 관람을 넘어 참여형 경험까지 제공합니다. 이곳에는 개인 정원인 ‘더 반 가든The Barn Garden’과 식물 실험·관찰 공간인 ‘플랜트 라이브러리Plant Library’가 마련되어 있습니다. 플랜트 라이브러리는 식물을 실험하고 기록을 열람할 수 있는 식물 도서관으로, 멤버십을 통해 다양한 워크숍과 강연에 참여할 수 있는 정원 커뮤니티의 거점 역할을 합니다. 이번 방문 시기에는 운영 일정에 맞춰 짧은 참여 프로그램을 체험해볼 수 있도록 사전 조율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자원봉사자의 신청대기가 몰린 정도로 인기가 높은 프로그램입니다.
투어가 6월 중순인데, 정원을 감상하기에 가장 좋은 시기죠?
맞습니다. 영국에서 가장 피해야 할 시기는 겨울입니다. 추위 자체보다 비가 너무 많이 오는 것이 문제이기 때문이죠. 4월 역시 여전히 비가 잦은 편입니다. 6월은 봄 식재가 여름 식재로 넘어가는 시기인데, 한국과 달리 영국의 여름 초화는 상당히 화려합니다. 유럽은 장마철이 없어 여름에 비가 와도 금세 건조해지는 덕분에 식물 생육도 매우 좋고요. 그래서 6월에서 9월 사이 영국 정원은 겨울보다 10배는 아름답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첼시 플라워 쇼를 관람하려는 목적이 아니라면, 이 시기가 훨씬 안정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본격적인 관광 시즌 직전이라 사람이 덜 붐비기 때문에 여행하기에 좋은 시기이기도 하고요.
이진 디자이너와 함께하는 여정에서 참가자들이 어떤 경험을 하길 바라나요?
영국에서 거주하며 정원을 깊이 탐구하던 제 지식을 함께 나눌 테니 정원에 조예가 깊은 분이나 업계 종사자에게도 만족스러운 일정이 될 것이고, 일반 참가자에게는 보다 편안한 해설과 함께 정원을 즐기는 방법을 전달하고자 합니다. 정원은 ‘보는 공간’이 아니라 ‘즐기는 공간’입니다. 영국의 정원을 통해 ‘내 일상에서 정원을 어떻게 즐길 수 있을까’를 생각해보고,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태도와 관점을 엿보며 정원을 ‘읽는 법’을 익히는 것이 이번 프로그램의 핵심입니다.
궁극적으로 한국 정원 문화에 바라는 점이 있다면요?
영국의 정원과 문화유산 공간은 멤버십 방식으로 운영해 방문객이 연회비를 내고 여러 장소를 이용하지만, 실제로는 모든 혜택을 다 쓰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이 멤버십을 지속하는 이유는 공간 유지에 기여하고 싶다는 마음과이를 생활 속 문화로 받아들이는 태도 때문입니다. 한국에서는 대형 정원을 조성하고 있으나 비싼 입장료 중심의 ‘놀이공원형’ 운영이 주를 이룹니다. 하지만 단순 소비로 이용하는 방식과 내가 기여한 공간을 즐기는 경험은 만족감이 다릅니다. 이러한 요소가 실제로 어떻게 작동하는지 직접 경험해보면 더 쉽게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미리 보는 방문지 하이라이트!
테마별로 즐길 수 있는 영국의 정원 투어에서 마주하게 될 풍경 몇 가지를 미리 그려본다.
Theme 1. 클래식은 영원하다
피터샴 너서리 · 햄프턴 코트 팰리스

ⓒHampton Court Palace
영국 정원을 이야기할 때 가장 대표적 장소로 꼽는 곳이 피터샴 너서리Petersham Nurseries다. 이곳은 식물을 기르는 너서리이자 런치와 티타임을 제공하는 공간이 결합된 형태로, 영국인이 클래식한 방식으로 정원을 향유하는 모습을 관찰하기에 적합하다. 리치먼드 강변을 따라 햄프턴 코트 팰리스Hampton Court Palace를 한 바퀴 둘러보는 코스가 이어지며, 런던 남쪽 지역 특유의 여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전통 정원 문화가 유지되는 풍경을 자연스럽게 접할 수 있다. 신선한 식재료로 준비한 런치를 즐기면서 고전적 정원의 정취를 온전히 경험할 수 있다.
Theme 2. 원예 연구의 중심지
RHS 가든 위슬리

ⓒRHS Garden Wisley
RHS 가든 위슬리Garden Wisley는 왕립원예협회가 운영하는 연구 중심 정원으로, 다양한 실험과 시도가 지속되는 공간이다. 최근 재정비한 ‘피트 아우돌프 정원’ ‘웰빙 가든’ ‘와일드라이프 가든’이 특히 주목할 만하다. 이곳에서는 기후변화에 대응해 재배할 수 있는 식물을 찾고, 정원이 줄 수 있는 치유 효과를 연구하며 영국 원예 산업의 새로운 가능성을 탐색한다. 전통과 실험, 과학과 예술이 함께 어우러지는 현대 정원의 모습을 보여준다.
Theme 3. 교외 정원의 새로운 트렌드
하우저 앤 워스 서머싯 · 더 뉴트

ⓒThe Newt in Somerset
잉글랜드 남부는 과거 런던 상류층의 휴양지였고, 현재는 정원 여행지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이 지역은 시골의 정취 속에서도 세련된 감성이 깃들어 있다. 하우저 앤 워스 서머싯Hauser&Wirth Somerset은 현대미술과 정원이 결합된 복합 문화 공간으로 자리한다. 예술 작품과 자연이 유기적으로 조화를 이룬다. 더 뉴트The Newt는 숙박 시설·레스토랑·농원·정원이 유기적으로 연결된 리조트형 공간으로, 정원 콘텐츠를 핵심으로 구성했다. 잉글랜드 남부의 전원 풍경 속에서 트렌디한 감각과 품격 있는 럭셔리를 함께 체험할 수 있는 장소로 주목받고 있다.
Theme 4. 오늘의 영국 도시 정원
킹스크로스 콜 드롭스 야드 캠리 스트릿 네츄럴 파크

ⓒCoal Drops Yard
킹스크로스 일대는 젊은 건축가들이 주도하는 새로운 영국식 자연주의 정원의 흐름을 보여주는 지역이다. 이곳에서는 와일드라이프 트러스트의 생태 정원, 댄 피어슨 가든 등 다양한 현대식 정원을 확인할 수 있다. 최근 정원은 생태주의와 자연주의 철학을 바탕으로, 여러 해 살아가는 초화를 중심에 두고 다양한 종이 어우러지도록 설계하는 흐름이 두드러진다. 1년생 초화의 사용을 줄여 주변 자연과 자연스럽게 이어지도록 하는 방식. 헤더윅 스튜디오가 설계한 콜 드롭스 야드Coal Drops Yard는 모던한 건축 사이로 스며든 정원이 어떤 분위기를 만들 수 있는지 뚜렷하게 보여준다.
Theme 5. 20세기 정원의 거장들
그레이트 딕스터 · 시싱허스트 캐슬 가든

ⓒSissinghurst Castle Garden
그레이트 딕스터Great Dixter는 식물을 사랑하는 이들이 반드시 들러야 할 정원으로 평가된다. 브라이언 딕스터 사후 재단 형태로 운영하고 있으며, 헤드 가드너를 중심으로 한 공동체가 정원 전반을 관리한다. 너서리와 문화유산이 유기적으로 맞물려 지속적인 식물 연구와 신규 식재 개발이 이루어지고 있다. 비타 색빌웨스트와 해럴드 니컬슨이 만든 시싱허스트 캐슬 가든Sissinghurst Castle Garden은 전 세계적으로 알려진 ‘화이트 가든’으로 유명하다. 흰색 꽃을 중심으로 구성한 섬세한 질감의 가든으로, 정제된 미학을 드러내는 대표적 디자인 사례로 꼽힌다.
독자 여행
영국의 생활 문화를 온전히 체감할 수 있는 ‘영국 정원 투어’에 함께하세요. 스튜디오 리빌드의 공동 설립자이자 정원 디자이너 이진이 멘토이자 기획자로 동행합니다. 자세한 일정은 여기서 확인하세요.
<행복> 12월호를 통해 더 많은 콘텐츠를 만나볼 수 있습니다! E-매거진 보러가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