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베데레 정원에서 바라본 벨베데레 궁전의 모습.
여행 갈때 꼭챙기는게 있다. 러닝화, 정확하게는수명이 거의 다된 러닝화다. 유행의 일몰이 패션화의 생애와 직결
된다면 러닝화의 삶은 마일리지에 달려 있다. 보통 600~700km 정도 달리면 쓰임을 다했다고 본다. 비엔나 출장을 앞두고 캐리어에 넣은건 힐 컵에 스위스 국기가 새겨진 검은 러닝화였다. 멀쩡한 신발 대신 3년이 넘는 시간을 동행한 신발을 신고 달리는 게 나름의 리추얼이라고나 할까. 비엔나 도착 후 맞이한 첫 아침, 운동복을 챙겨 입고 거리로 나선 건 그 때문이었다.
다뉴브 운하에서는 산책과 피크닉을 즐기는 비에니즈들의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비엔나는 일교차가 제법 큰 편이지만 습도가 낮아 걷거나 뛰기에 좋다. 살기 좋은 도시로 선정됐다는 이야기를 어디선가 들었는데, 그 말을 나는 뛰기 좋은 도시라고 내 멋대로 해석했다. 오랜 역사가 적층된 비엔나 건물 사이로 아침을 여는 새소리, 발 구르는 소리가 묘하게 박자를 맞췄다. 고색창연한 비엔나 거리가 추상화 작품처럼 흐릿하게 보였다. 건물과간판, 사람들을 훑으며 계속 나아갔다.
1818년에 조성한 비엔나 왕궁 정원은 산책하기에 좋다.
화면 속 지도 대신 눈앞의 풍경 따라가기
숙소인 호텔 인디고에서 출발해 북동쪽 방향으로 약 2km 정도 달릴 무렵, 멋진 건물 하나가 보였다. 벨베데레 궁전이었다. 구스타프 클립트의 <색소와 픽셀>전을 비롯해 해마다 걸출한 특별전이 열리는 벨베데레는 정원 건축가 도미니크 지라르Dominique Girard가 설계한 정원으로, 이곳을 달릴 수 있다는 점에서도 특별하다. 대칭을 이룬 꽃밭, 수조, 계단, 다듬어 진 울타리 등 바로크 정원 건축의 정수를 감상하기 위해 속도를 줄였다. 하부 벨베데레에서 상부 벨베데레로 오르는 정원은 경사가 완만해 중고강도 러닝을 하기에도 용이해 보였다. 이른 아침 각국에서 찾아온 러너들이 삼삼오오 모여 몸을 풀거나 줄지어 달리는 모습이 벨베데레 정원에 갖춰진 하나의 요소처럼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비엔나 거리는 거대한 미술관에 가깝다. 세계적 스트리트 아티스트들이 작업한 작품을 만날 수 있다.
벨베데레 정원을 빠져나와 북쪽으로 달리자 풍경이 푸른 녹음으로 변화했다. 총면적의 50% 이상이 녹지인 비엔나. 그중 프라터 Prater는 나무 20여만 그루가 숨 쉬는 숲이다. 과거에는 합스부르크 가문의 사냥터로 쓰였으나 현재는 시민을 위한 도심 속 푸른 오아시스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사진으로만 보던 대관람차를 지나자 끝없이 늘어선 밤나무 가로수길 하우 프탈레가 나타났다. 길 양측에는 자신만의 속도로 달리는 시민들의 모습이 보였다. 신고 있는 신발도, 생김새도, 속도도 제각각인 이들이 길 위를 달리는 모습을 보자 우리네 삶도 여행도 달리기를 닮아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지도를 보며 목적지로 향하는 여정이었다면 이런 생각에 다다르지 못했을지도 모르겠다.
비엔나 중심에 자리한 무모크Mumok 박물관은 독특한 파사드가 특징이다.
낯선 도시의 문화, 역사펼쳐보기
하우프탈레를 뛰고 돌아오는 프라터슈트라세의 도겐호프Dogenhof에서 멀리언 구조와 사자 조각품이 자리한 독특한 건물이 보였다. 쿠치나 이타 메시였다. 이타메시Itaineshi란 '이탈리아Italia’와 '음식(飯, meshi)’의 합성어로, 이름처럼 이탈리아와 일본 풍미, 전통 기법과 제철 재료를 조화롭게 접목한 퓨전 요리를 선보이는 곳이다. 배도 고팠고, 생경한 음식의 맛이 궁금해졌다 . 뭔가에 홀린 듯 안으로 들어갔다.
건축가 하인리히 폰 페르슈텔이 설계한 MAK 응용미술관. 고풍스러운 적벽돌이 특징이다.
메뉴판에는 쓰유를 넣은 베샤멜소스로 만든 라자냐, 유자 펜넬과 은두야를 곁들인 문어요리,케이퍼와 올리브오일에 담근 고등어를 넣은 하마치 타타키 등 다소 생소한 요리로 가득했다. 튀긴 녹두, 구운 브로콜리를 애피타이저로 먹고 폴렌타와 페코리노 치즈를 일본식으로 재해석한 미소 치킨으로 속을 채웠다. 한국에서는 먹어본 적 없는 생소한 맛이었다. 비엔나에서 이탈리아와 일본의 퓨전 음식을 먹는한국 사람, 묘한 기분이 들었다.
식사를 마치고 숙소로 돌아왔다. 본격적인 일정 중 가장 먼저 찾은 건 빈 뮤지엄이다. 비엔나의 중심인 카를스플라츠Karlsplatz 근처에 있는 빈 뮤지엄에서 진행하는 상설전 <비엔나, 나의 역사(Vienna, My History)>는 도시의 풍광이 설명하지 못하는 비엔나의 서사를 살펴볼 수 있다. 선사 시대부터 현대까지 1천7백 점 넘는 전시품이 빈의 시간을 압축해 보여준다. 5.5m² 높이의 성 슈테판 대성당 모형부터 공중에 떠 있는 거대한 프라터 고래 폴디 같은 상징적 전시물까지. 약 998평 규모의 전시장을 둘러보면 오전에 살펴본 도시가 어떤 세월을 거쳐왔는지 업체적으로 파악하는 안목을 갖출 수 있다. 사람도 외형만으로 재단할 수 없듯, 도시의 역사를 모르면 온전히 도시를 즐길 수 없다. 도시는 어쩐지 사람을 알아가는 과정을 닮아있다.
비엔나의 심장부인 슈테판 광장에는 비엔나 대교구의 슈테판 대성당이 자리한다. 비엔나 곳곳에서도 우뚝 솟은 첨탑 모습을 볼 수 있다.
수 세기를 아우르는 여정을 수십 분 만에 하니 에너지 소모가 컸던 탓일까. 식사하긴 애매한데 열량을 채워줄 무언가가 절실한 타이밍. 1백 년이 넘은 오픈 샌드위치 가게 트르체니브슈셰니에프스키Trzeniewski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곳에는 계란, 베이컨, 정어리 등 스프레드를 얹은 27가지 오픈 샌드위치를 맛볼 수 있다. 크기가 작아 한입에 넣기에도 부담 없다. 가장 인기가 많다는 계란과 베이컨 샌드위치 그리고 200ml에 불과한 작은 맥주 피프Pfiff 한 잔을 주문했다. 현지인도 빠른 에너지 충전이 필요할 때 이곳에 들러 샌드위치 한두 개에 피프를 먹는다고 한다. 매장 앞 작은 스탠딩 데이블에 서서 샌드위치와 맥주를 입안에 털어 넣으니 잠시나마 비에니즈가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사진을 찍어 SNS에 올리자 저 멀리 한국 지인들의 문의가 쇄도했다. 어딘가 나만 아는 진짜 로컬 맛집을 찾은 것만 같아 어깨가 조금 으쓱했다.
빈 뮤지엄에서는 상설 전시 <비엔나, 나의 역사>를 관람할 수 있다.
실생활속비엔나엿보기
비엔나의 디자인과 장식 예술을 둘러볼 수 있는 미술관 중 하나인 MAK 응용미술관으로 향했다. 건축가 하인리히 폰 페르슈텔 Heinrich von Stephan이 설계한 웅장한 건물은 중세부터 현대에 이르는 예술의 변화를 한눈에 감상할 수 있도록 재설계했다. 건축가 요제프 호프만 Josef Hofmann과 콜로만 모저 Koloman Moser 둥이 주도한 공예 운동 비너 베르크슈테테의 수공예 작품을 비롯해 오스트리아 왕실이 사랑한 '토넷 Thonet’의 벤트우드 가구, 구스타프 클림트가 벨기에 브뤼셀 스토클레 궁 전 벽화를 위해 제작한 금박 디자인 등을 차례로 관람하며 아르노보의 정수를 느낄 수 있었다. 다가오는 여름에는 전 세계가 당면한 물 관련 위기 를 비롯, 수자원 관리 개선을 위한 디자인 및 예술 솔루션을 조명하는 특별전 <물의 압력: 미래를 위한 디자인 (Water Pressure Designing for the Future)>을 개최한다고 한다. 저녁 식사는 숙소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해결하고 싶었다. 건너편에 프랜 차이즈 햄버거 가게가 눈에 보였지만 굳이 비엔나에서까지 먹기에는 뭔가 손해 보는 기분이 들었다. 숙소 근처를 배회하다 엑소 그릴 XO Grill이라는 간판을 발견했다. 유제품을 생산하다 은퇴한 노령 젖소 고기를 쇠고기 대신 사용해 먹는 책임감 있는 방법을 고민하고 있었다. 동시에 7주간의 건조 숙성으로 깊은 풍미를 더하고 현지에서 생산한 제철 재료를 활용하는 등 맛과 지속 가능성 모두 생각하는 비에니즈의 태도를 레시피에 담았다. 시그너처 메뉴인 하우스스매시 버거와 프렌치프라이를 주문하는데, 소스 이름이 어딘가 익숙했다. 김치 -마요Kimchi-Mayo, 익숙지 않은 풍경에서 만난 익숙하면서도 색다른 맛이었다.
빈 뮤지엄은 2023년 재개관하면서 유리와 철근콘크리트로 구성한 입면으로 새롭게 옷을 갈아입었다. 뮤지엄 테라스에 오르면 카를 성당을 비롯한 주변 풍경을 한눈에 볼 수 있다.
자신만의동선따라가기
러닝화 밑창을 보면 그 사람의 달리기를 가늠할 수 있다. 족형과 주법에 따라 밑창의 마모 부위와 정도가 고스란히 남기 때문이다. 닳고 닳은 러닝화는 한 사람의 습관을 살펴볼 수 있는 하나의 사료인 셈. 스마트폰을 열고 비엔나 여행 동선을 복기하는데, 어쩐지 지도 모양이 다 닳은 운동화 쿠션처럼 둘쑥날쑥했다. 확실히 이번 비엔나여행은 시간과 에너지 절약과는 거리가 멀었다. 하지만 곳곳을 다니며 마주한 경험은 비엔나를 보다 입체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시간이기도 했다. 목적지 없이 걷기도 하고, 달려보기도 하고, 의도치 않은 발견을 통해 이색 문화를 경험하는 일. 대다수 관광객의 이목이 집중된 곳의 반대편을 바라보는 여행. 비엔나는 자신 만의동선을 그리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도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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