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없는 사기 조각이 스승
소박한 기품이 느껴지는 공간으로 가꾸어진 정원에서 주인장의 성품이 엿보인다. 흙으로 지어 올린 집과 작업장, 비스듬하게 누워 있는 가마가 있는 웅천요의 첫인상은 적막하다. 사람이 없는 것일까? 기척을 내니 50대 초반의 남자가 소리를 낸다. 최웅택 사기장이다.
그는 찻사발과 결혼했다. 산자락에서 홀로 지내며 조선 찻사발(이도다완)을 재현하기 위해 산을 돌아다니며 흙을 찾고, 발 물레를 돌리고, 불 피워 굽기를 20여 년. 지금도 매일같이 같은 일을 반복한다. 얼음장 같은 겨울날에도 난로 위에 물을 올려놓고 손을 덥혀가며 찻사발을 빚는다.
손님을 맞이하는 다실 실내에는 조선시대 웅천 사기장들이 만들었던 찻사발과 도요지에서 나온 사기 조각들이 그가 만든 찻사발과 함께 나란히 놓여 있다. 그는 이 사기 조각들을 선생으로 삼아 공부를 해오고 있다.
“말 없는 사기 조각이 스승이고, 옛 가마터가 학습장이지예. 다른 지역에 가서 찻사발 만드는 일을 배웠다면 훌륭한 선생님의 제자가 될 수 있었겠지만 그렇게 하지를 않았습니다. 웅천 사기장이 아닌 분께 배운다면 저는 웅천의 후예가 아니니까예. 내는 죽어도 웅천의 방식대로 해야지예.”
아침 여섯 시 반 정도면 그는 작업실로 향한다. 지난밤 마무리하지 못했던 일을 끝낸 뒤에는 배낭을 메고 보개산을 오른다. 하루 코스 등산용으로 이용하기에 적당할 듯한 배낭 속에는 소주 한 병이 들어 있다. 목적지에 도착하면 소주병을 따 산의 영혼에게 술을 한 잔 올린다. 흙을 팔 때도 흙 위에 술을 한 잔 뿌리고 파기 시작한다.
(위쪽) 조선시대 분청사기를 생산했던 도요지가 있었던 경상남도 진해시 웅천면 보개산 산자락에서 선조들의 얼이 담긴 찻그릇을 만드는 최웅택 사기장.
지금이야 눈을 감고도 조선시대 웅천 사기장들이 사용했던 삼백토(백·황·적, 세 가지 빛깔의 흙)가 있는 곳을 찾을 수 있지만 웅천 사기장들의 후예가 되기로 마음먹고 귀향했던 20여 년 전에는 그렇지 못했다. 아무리 보개산을 헤매고 다녀도 찾을 수 없었다. 노곤함을 달래려 잠깐 눈을 붙였다가 칠흑 같은 밤이 되어 눈을 뜨고, 밤길을 내려오다 굴러 골반을 크게 다친 적도 있다. 그렇게 헤매기만 했던 시간이 5년쯤 되는 것 같다. 다른 흙으로는 웅천 찻사발의 고유한 맛을 낼 수 없었다. 포기하려고 했던 적도 있다. 사기장의 꿈을 접고 도회지로 나가려 작정하고 산으로 마지막 인사를 갔던 날, 그는 천우신조로 삼백토를 찾게 된다. 태풍 매미에 가마가 흔적 없이 사라졌던 적이 있고, 조선시대 가마터 밑에 집을 지었다는 이유로 검찰청에 불려갔던 적도 있지만, 삼백토를 찾지 못해 애달파하던 때에 비하면 얘깃거리도 되지 못한다.
그는 흙을 많이 캐지 않는다. 하루 한 배낭, 많으면 두세 배낭쯤 캔다. 한 배낭 흙으로 만들 수 있는 찻사발은 대략 10개 정도. 캐 온 흙은 소나무 가지에 걸러 물에 넣어 잡물을 없앤다. 이를 수비水飛질이라고 하는데 수비질을 마친 흙은 보름에서 두 달 정도 숙성시키면 점력이 생긴다. 숙성된 흙으로 찻사발을 빚고 성형을 한 뒤 일주일 정도 말려서 초벌구이를 한다. 초벌구이를 한 찻사발에 유약을 발라 구우면 찻사발이 완성된다. 가마에서 나온 찻사발 가운데 다른 사람의 품으로 보낼 수 있는 자식은 10% 정도. 일 년에 서너 번 가마에 불을 피워 몇천 점을 굽지만 다른 사람에게 보내는 것은 10여 점 안팎이다.
1 찻사발을 굽기 위해 가마에 넣은 모습.
2 죽은 나무로 만든 화분이 다실 앞에 놓여 있다.
3 웅천요 입구에 놓여 있는 달항아리. 그는 신영복 선생의 시 ‘처음처럼’을 새겨놓았다. “처음으로 하늘을 나는 어린 새처럼 /처음으로 땅을 밟고 일어서는 새싹처럼/우리는 하루가 저무는 저녁 무렵에도/아침처럼/새봄처럼/처음처럼/다시 새날을 시작하고 있다.”
4 마당에 핀 차꽃. 다른 꽃과 달리 차꽃은 가을에 핀다.
5 찻사발을 보관하는 객실로 가기 위해서는 깨진 찻사발 조각을 밟고 지나가게 되어 있다.
6 그에게 스승이 되어주었던 조선시대 웅천 도공들이 만들었던 찻그릇의 파편들.
7 지인이 보내준 국화차. 가야산에서 자란 산국화꽃을 따 한약재 우린 물에서 삼중삼포 작업을 해 만든 귀한 차다.
8 웅천요에는 가마 두 개가 있다. 바람의 정도에 따라 사용하는 가마가 다르다. 사진은 바람 부는 날에 사용하는 6기짜리 가마.
9 산에서 금방 캔 삼백토. 만져보니 솜털처럼 부드럽고 밀가루처럼 매끄럽다. 그는 보통 이 흙을 하루에 한 배낭, 많으면 두세 배낭씩 캔다.
10, 12 발 물레를 이용해 찻그릇을 만들고 있는 최웅택 사기장. 그는 혼신의 힘을 기울여 물레를 돌리니 그 기운이 찻사발에 들어간다는 이유로 지금까지 발 물레를 고수한다.
11 해외여행을 다녀온 손님이 ‘귀하게 신으라’며 선물한 루이비통 슈즈. 그는 그에게 귀한 일인 흙을 캐러 갈 때 신는다. “몇 년 동안 신었는데도 안 떨어지니 좋기는 좋네요.”
(위쪽) 그의 소망은 조선시대 도공들이 만들었던 찻그릇을 그대로 재현하는 것이다.
발 물레로 작업하는 ‘천연기념물’
그의 작업실을 찾는 사람들 중 십중팔구는 물레질하는 모습에 놀란다. 조선시대 도공들처럼 지금도 발 물레로 찻사발을 만드는 까닭이다. 그가 발 물레를 고수하게 된 것은 웅천 도요지 근처에 마련했던 첫 작업실에 전기가 들어오지 않기도 했거니와 조선 도공처럼 혼이 담긴 찻사발을 만들기 위해서는 발 물레로 빚어야 한다는 고집스러운 뚝심 때문이다. “발 물레질을 하니 조선의 미를 그대로 살릴 수 있는 게 아닐까 합니다. 그릇은 물레가 돌아가는 대로 만들어지거든예. 혼신의 힘을 기울여 물레질을 하니 그 기운이 찻사발에 들어가게 되는 것이니더.”
가마에 불 때는 법, 굽에 맺힌 유약 망울을 일컫는 ‘매화피梅花皮’ 만드는 법, 빙열(찻사발에 지진처럼 고르게 분포되어 있는 균열) 만드는 법도 혼자 공부하며 익혔다. 해법은 책에 있지 않았다. 선조들이 찻사발을 만들던 그 마음에 있었다. 서른 즈음 찻사발 만드는 작업에 들어가 수많은 실패를 거듭한 끝에 찻사발 완성에 성공한 것은 40대 후반. 그러나 아무리 못난 찻사발이라 해도 가마에서 꺼내자마자 깨지는 않는다. 며칠 동안 같이 자면서 시간을 보낸 뒤 찻사발을 깬다. ‘못나도 내 자식인 것을’ 이라고 생각하면서. “조선시대 찻사발의 미는 당당함에 있겠지예. 우주를 들고 있는 것처럼 당당한 기세를 보여줍니다. 또 가을 단풍 풍경처럼, 아름다운 경치를 감상할 수 있어예. 그 경치는 규격과 균형, 미학이 모두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것이라예.”
차를 즐기는 차인들은 그의 그릇을 보면 입을 벌린다. 마침 취재를 하던 날 웅천요를 찾은 대구의 컬렉터 정우식 씨는 아이처럼 그의 찻사발을 좋아했다. 어릴 때부터 찻사발을 접했던 그의 눈에 최웅택 사기장의 찻그릇은 예사롭지 않다. 그러나 찻사발의 아버지는 ‘아직 부족하다’고 겸손하게 말할 뿐. “제가 조선시대 찻사발을 한 점이라도 만들어야 그분들의 정신을 알 수 있지 않겠습니꺼. 2008년에는 흡족한 찻사발이 나오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가 아주 어렸을 때의 이야기다. 소에게 풀을 먹이기 위해 보개산으로 올라갔다가 깨진 사기 조각들을 보게 되었다. 그것을 계기로 정유재란 때 일본으로 끌려가며 애꿎은 죽음을 당했던 웅천 사기장 1백25명의 한 서린 이야기를 접하게 되었다. 어린 그는 생각했다. ‘그 사람들에게 제사라도 지내줘야 될 긴데….’ 이것이 사기장의 후손도 아닌 그가 사기장이 되어 웅천 찻사발을 되살리려 목숨 바쳐 물레질을 하게 된 연유다.
“집 뒤에 산이 있으니 올라가서 ‘쌀’을 지고 오면 되지예. 바람이 불어주니 가마에서 찻사발이 구워지지예. 이렇게 자연의 도움으로 살고 있으니 저도 노력해야지예. 이래 사는 기 행복이지예. 행복이 다른 데 있겠스니껴? 행복은 마음에 있는 기라예. 한 가지 일에 미치면 행복은 저절로 우러나오는 것이지예.”
찻사발 재현 작업에 집중하기 위해 어느 대학에서 제안한 도예과 교수직도 거절하고 흙을 캐러 다니는 최웅택 사기장. 내년 5월 옛 웅천 사기장들의 찻사발과 그의 근작들이 함께 선보이는 <4백 년 만의 만남>전이 대구에서 열린다. 행복한 사기장이 만들었으니 찻사발들도 행복한 얼굴을 하고 있을 것이다.
문의 웅천요 017-580-5917
<웅천 찻사발의 특징 아홉 가지>
우리가 ‘조선 막사발’ 또는 ‘이도다완’이라는 표현으로도 유명한 조선 찻사발의 아름다움에 눈뜬 것은 1960년대 이후의 일이다. 그러므로 그 이전에는 이에 관한 연구 활동이 활발하지 못했다. 일본인 야나기 무네요시가 쓰기 시작한 막사발이라는 말이 널리 퍼져 있으나 세간에는 찻그릇 또는 부처님께 공양할 때 사용하는 차공양 그릇, 제상에 올리는 제기 등으로 쓰였다는 설도 있다. 최웅택 사기장은 가루차를 마시는 찻그릇으로 사용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의 고향 경남 진해시 웅천면은 조선시대 분청사기를 생산했던 곳으로, 정유재란 때 도공과 그 가족들이 끌려가 사기장의 맥이 끊긴 상태. 그는 어릴 때 도요지나 무덤을 뒤지는 일본인 도굴꾼을 본 적이 있다고 한다. 일본에서 국보 26호로 지정된 기자에몬 이도다완을 살펴보고 돌아온 그는 “찻사발의 색이나 매화피 등 다양한 조건을 살펴보면 기자에몬 이도다완은 웅천 찻사발이 틀림없다”고 주장한다. 다음은 웅천 찻사발의 특징 아홉 가지.
- 입시울前이 하늘을 향해 벌어져 있다.
- 사발 표면에 손자국이 있다.
- 그릇의 빛깔은 비파색, 살구색, 된장색이다.
- 그릇의 깊이가 깊다.
- 그릇 뒷굽에 매화피가 응결돼 있다.
- 그릇 안쪽에 차 고임터가 파여 있다.
- 찻사발마다 크고 작은 빙열(균열)이 있다.
- 굽이 대나무 마디처럼 당당한 모양이다.
- 굽을 뒤집어 보면 중심에 산봉우리처럼 볼록하게 솟아 있는 두건頭巾이 있다.
소박한 기품이 느껴지는 공간으로 가꾸어진 정원에서 주인장의 성품이 엿보인다. 흙으로 지어 올린 집과 작업장, 비스듬하게 누워 있는 가마가 있는 웅천요의 첫인상은 적막하다. 사람이 없는 것일까? 기척을 내니 50대 초반의 남자가 소리를 낸다. 최웅택 사기장이다.
그는 찻사발과 결혼했다. 산자락에서 홀로 지내며 조선 찻사발(이도다완)을 재현하기 위해 산을 돌아다니며 흙을 찾고, 발 물레를 돌리고, 불 피워 굽기를 20여 년. 지금도 매일같이 같은 일을 반복한다. 얼음장 같은 겨울날에도 난로 위에 물을 올려놓고 손을 덥혀가며 찻사발을 빚는다.
손님을 맞이하는 다실 실내에는 조선시대 웅천 사기장들이 만들었던 찻사발과 도요지에서 나온 사기 조각들이 그가 만든 찻사발과 함께 나란히 놓여 있다. 그는 이 사기 조각들을 선생으로 삼아 공부를 해오고 있다.
“말 없는 사기 조각이 스승이고, 옛 가마터가 학습장이지예. 다른 지역에 가서 찻사발 만드는 일을 배웠다면 훌륭한 선생님의 제자가 될 수 있었겠지만 그렇게 하지를 않았습니다. 웅천 사기장이 아닌 분께 배운다면 저는 웅천의 후예가 아니니까예. 내는 죽어도 웅천의 방식대로 해야지예.”
아침 여섯 시 반 정도면 그는 작업실로 향한다. 지난밤 마무리하지 못했던 일을 끝낸 뒤에는 배낭을 메고 보개산을 오른다. 하루 코스 등산용으로 이용하기에 적당할 듯한 배낭 속에는 소주 한 병이 들어 있다. 목적지에 도착하면 소주병을 따 산의 영혼에게 술을 한 잔 올린다. 흙을 팔 때도 흙 위에 술을 한 잔 뿌리고 파기 시작한다.
(위쪽) 조선시대 분청사기를 생산했던 도요지가 있었던 경상남도 진해시 웅천면 보개산 산자락에서 선조들의 얼이 담긴 찻그릇을 만드는 최웅택 사기장.
지금이야 눈을 감고도 조선시대 웅천 사기장들이 사용했던 삼백토(백·황·적, 세 가지 빛깔의 흙)가 있는 곳을 찾을 수 있지만 웅천 사기장들의 후예가 되기로 마음먹고 귀향했던 20여 년 전에는 그렇지 못했다. 아무리 보개산을 헤매고 다녀도 찾을 수 없었다. 노곤함을 달래려 잠깐 눈을 붙였다가 칠흑 같은 밤이 되어 눈을 뜨고, 밤길을 내려오다 굴러 골반을 크게 다친 적도 있다. 그렇게 헤매기만 했던 시간이 5년쯤 되는 것 같다. 다른 흙으로는 웅천 찻사발의 고유한 맛을 낼 수 없었다. 포기하려고 했던 적도 있다. 사기장의 꿈을 접고 도회지로 나가려 작정하고 산으로 마지막 인사를 갔던 날, 그는 천우신조로 삼백토를 찾게 된다. 태풍 매미에 가마가 흔적 없이 사라졌던 적이 있고, 조선시대 가마터 밑에 집을 지었다는 이유로 검찰청에 불려갔던 적도 있지만, 삼백토를 찾지 못해 애달파하던 때에 비하면 얘깃거리도 되지 못한다.
그는 흙을 많이 캐지 않는다. 하루 한 배낭, 많으면 두세 배낭쯤 캔다. 한 배낭 흙으로 만들 수 있는 찻사발은 대략 10개 정도. 캐 온 흙은 소나무 가지에 걸러 물에 넣어 잡물을 없앤다. 이를 수비水飛질이라고 하는데 수비질을 마친 흙은 보름에서 두 달 정도 숙성시키면 점력이 생긴다. 숙성된 흙으로 찻사발을 빚고 성형을 한 뒤 일주일 정도 말려서 초벌구이를 한다. 초벌구이를 한 찻사발에 유약을 발라 구우면 찻사발이 완성된다. 가마에서 나온 찻사발 가운데 다른 사람의 품으로 보낼 수 있는 자식은 10% 정도. 일 년에 서너 번 가마에 불을 피워 몇천 점을 굽지만 다른 사람에게 보내는 것은 10여 점 안팎이다.
1 찻사발을 굽기 위해 가마에 넣은 모습.
2 죽은 나무로 만든 화분이 다실 앞에 놓여 있다.
3 웅천요 입구에 놓여 있는 달항아리. 그는 신영복 선생의 시 ‘처음처럼’을 새겨놓았다. “처음으로 하늘을 나는 어린 새처럼 /처음으로 땅을 밟고 일어서는 새싹처럼/우리는 하루가 저무는 저녁 무렵에도/아침처럼/새봄처럼/처음처럼/다시 새날을 시작하고 있다.”
4 마당에 핀 차꽃. 다른 꽃과 달리 차꽃은 가을에 핀다.
5 찻사발을 보관하는 객실로 가기 위해서는 깨진 찻사발 조각을 밟고 지나가게 되어 있다.
6 그에게 스승이 되어주었던 조선시대 웅천 도공들이 만들었던 찻그릇의 파편들.
7 지인이 보내준 국화차. 가야산에서 자란 산국화꽃을 따 한약재 우린 물에서 삼중삼포 작업을 해 만든 귀한 차다.
8 웅천요에는 가마 두 개가 있다. 바람의 정도에 따라 사용하는 가마가 다르다. 사진은 바람 부는 날에 사용하는 6기짜리 가마.
9 산에서 금방 캔 삼백토. 만져보니 솜털처럼 부드럽고 밀가루처럼 매끄럽다. 그는 보통 이 흙을 하루에 한 배낭, 많으면 두세 배낭씩 캔다.
10, 12 발 물레를 이용해 찻그릇을 만들고 있는 최웅택 사기장. 그는 혼신의 힘을 기울여 물레를 돌리니 그 기운이 찻사발에 들어간다는 이유로 지금까지 발 물레를 고수한다.
11 해외여행을 다녀온 손님이 ‘귀하게 신으라’며 선물한 루이비통 슈즈. 그는 그에게 귀한 일인 흙을 캐러 갈 때 신는다. “몇 년 동안 신었는데도 안 떨어지니 좋기는 좋네요.”
(위쪽) 그의 소망은 조선시대 도공들이 만들었던 찻그릇을 그대로 재현하는 것이다.
발 물레로 작업하는 ‘천연기념물’
그의 작업실을 찾는 사람들 중 십중팔구는 물레질하는 모습에 놀란다. 조선시대 도공들처럼 지금도 발 물레로 찻사발을 만드는 까닭이다. 그가 발 물레를 고수하게 된 것은 웅천 도요지 근처에 마련했던 첫 작업실에 전기가 들어오지 않기도 했거니와 조선 도공처럼 혼이 담긴 찻사발을 만들기 위해서는 발 물레로 빚어야 한다는 고집스러운 뚝심 때문이다. “발 물레질을 하니 조선의 미를 그대로 살릴 수 있는 게 아닐까 합니다. 그릇은 물레가 돌아가는 대로 만들어지거든예. 혼신의 힘을 기울여 물레질을 하니 그 기운이 찻사발에 들어가게 되는 것이니더.”
가마에 불 때는 법, 굽에 맺힌 유약 망울을 일컫는 ‘매화피梅花皮’ 만드는 법, 빙열(찻사발에 지진처럼 고르게 분포되어 있는 균열) 만드는 법도 혼자 공부하며 익혔다. 해법은 책에 있지 않았다. 선조들이 찻사발을 만들던 그 마음에 있었다. 서른 즈음 찻사발 만드는 작업에 들어가 수많은 실패를 거듭한 끝에 찻사발 완성에 성공한 것은 40대 후반. 그러나 아무리 못난 찻사발이라 해도 가마에서 꺼내자마자 깨지는 않는다. 며칠 동안 같이 자면서 시간을 보낸 뒤 찻사발을 깬다. ‘못나도 내 자식인 것을’ 이라고 생각하면서. “조선시대 찻사발의 미는 당당함에 있겠지예. 우주를 들고 있는 것처럼 당당한 기세를 보여줍니다. 또 가을 단풍 풍경처럼, 아름다운 경치를 감상할 수 있어예. 그 경치는 규격과 균형, 미학이 모두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것이라예.”
차를 즐기는 차인들은 그의 그릇을 보면 입을 벌린다. 마침 취재를 하던 날 웅천요를 찾은 대구의 컬렉터 정우식 씨는 아이처럼 그의 찻사발을 좋아했다. 어릴 때부터 찻사발을 접했던 그의 눈에 최웅택 사기장의 찻그릇은 예사롭지 않다. 그러나 찻사발의 아버지는 ‘아직 부족하다’고 겸손하게 말할 뿐. “제가 조선시대 찻사발을 한 점이라도 만들어야 그분들의 정신을 알 수 있지 않겠습니꺼. 2008년에는 흡족한 찻사발이 나오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가 아주 어렸을 때의 이야기다. 소에게 풀을 먹이기 위해 보개산으로 올라갔다가 깨진 사기 조각들을 보게 되었다. 그것을 계기로 정유재란 때 일본으로 끌려가며 애꿎은 죽음을 당했던 웅천 사기장 1백25명의 한 서린 이야기를 접하게 되었다. 어린 그는 생각했다. ‘그 사람들에게 제사라도 지내줘야 될 긴데….’ 이것이 사기장의 후손도 아닌 그가 사기장이 되어 웅천 찻사발을 되살리려 목숨 바쳐 물레질을 하게 된 연유다.
“집 뒤에 산이 있으니 올라가서 ‘쌀’을 지고 오면 되지예. 바람이 불어주니 가마에서 찻사발이 구워지지예. 이렇게 자연의 도움으로 살고 있으니 저도 노력해야지예. 이래 사는 기 행복이지예. 행복이 다른 데 있겠스니껴? 행복은 마음에 있는 기라예. 한 가지 일에 미치면 행복은 저절로 우러나오는 것이지예.”
찻사발 재현 작업에 집중하기 위해 어느 대학에서 제안한 도예과 교수직도 거절하고 흙을 캐러 다니는 최웅택 사기장. 내년 5월 옛 웅천 사기장들의 찻사발과 그의 근작들이 함께 선보이는 <4백 년 만의 만남>전이 대구에서 열린다. 행복한 사기장이 만들었으니 찻사발들도 행복한 얼굴을 하고 있을 것이다.
문의 웅천요 017-580-5917
<웅천 찻사발의 특징 아홉 가지>
우리가 ‘조선 막사발’ 또는 ‘이도다완’이라는 표현으로도 유명한 조선 찻사발의 아름다움에 눈뜬 것은 1960년대 이후의 일이다. 그러므로 그 이전에는 이에 관한 연구 활동이 활발하지 못했다. 일본인 야나기 무네요시가 쓰기 시작한 막사발이라는 말이 널리 퍼져 있으나 세간에는 찻그릇 또는 부처님께 공양할 때 사용하는 차공양 그릇, 제상에 올리는 제기 등으로 쓰였다는 설도 있다. 최웅택 사기장은 가루차를 마시는 찻그릇으로 사용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의 고향 경남 진해시 웅천면은 조선시대 분청사기를 생산했던 곳으로, 정유재란 때 도공과 그 가족들이 끌려가 사기장의 맥이 끊긴 상태. 그는 어릴 때 도요지나 무덤을 뒤지는 일본인 도굴꾼을 본 적이 있다고 한다. 일본에서 국보 26호로 지정된 기자에몬 이도다완을 살펴보고 돌아온 그는 “찻사발의 색이나 매화피 등 다양한 조건을 살펴보면 기자에몬 이도다완은 웅천 찻사발이 틀림없다”고 주장한다. 다음은 웅천 찻사발의 특징 아홉 가지.
- 입시울前이 하늘을 향해 벌어져 있다.
- 사발 표면에 손자국이 있다.
- 그릇의 빛깔은 비파색, 살구색, 된장색이다.
- 그릇의 깊이가 깊다.
- 그릇 뒷굽에 매화피가 응결돼 있다.
- 그릇 안쪽에 차 고임터가 파여 있다.
- 찻사발마다 크고 작은 빙열(균열)이 있다.
- 굽이 대나무 마디처럼 당당한 모양이다.
- 굽을 뒤집어 보면 중심에 산봉우리처럼 볼록하게 솟아 있는 두건頭巾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