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른쪽) 그의 미소는 다 읽고 나면 기분이 개운해지는 동화를 닮았다. 그 뒤로 보이는 작품은 그가 몰두 중인 평면 작품의 초기작.
안개 속에 나타난 몽롱한 산자락을 대하자 가슴이 할랑거리고 입가에 웃음이 핀다. 건너편에서 달려오던 지프차가 앞 유리창으로 물벼락을 확 들씌워도, 군데군데 파인 도로가 차를 뒤흔들어도 마음이 찌푸려지지 않는다. 조금 더 지나니 물과 나무가, 강과 산이, 흑과 백이 뒤엉켜 있는 양평 수입리가 눈에 들어온다. 안개를 뚫고 오솔길을 덜컹거리며 좀 더 달려가니 ‘사전가絲田家’라는 입간판 아래 은발의 노인이 서 있다. 하얗고 말간 모시옷을 입고 그 옷보다 더 환한 웃음으로 젊은 객들을 맞는다. “사진 찍는다고 우리 마누라가 곱게 입혀줬어요.” 현관문을 열고 들어선 거실 안 풍경은 더 환하다. 한창 작업 중이었는지 바닥에 펼쳐놓은 보자기, 모시의 색깔이 눈을 홀릴 지경이다. 펼쳐진 보자기 너머 거실 창문 뒤로 백일홍이 붉디붉다. 수입리의 아침저녁은 수묵화의 농담 같다고, 1년초 토종 꽃들이 차례로 움트면 이곳은 사방천지 꽃대궐이라고 동그랗게 생긴 할아버지가 꽃잎처럼 웃었다. “저 양반이 원래 이쁜 걸 좋아해요. 내 화장이 점점 진해지는 게 다 저 양반 때문이잖아. 여자가 화장하고 있는 모습이 너무 이쁘대.” 그의 아내 박영숙 여사가 곱게 붉게 웃었다.
이곳은 한국자수박물관 허동화 관장의 전시관이자 작업실이며, 주말 주택이다. 동녘 동, 빛날 화, 동화라는 이름 대신 ‘사전絲田’이라는 자신의 호를 따 ‘사전가’라 이름 붙였다. “동녘처럼 빛난다는 건 내게 좀 버거워요. 사전이란 게 풀이하면 실밭이잖아요. 논두렁 길, 밭두렁 길. 난 가난하게 태어났고 논두렁, 밭두렁 좁은 길에서 휘청대며 뛰어놀며 자랐어요. 논두렁, 밭두렁이 지천인 이 동네를 보니 이 이름이 딱이다 싶었어요.” 그 실밭 사이 수입리에 안착한 허동화 관장. 그는 이름난 자수·보자기 수집가다. 1960년대 중반, 천명인지 우연인지 인사동 골동품상에서 우연히 접한 8폭 화조도 자수 병풍에 반했다. 거미줄보다 가는 비단실을 뽑아 한 뜸 한 뜸 만들어낸 자수는 고운 걸 좋아하는 그를 단박에 매료시켰다. 수집에 뛰어든 그는 구두 닦는 보자기까지 사 모았다. 때론 넝마주이, 거지라고 오해받으며, 규방 용품만 사 가는 여학생이라 불리며 자수품과 조각보를 3천 점 넘게 모았다. 우리 자수품들이 해외로 유출되는 게 안타까워 1976년엔 한국자수박물관이라는 전시관도 열었다. 471점의 다듬잇돌을 모아 기네스북에 오르기도 했다. “괴벽, 열정, 날카로운 눈, 수집할 대상에 대한 지식, 수집품을 보관하고 전시할 공간. 진정한 수집가는 이러한 것들을 가지고 있다. 허동화 관장이 바로 그렇다.” 와이카토 박물관 큐레이터인 리파 윌슨의 표현이 아니더라도 그는 ‘모으기, 쌓아두기, 정리하기, 작품의 마음 읽기’라는 수집가의 덕목을 갖춘 탁월한 수집가다. “수집이라는 건 좋은 것만 고른다는 마음으로 되는 게 아니라, 모조리 수집한다는 생각으로 해야 해요. 전국에 남아 있는 미닫이문을 모두 모은 적도 있어요. 30만 원짜리 보자기와 3천만 원짜리 도자기를 바꾸기도 했죠.” 그는 규방 예술품 수집가일 뿐만 아니라 자수 문화의 학술적 전문가이기도 하다. 그동안 펴낸 규방 문화 책만 해도 스무 권에 가깝다.
사전가의 1층 복도에는 그의 초기 작품이 전시돼 있다. 천을 넓게 또는 작게 분할해서 캔버스 위에서 재조합한 평면 작품은 여백과 추상의 미를 보여준다. 바닥에 놓인 오브제 작품은 박물관이나 민속관에도 들어가지 못하고 버려진 옛 민속품들을 재구성한 것. 원형에 손을 대지 않고 사물이 원래 가진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것에 마음을 쏟았다.
수집가에서 작가로
“93년 히로시마에 보자기 전시를 하러 갔는데, 거기서 일본 작가의 조각품 하나에 마음을 빼앗겼어요. 수십 년 파도에 마모된 나뭇조각을 주워다가 조립한 새였어요. 그걸 본 순간 내가 모아놓은 낙지잡이 도구의 곡선이 떠올랐어요. 어부의 손때가 묻어 반질반질하고 까무잡잡한 놈인데 영락없이 새처럼 생겼거든요. 이 목기구를 가지고 새를 만들어봐야겠다는 마음에 가슴이 쿵쾅거렸지요. 한국에 돌아와 낙지잡이 도구에 쇠갈고리 하나만 꽂아줬어요. 그러고 나니 아름다운 맵시를 자랑하는 새가 한 마리 탄생하는 게 아닙니까. 그때부터 신열 오른 무당처럼 하룻밤 새 몇 점씩 만들어냈어요. 타고난 재간이나 구상으로 만드는 게 아니라 작품 스스로가 그렇게 되려고 나를 끌고 가는 것 같았어요.” 1993년부터 그는 나무주걱, 고무래, 낫, 초롱대, 제기, 먹통, 베짜기 솔, 빗장 같은 민속물로 오브제 작품을 만들어왔다. 누구의 보호도 받지 못하고 버려진 것들이 그의 손을 거쳐가면 체열이 담긴 작품으로 변했다. 호미와 고무래가 만나고, 징과 문짝의 빗장이 만나 놀랍게도 비례와 균형미를 이룬 작품이 됐다. 무엇보다 지키고 싶었던 건 조금이라도 원형을 훼손시키는 작품은 만들지 않겠다는 정신이었다. 인간이 잠시 자연에서 빌려 와 쓰는 것뿐이므로, 호미 그 안에 이미 ‘조각’이 되고 싶은 영혼이 깃들어 있으므로. “조상과 자연과 나의 합작품이죠.” 그의 작품은 기억, 인간 존재, 체험적 삶, 구원…(글자로 써놓고 나면 참 낯간지럽지만 그래도 늘 아껴두고 싶은 것들)에 대해 노래한다. 가만가만 이야기하는 그의 작품 앞에서 그 목소리를 들으려면 마음에도 적당히 뜸이 들어야 한다.
그는 몬드리안도, 샤갈도 모르지만
지난해, 그는 귀신도 보인다는 여든 살을 넘겼다. 그리고 작가로서의 영토를 조금 더 넓혔다. 그동안 모아온 아름다운 옛 천의 색과 직조를 가지고 화면으로 구성하기 시작했다. 옛 천의 뒷면에 한지를 배접하고 이를 오려내서 영감을 받는 대로 색면 구상을 한다. 그 평면 작품은 완전한 추상이 되기도 하고, 이야기가 있는 그림이 되기도 한다. 천을 넓게 또는 작게 잘라 화면에 콜라주한 작품은 때론 담담한 색채 그대로, 때론 강렬한 색채의 대비로 캔버스 위에서 뛰논다. “세상이 점점 바빠져서 그런가, 좀 단순하고 좀 어리석은 내 작품이 사람들에겐 이해가 되나 봐요. 난 직업 작가들처럼 작품에 목숨 걸 필요도 없고, 작품으로 명예 얻고 싶은 나이도 아니고… 그래서 실패에서 자유로워요.” 그의 작품은 장광설로 보는 이를 혼절하게 하지도 않고, 암호에 가까운 기호를 꽁꽁 숨기고 들어가지도 않는다. 그래서 보기 편하다. 서툰 동화처럼 보이지만, 찬찬히 읽어보면 마음이 고요해지고 말랑말랑한 힘으로 무릎 펴고 일어날 기운을 북돋운다. “대부분의 작가들은 구상에서 비구상으로 넘어가잖아요. 나는 솜씨가 서툴어서 구상을 못하다가 요즘엔 솜씨가 늘어 비구상에서 구상으로 넘어가고 있어요. 조각 천으로 꽃도 그리고 새도 그리죠. 그런데 처음에 했던 단순하고 어리석은 비구상이 더 좋았던 것 같아.”
우리 어머니들이 만들어낸 자수와 보자기처럼 그의 동화 같고 민화 같은 작품 속에는 은유와 풍류가 들어 있다. 그의 오브제 작품 중에 ‘새가 핀 나무’라는 게 있다. 작품 설명은 이렇다. ‘나뭇가지에 새가 피었다. 나비가 열렸다.’ 그의 작품 속 어떤 새는 꼬리가 있고 날개가 없다. “우리 민요 중에 이런 게 있어요. ‘숲에 숲에 영당 숲 /뿌리 없는 나무 섰네/그 끝에나 여는 열매/해도 열고 달도 열고/…/해는 따서 줌치 짚고/달은 따서 안을 받쳐//상별 따서 상침 놓고/중별 따서 중침 놓고//무지 동대 끈을 달아/무지개로 선을 둘러'(민요'두루주머니'중)이햐, 이거 얼마나 근사해요.별 따서 자수 놓고 무지개로 선 두른다는데, 나뭇가지에 새가 피는 건 비할 게 아니죠."
1 공구로 둘러싸인 작업대에서 창작 행위에 열중하고 있는 허동화 씨.
2, 3 요즘 그의 작품은 추상에서 구상으로 넘어가고 있는데, 배접한 종이를 자르고 붙여서 상상 속 화조도 같은 작품을 만들어낸다.
4 처음에는 오래된 천을 전통 문에 붙이는 작업을 시도했다. 안과 밖의 구분이 없는 넘나듦의 세계, 만물과 소통하여 만사를 형통하게 하는 전통 문의 아름다움을 이때 깨달았다고 한다.
그의 평면 작품을 두고 사람들은 마티스를, 샤갈을, 몬드리안을 떠올린다. 하지만 그는 마티스도, 샤갈도 잘 모른다. 모른다는 건 그들을 모방하려는 의도가 없다는 뜻이다. 우리 어머니들이 모네도 클레도 몰랐지만 그들보다 더 대단한 비례미를 만들어냈던 것처럼. 어머니들이 철학이나 지식 없이도 사랑과 생명을, 평화와 질서의 법칙을 만들어냈던 것처럼. 그도 어머니처럼 삶에서 얻은 인생 이야기를 천 위에 그저 놓아둔다. 그것으로 작품을 마무리한다. 그 작품은 아이에게는 옛날이야기처럼, 어른에게는 동화처럼 읽힌다.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아내, 하늘이 낸 아내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세 명이 있대요. 직장의 우두머리, 후진국의 대통령, 그리고 마누라래요. 아내는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사람이에요. 일평생 살 붙이고 살면서도 경계를 둬야 할 사람이에요. 여기서 경계는 예의예요. 존중하고 살다 보면 가장 긴장해야 할 대상이 아내죠. 근데 그렇게 사는 게 힘든 게 아니라 매일 매일이 새롭고 뒷맛이 좋아요.” 홀로 월남해서 20~30대엔 군인으로, 40대엔 회사원으로, 50~80대엔 문화인으로 산 그에게 박영숙 여사는 동역자이자 후원자였다. 서울대 치대 출신의 속 깊은 의사 아내는 그의 수집 인생을 비옥하게 해주었다. “내가 심한 담석증으로 위독해서 서울대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였어요. 한창 죽느니 마느니 하는 마당에 아내가 골동상에서 분청자기(그때 돈으로 1백50만 원)를 사다 주는 거예요. 내가 사고 싶어 했던 거니 사주는 거라대요. 나중에 알고 보니 죽기 전에 소원 풀어주려 했대요. 많이 감동했어요.” 그는 1978년 국립박물관에서 연 초대전에 ‘박영숙 초대전’이라는 타이틀을 붙였다. 국립박물관에 규방 용품 7백여 점을 기증할 때도 ‘박영숙 기증실’이라는 이름을 쓰게 했다.
작품과 열애 중인 수입리 노작가
“가끔은 잠이나 실컷 잤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해요. 아들이 전시관 지어줘서 여기에 옮겨뒀지만 언젠가는 자수와 보자기를 국가에 기증할 생각이에요. 자수나 보자기 없어도 사람은 잘 살잖아요.” 늙어갈수록 지구에서 격리되지 않으려 점점 더 집착하게 된다지만 이 노인은 백지가 되어 허허 웃는다(그가 모은 자수 중에는 보물로 지정된 것도 있다). 반세기 동안 그를 붙들었던 수집의 욕구 대신 그는 이제 작품과의 열애를 택했다. 보자기가 평생을 함께 살아야 할 배우자였다면, 작품은 무거운 짐을 주지 않는 연인이 될 것이다. “작품 하다 따분하면 나가서 낚시도 하고, 가지랑 토마토랑 돌보고 그럴 거예요. 이 동네엔 눈치라고, 눈이 유달리 큰 물고기가 많이 살아요. 난 한 번도 못 잡았는데, 우리 아들은 아주 잘 잡더라고.” 그러고 보니 그의 눈이 아주 작고, 그의 집 안에선 돋보기 하나 찾을 수 없다. “카메라 원리랑 비슷해요. 눈이 작으면 멀리 넓게 보잖아요. 근데 이 눈치란 놈은 눈이 큰데도 눈치가 빨라서 잘 안 잡힌대. 허허.” 수입리에 또 한번의 여름이 지나가고 있다. 햇빛이 방금 까놓은 귤 껍질처럼 연한 향기를 풍기며 조각 천 안으로 스며든다. 눈 밝은 노인은 맨눈으로 나무에 핀 새를 오려낸다. 어딘지 동화 같은 풍경이라고, 잠시 마음을 뺏긴다.
1 대심리 강에선 눈이 커다란 ‘눈치’라는 물고기가 잡힌다. 오늘은 직접 낚지 못하고 동네 민물횟집에서 데려와 푸짐한 매운탕을 끓일 참이다. 남편이 화장하는 여자를 좋아해서 자신의 화장이 자꾸 짙어진다는 아내 박영숙 씨와, 세상의 모든 고운 것을 사랑하는 남편 허동화 씨. 저 고운 앞치마는 촬영을 위해 허동화 씨가 직접 구입해 왔다.
2 이 집의 데크 중앙에는 강으로 바로 나갈 수 있는 계단이 뚫려 있다. 가끔 이 문을 열어젖히고 물과 달과 구름과 노니는 이태백처럼 평화로운 한때를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