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농장 입구에서는 한창 만발한 6월의 장미가 손님 을 맞는다. 박원목 교수는 반가운 이에게 최근 맛이 풍부해진 레드 와인을 대접한다.
2 정원에서 유일하게 인위적인 공사가 이루어진 곳은 이 호수 하나다.
3 박원목 씨는 한때 옛 농기구를 많이 모았다. 돌절구로 미니 연못을 만들었더니 운치가 더해진다.
4 옛 농기구를 화분 삼아 화초를 심었다. 소박한 꽃의 자태와 오래된 나무 질감이 조화를 이룬다.
5 장미는 이 부부를 이어준 꽃이다. 대학원 시절 박원목 씨가 모친 생신에 장미꽃 사는 모습을 보고 윤경은 씨는 ‘연애해봐도 되겠다’ 싶었다고.
윤경은·박원목 씨 부부는 실험과 실습을 즐기는 사람들이다. 경기도 이천에 있는 이들의 농장은 신나는 실험의 장이다. 이곳에서 아내 윤경은 씨는 매년 각종 화초를 심어 정원을 가꾸고, 남편 박원목 씨는 와이너리를 운영하며 포도를 재배해 토종 와인을 만든다. 각각 식물생리학과 미생물학을 전공한 교수로 연구 활동을 계속해온 이들은 그러니까 이론뿐 아니라 실전에서도 ‘박사’인 셈이다. 그간 쌓은 이론과 실습 결과물을 최근 각각 <식물학자 윤경은 교수와 우리집 정원 만들기> <와인 만드는 교수 박원목의 와인 강의>라는 책으로 내기도 했다.
농장에는 화훼 농원과 와이너리가 서로의 경계를 허물며 자리 잡고 있다. 키가 작은 꽃으로 이루어진 꽃밭이 포도밭과 나란히 있는가 하면, 와인 창고를 나서자마자 아치형 장미 넝쿨이 손님을 반긴다. 1988년 이 부부가 처음 이곳에 자그만 농장을 마련한 뒤로 이곳에 뿌리를 내린 꽃과 나무는 차츰 늘어났고, 1995년 박원목 씨가 와인을 제조하기 시작하면서 부부의 ‘공동 실습실’이 모습을 갖춰갔다.
원예란 대자연에 사람 손길을 살짝 보태는 일
윤경은 씨의 정원을 처음 본 이들은 고개를 갸웃할지도 모른다. 식물학자의 정원은 정리 정돈이 잘되어 있고 유럽풍 스타일이거나 일본식 정원의 풍모를 조금쯤 닮았을 것이라는 예상과 다르기 때문이다. 그는 사람 손이 닿지 않은 듯 ‘자유롭고 편안한 정원’을 추구한다. 완벽히 깔끔한 정원을 만들 생각이 없단다. 각기 다른 꽃나무가 경계 없이 섞여도 좋고, 군데군데 잡초 좀 있어도 괜찮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이게 지면 저게 피어나고, 또 지면 다른 꽃을 기다리는 거죠. 여러 화초가 얼기설기 무질서하게 심어진 듯싶어도 막상 꽃이 만발하면 서로 참 잘 어울린답니다. 초봄부터 늦가을까지 들쭉날쭉 크면서 번성하고 쇠하는 정원을 보는 게 즐거워요.”
지금과 같은 정원 풍경을 꿈꾸게 된 것은 유년 시절의 영향이다. “어릴 적 살던 곳을 떠올리면 언제나 정겨운 꽃밭이 한 부분을 자리합니다. 분명 특정 스타일로 디자인되었거나 말끔하게 정리된 정원은 아니었지요. 빈 터에 채송화, 봉선화, 백일홍 등이 올망졸망 피어 있던 소박한 꽃밭이었어요.” 연구 목적으로 식물을 키우다 언제부턴가 자유롭게 농사를 지어보고 싶다는 욕심이 생겨 농장을 꾸리게 되었다. 불모지에서 시작한 농장은 조성된 지 20년째 들어선 요즘 수십 가지 꽃과 크고 우람한 나무들로 한껏 물이 올랐다.윤경은 씨는 아침 5~6시에 일어나 먼저 정원을 휘휘 거닐며 꽃과 인사한다. 하나씩 눈을 맞추다 보면 무엇을 손질해야 할지 절로 알 수 있다.
“제가 쓴 책뿐 아니라 다른 원예 책의 내용이 각자의 정원 실정에 꼭 맞지는 않아요. 가령 책에서는 몇 센티미터 깊이로 파서 모종을 하라고 했더라도 정원의 토양·광량·배수 상태 등에 따라 결과가 달라지거든요. 시행착오란 이론과 실제가 다르다는 것을 깨우치는 과정이죠.” 시행착오를 줄여가며 실력을 키우는 방법으로 그는 ‘정원 일기장’ 쓰기를 권한다. 미국 스미소니언 박물관에서 5년 동안 쓸 수 있는 주 단위의 일기장을 구입해서 해당 날짜에 ‘블루베리를 심었음’ ‘씨앗을 받았음’ ‘광량이 부족해서 꽃을 피우지 못했음’ 하는 식으로 기록했다. 그랬더니 매년 이맘때 어떤 식물을 어떻게 돌보는지를 일람할 수 있게 되었다. 꾸준히 기록하면 원예 책에는 없는 자기만의 교과서가 탄생하는 것. 그의 일기장을 보면 전문가라도 매년 같은 실수를 반복하기도 하고, 어떤 점은 괄목할 만한 진전을 보이기도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원예란 언뜻 원하는 식물을 뜰에 심는 작업이니 무엇이든 마음대로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오랜 경험을 해본 지금, 윤경은 씨는 새롭게 깨달은 바가 있다. “주변의 지형이나 집의 위치에 따라 해가 드는 각도나 광량이 다르지요. 그러니 정원의 환경에 맞는 식물을 심어야 해요. 지하수층의 깊이가 얕은 곳은 물이 잘 빠지지 않으니, 그런 환경에서 생존할 수 있는 식물을 심어야 하고요. 그러니 원예란 주어진 대자연의 조건 아래서 사람의 손길을 약간만 보태는 일이에요.”
1, 2 박원목 씨는 유럽 포도를 재배하는 데 성공했다. 작년 고려대학교 농학 교수직을 정년퇴직한 그의 실험실에는 여전히 농심이 깃들어 있다.
3 그가 담은 산수유 꿀주, 복분자주, 머루주(왼쪽 노란 병부터).
4 스쿠버다이빙, 펜싱, 아코디언, 농기구 수집…. 지금껏 박원목 씨가 몰입한 취미들이다. 지금은 취미 치고는 심각한 일이 딱 하나 있는데, 바로 와인 만들기다.
5, 6 지금은 이렇게 쌓였지만 13년 전 처음 만든 와인은 한 양동이에 지나지 않았다.
국산 와인을 만드는 뚝심 있는 남자
박원목 씨가 자신이 직접 만든 2004년산 레드 와인을 건넨다. 그는 와인은 3년쯤 숙성되어야 맛이 좋다는 말을 덧붙인다. 와인 맛이 산뜻하고 향긋하다. “우리나라에서 재배하는 포도는 대부분 캠벨인데, 이 포도로 와인을 만들면 묵직하고 떫은맛이 강한 서양의 레드 와인에 비해 가벼운 편입니다. 슈퍼에 진열된 우리나라 포도 옆을 지나면 단내가 확 풍기지요? 국산 포도는 칠레산 포도 등에는 없는 향기가 있어서 와인에도 특유의 향이 느껴지고요.” 그렇다고 그가 무조건적인 우리나라 와인 예찬론자는 아니다. 가령 우리 포도 맛에 익숙해 토종 와인에서 느껴지는 독특한 향을 좋아하는 이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다는 식의 전제를 꼭 붙인다. 단, 무턱대고 국산 와인을 폄하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우리나라 일부 와인 전문가들의 의견 중 잘못된 것은 ‘국산 포도의 질이 좋지 않아서 와인으로 만들면 맛이 없다’는 식의 논리입니다. 같은 품종을 기르는 미국이나 일본에서는 이 포도로 와인을 맛있게 만들거든요. 결국 포도 품종이 아닌 기술 문제입니다.” 유럽 포도는 우리나라 포도와 품종이 다르다. 그래서 술로 빚었을 때도 맛과 성분이 다르다. 그는 마치 깍두기와 배추김치의 맛이 서로 다른 이치와 같다고 말한다. 그리고 와인 제조 기술은 알코올 도수, 쓴맛, 단맛의 균형을 맞추는 것이 관건인데, 이는 수확 시기와 발효 방법에서 성공 여부가 결정된다.
유럽은 양조자와 포도 농가가 일치되어서 포도를 언제 수확해야 와인 맛이 가장 좋은지를 알고 있는 데 반해 우리 농가의 경우 가장 좋은 포도는 서울의 마트에 보내고 품질이 미달되는 것을 와인 공장으로 보내는 형편이다. 박원목 교수가 이곳 농장에서 직접 포도를 기르며 수확 시기 및 발효 기간 등을 과학적으로 측정하는 것도 앞으로 우리 농가에서 와인을 만들 때 필요한 데이터로 쓸 수 있게 하기 위해서다. 원예학과 미생물학을 연구해온 박원목 씨가 와인 만들기에 헌신하는 것을 보면 대단한 와인 애호가가 아닐까 싶다. 그러나 의외로 그는 술을 즐기지 않는다. 고려대학교 교환 교수로 독일에서 생활할 때 와인 문화를 접한 뒤 한국으로 돌아와 취미로 맥주와 와인을 제조하기 시작했단다. 스스로 실험하면서 다양한 결과를 내보며 성취감을 느끼는 데 취미가 있다고 말한다. 조건을 달리할수록 와인 맛과 품질에 미세한 변화가 생기고, 해가 거듭될수록 그 맛이 훌륭하게 조율되는 것이 즐겁단다.
이 와인 과학자의 호기심은 갖은 우여곡절을 낳기도 했다. 한번은 포도 줄기에서 포도 알을 일일이 떼어내는 일이 번거로워서 줄기를 함께 넣고 발효시켰다. 그랬더니 떫고 풋내가 나서 1년치 포도주를 모두 버려야 했다. 한편 샴페인 만들기에 도전했을 때의 일이다. 첫 수제 샴페인을 맥주병에 담은 뒤 꽉 틀어막았다. 얼마 뒤 샴페인이 숙성되면서 탄산가스가 올라와 밀봉한 병을 깨트리며 터져 나왔다. 그 때문에 맥주병들이 진열된 창고에 한동안 들어가지 못했다.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수류탄과 다름없기 때문이었다. 박원목 씨는 “달콤한 술은 절대로 밀봉하거나 고온에 보관해서는 안 됩니다”라고 강조한다. 와인고에는 포도주뿐 아니라 머루주, 복분자주, 산수유주, 딸기주 등도 있다. 우리나라 과일은 맛과 영양이 뛰어나기에 장차 과일주 연구소를 만들어 우리 과일주를 해외에 널리 알리고자 한다. “술 제조법도 개발해야겠지만, 술이 건강에 미치는 영향도 함께 연구해야겠지요. 최근 제가 독일 연구원에게 의뢰한 결과 머루주의 항산화력이 아주 뛰어난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프랑스 정부의 홍보 덕에 레드 와인이 몸에 좋다는 것이 잘 알려졌듯 우리도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여야겠죠.”
1 별채에는 손님을 위한 야외 테이블과 작은 주방이 있다. 근데 웬 가마솥? 전날 찹쌀을 쪄서 소곡주를 담느라 사용한 것이다.
2 매년 담는 와인의 일부는 지인들에게 감사의 표시로 전한다. 평소에는 냉수에 와인을 약간 타서 마신다. 레몬을 띄운 물처럼 음식 맛을 돋운다.
3 “결혼한 뒤에도 함께 공부하다 지루하면 촛불 켜고 음악 들으며 차 한 잔 하곤 했어요. 남편은 참 ‘스위트한’ 양반이에요.”(아내) “시동생들의 사업이 힘들면 아내는 말없이 조카들의 교육비를 대줬지요. 아내는 속 깊은 여자예요.”(남편)
싸움은 왜 하나!
부부의 농장에서는 분업이 척척 이루어진다. 아내가 “여보, 이거 해줘요!”라고 외치면 남편이 와서 밭고랑을 만들어주고, 남편이 김을 매다가 잡초인지 모종인지 구별할 수 없을 때 아내가 한 수 일러준다. 그 밖에도 농장 돌보는 일 중에는 각기 장기가 따로 있어서 서로 잘하는 것을 독려해준다.
그래도 한농장에서 함께 일하는데 다투는 일은 없을까? “싸우면 제가 져요. 병법에서 지는 전쟁은 하지 말라고 했지요. 그래서 싸우지 않아요, 하하. 사실 늘 상부상조해요. 제가 무거운 것을 들면서 아내의 팔과 어깨가 되어주고, 아내는 불편해진 제 귀가 되어주지요. 가끔 의견 차이가 날 때도 있지만, 갈등으로 몰고 가서 싸우기에는 시간이 아깝지요.” 남편의 말에 아내가 답례한다. “젊을 때부터 툭하면 남편이 ‘나는 윤경은을 위해 태어났다’고 말했어요. 우스갯소리인 줄 알았는데, 어느 날 곰곰이 생각해보니 남편은 ‘언행일치’하며 살더군요. 그래서 나도 그에게 기분 좋은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고려대학교 대학원에서 만나 사랑을 쌓아온 이들은 세월이라는 거름을 더해가며 여태 그 사랑을 토닥토닥 다지며 산다. “남자건 여자건, 세상 모든 존재가 이 생에 태어나기란 기적 같은 일이에요. 제 아내도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가요. 혹 나를 만나서 소중한 생을 마음껏 펼쳐보지 못한다면 얼마나 슬픈 일인가요. 배우자가 가고자 하는 길을 자기 욕심대로 좌지우지하다 보니 갈등하는 것 같아요. 이왕이면 서로 하고 싶은 것 할 수 있게 격려하면서 살아야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