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안현 돋음볕 마을에 국화꽃 벽화가 제작되면서 미당 서정주의 시 ‘국화 옆에서’에 나오는 누님의 얼굴을 그려 넣기로 했다. 우여곡절 끝에 미모와 덕성을 갖춘 ‘대표 누님’으로 꼽힌 양옥순, 김순애 씨가 드디어 국화 옆에 섰다.
2, 3 돋음볕 마을의 담장은 이제 사시사철 향긋할 것이다.
“우리 집 담에 국화꽃이 피었구려”
전북 고창군 부안면에 소재한 안현 돋음볕(처음으로 솟아오르는 햇빛) 마을. 총 42가구의 주민 87명이 살고 있는 조그만 마을이 요즘 들썩이기 시작했다. 가가호호 담벽마다 국화꽃이 만개했기 때문이다. 생화가 아닌, 진짜 국화만큼 정겨운 국화꽃 벽화가 갓 모습을 드러냈다. 담장뿐 아니라 지붕에도 한두 송이씩 탐스럽게 피었다. 촉촉한 봉우리부터 흐드러진 황국화, 수줍은 들국화 등 국화꽃 얼굴은 집집마다 조금씩 다르다. 마을 전체를 굽이굽이 도는 벽화는 길이가 1000m에 이른다. ‘세계 국화꽃 박람회’라도 앞둔 것일까? 국화꽃 벽화가 시골 마을 구석구석을 돌아 긴 행렬을 이루는 것은 무슨 연유일까. “원래 가을철이면 마을 뒷산에 1백억 송이의 국화가 피어납니다. 미당 서정주 시인의 시 ‘국화 옆에서’ 아시죠? 이곳은 그의 생가와 시문학관이 있는 국화 마을입니다. 그런데 가을철뿐 아니라 사시사철 국화를 볼 수 있다면 참 좋겠지요. 국화 밭이 잠잠한 봄이나 여름에 이곳을 찾는 분들도 아쉽지 않을 테고요.” 안현 돋음볕 마을 국지호 이장의 설명이다. 행사를 치르기 위해 일시적으로 조성한 벽화가 아니라, 마을이 좀 더 즐거워지기 위해 가꾼 벽화라는 것이다.
소식을 듣고 이곳을 찾은 방문객들도 즐겁다. 시집이나 문학관을 벗어나 수수한 국화꽃 벽화에 더해진 미당의 시 ‘국화 옆에서’를 읽는 맛도 새롭다. 벽화를 등지고 촬영한 사진에는 색다른 전원 풍경이 담겨 있다.
‘국화꽃 닮은 누님’을 찾아라!
이처럼 거리로, 공공장소로 나온 작품들은 ‘공공 미술’이라고 일컬어진다. 공공 미술은 예술과 공공성이라는 개념이 결합한 장르다. “미술은 생활 속에 있어야 합니다. 일상 속에서 더욱 많은 사람들과 만나야 합니다.” 안현 돋음볕 마을의 프로젝트를 담당한 송주철 공공디자인 연구소의 송주철 소장의 말이다. 그는 이곳에 ‘녹색농촌체험마을 사업’을 제안하면서, 공공 미술을 핵심 요소로 구성했다.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지 못하면 어떤 시설이든 오래 남을 수 없습니다. 대부분의 농촌 개발 사업이 신식 건물 하나 세우기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데, 성공하지 못한 경우가 많습니다. 정작 이 건물을 활용할 사람들이 부족하다거나 여기서 어떤 프로그램을 진행해야 좋을지에 대한 계획이 없다면 건물은 금세 골칫덩어리로 방치되거든요.” 그래서 송주철 소장은 이 작은 시골 마을에 과감하게 공공 미술 작품을 제안했다. 아름다운 벽화를 보러 오는 방문객들이 늘어나면 특산물을 생산·판매하는 농가의 소득도 증대하고, 농촌 체험 프로그램도 활기를 띨 수 있다. 그래서 마을의 소박한 아름다움을 해치지 않으면서, 도시민에게 풋풋한 향기를 전할 수 있는 벽화를 구상했다.
1 국화꽃은 이제 시인의 원고지를 벗어나 동네 담장에서도 피어나기 시작했다. 1000m 벽화에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송주철 공공디자인 연구소 회원 7명이 6개월 동안 꼬박 매달렸다. 마을 주민들은 때때로 이들을 위한 소박한 새참을 마련해주었다.
2 국화꽃은 지붕을 타고 오르기도 했다.
3 미당 서정주의 ‘국화 옆에서’의 일부가 씌여진 담장.
“방문객은 둘째 치고 마을 주민들이 좋아하는 그림을 그려야 사람들의 관심과 애정 속에 벽화가 보존될 수 있겠지요. 주민들이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국화꽃을 소재로 택한 것도 그 때문입니다.” 송주철 소장은 마을 주민들로부터 의견을 수렴해 그것을 토대로 작업을 진행했다. ‘내 누님처럼 생긴 꽃이여’라는 시구를 표현하기 위해 누님의 초상화를 그릴 때도 마찬가지였다. ‘돋음볕 마을의 대표 누님’을 선정하기 위해 마을 회관에서 주민 87명이 모두 모여 투표했다. 경쟁 끝에 마을을 위해 궂은일도 마다하지 않았던 60대 누님 네 분이 뽑혔다. 이런 초상화 작업이 처음이었기 때문에 우여곡절도 많았다. 어떤 누님은 스케치에 앞서 사진을 촬영하는데 부끄러워서 얼굴을 들지 못했고, 어떤 누님은 막판에 “쑥스러워서 안 그리고 싶다”며 완강하게 거절했다. 이들을 겨우 설득한 뒤 한창 벽화를 진행하는데, 어느 날 이들로부터 ‘민원’이 들어왔다. “작품에 나온 금니가 보기 싫으니 빼주소”, “주름 좀 지워줘요”라고 말이다. 나중에 알고 보니 한 누님은 차마 낮에 나와 보지 못하고 캄캄한 밤에 손전등을 들고 나와 미완의 벽화를 찬찬히 비춰 보기도 했다고. 많은 사연을 남기며 벽화가 완성되자, 마을의 대표 누님들은 어깨가 으쓱 해졌다. 자식들이 고향에 찾아와 벽화를 보고는 무척 자랑스러워했기 때문이다.
공공장소에 유머 한 스푼, 즐거움은 무한대
사실 벽화를 그리기 전까지 마을 사람들은 반신반의했다. “벽화로 뭘 하겠소?”라는 회의적인 시각도 있었다. 그런데 막상 집집마다 벽화가 완성되고 나니, 마을에는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마을 외관이 화사해진 것도 이유이겠지만, 그보다도 마을이 이렇게 옷을 갈아입기까지 주민들이 의기투합해온 과정 덕분이기도 하다. 공공 미술은 젊은 사람들이 도시로 모두 떠나고 노인들만 남은 이 마을에 활력의 단초를 제공한 셈이다.공공 미술이 이처럼 지방 작은 마을에 시도된 것은 최근의 현상이다. 원래는 도시에서 먼저 시작되었다. 90년대 중반부터 홍익대학교 학생들이 자율적으로 학교 주변에 그린 벽화나 부산 비엔날레에 참가한 작가들이 거리에 세운 작품 같은 이정표가 한 예다. 서울시 도시 갤러리 추진단 박삼철 단장은 저서 <왜 공공미술인가?>에서 “공공 미술은 무표정하고 지루한 도시에 유머나 스펙터클을 만든다”라고 말한다. 서울 광화문 흥국생명빌딩 앞에 우뚝 선 보로프스키의 철제 조각 ‘망치질하는 사람’을 보아도 그렇다. 우선 21m 높이의 규모가 인상적이고, 심지어 망치를 든 손이 위아래로 서서히 움직이니 빙긋 웃음 짓게 만든다. 택시 기사 아저씨들은 이 건물의 이름은 몰라도 ‘망치질하는 사람 조각 앞’이라고 하면 알아들을 정도다. 미술을 시골 어느 정거장이나, 공장 담벼락 등 여기저기에서 조우할 수 있다면, 예술을 대하는 자세가 한층 편안해질 것이다. 송주철 소장은 “예술은 먼 곳이 아닌, 바로 일상 속에서 자주 만나야 어깨에 힘을 풀고 격의 없이 즐길 수 있다”고 강조한다. 한적한 안현 돋음볕 마을을 거닐며 담장 구경하는 맛에 반한 방문객들 중에는 구수하기로 유명한 이곳의 재래식 된장과 메주 맛에도 눈 뜬 이들이 많다. 그래서 요즘 각종 장류가 빠른 속도로 판매되고 있으며, 간장과 청국장은 지난해 겨울에 이미 동이 나버렸다. 동네 아낙들이 가마솥 20개를 모아 장작불 지펴가며 직접 만든 수제 장이니, 맛이 좋을 뿐 아니라 저렴하기 때문일 것이다. 안현 돋음볕 마을을 찾는 외부 손님들의 발길이 더욱 늘어나면, 올해는 가마솥을 작년보다 20개쯤 더 모아야 할지도 모른다.
* 안현 돋음볕 마을은 조그만 농가들로 이루어진 곳입니다. 아직까지는 마을 안에 펜션이나 근사한 음식점 등 상업 시설이 없지요. 그래서 대형 위락 시설에 익숙한 사람들은 이곳에 실망할지도 모릅니다. 대신 소박하고 정겨운 풍경을 그리워하던 이라면 반가움을 금치 못하겠지요. 벽화를 따라 걷다 보면 아담한 정자가 나오는데, 이곳에서 바라보는 ‘진짜 국화밭’ 전경도 장관이니, 놓치지 마세요. 제철을 맞은 농산물을 직접 수확해보는 체험 프로그램도 즐길 수 있습니다. 5월 25일부터 20일간 복분자와 오디 체험이 진행됩니다. 이곳 주민들은 다른 음료 대신 복분자 주스나 오디를 우유나 요구르트에 넣고 간 주스로 건강을 지킨다고 하네요. 시간이 여의치 않다면, 그날 거둔 싱싱한 특산물을 구입해 집에서 맛보는 것도 좋겠습니다. 문의 국지호 이장 019-319-1417
공공 미술을 통한 해비타트 운동 꿈꾸는 송주철 소장
‘송주철 공공디자인 연구소’를 운영하시는데, 공공 디자인은 공공 미술과 어떻게 다른가? 공동체를 건강하게 살린다는 취지에서 거의 비슷한 개념이다. 단, 공공 디자인은 아름답고 보기 좋게 가꾸는 일뿐 아니라 좀 더 구조적인 부분까지 기획하고 설계하는 일을 포함한다. 안현 돋음볕 마을의 경우에도 ‘녹색농촌체험마을’ 조성 사업을 기획해 마을 이름 짓기, 도로 정비 등 마을의 구조를 총체적으로 디자인했다.
공공 미술의 영역은 어디까지인가? 앞으로 점점 확대될 것이다. 그동안 기술자들이 도맡아 하던 일들에 디자이너가 먼저 기획하는 과정이 선행될 것이다. 가령 디자이너가 교통 표지판이나 도로 이정표를 만들면 좀 더 이해하기 쉬우면서도 유쾌한 작품이 나오게 된다. 그리고 공공 디자인의 영역이 확대되면 어느 마을에 가나 똑같은 마을 회관의 모습은 없어질 것이다.
앞으로의 계획은? 무주택 서민들을 위한 해비타트 운동을 하고 싶다. 한 가족을 위한 주택이 아닌, 마을 단위로 공동체를 디자인하고 싶다. 마을은 하드웨어(주택)만 만든다고 되는 일이 아니다. 그 마을을 존속하게 만드는 소프트웨어까지 염두에 두어야 한다. 이는 디자이너의 몫이다.
- 공공의 선 공공 미술 전북 고창 돋음별 마을의 1000m 국화꽃 벽화를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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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담장과 지붕에 멋진 벽화가 그려진다면 어떨까? 우리 집뿐 아니라 동네 전체에 우리 마을을 닮은 화사한 벽화가 입혀진다면? 미술이 일상 깊숙이 들어와 말벗이 되어준다면, 삶에 윤기가 더해질 것 같다. 다름 아닌 최근 눈에 띄는 공공 미술의 현장인 안현 돋음볕 마을에서 볼 수 있는 모습이었다. 전북 고창의 작은 마을인 이곳에 생화 못지 않게 활짝 핀 국화꽃 벽화 덕분에, 그리고 꽃보다 아름다운 사람들 덕분에 예술이 되었다.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07년 5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