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서재 앞 복도 공간. 돌, 종이, 나무, 왕골 등 자연 소재를 적극 활용한 내추럴한 공간은 특히 남편이 좋아한다.
2 왕골로 마감한 기둥 너머로 보이는 주방 공간. 서울 한복판 고층 아파트에 자연 소재를 적극 끌어들인 이 집은, 현대인의 라이프스타일에 맞도록 모던하게 디자인되면서도 그 안에서 다채로운 경험을 즐길 수 있도록 배려해놓았다.
서울 서초동의 주상복합 아파트. 이곳에 위치한 박혜연 씨 댁을 들어서자마자, 전혀 예상치 못한 풍경이 펼쳐진다. 전망 좋은 펜트하우스이지만 탁 트인 전경보다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벽면을 가득 채운 ‘마감재’들. 거친 질감이 살아 있는 돌과 은은한 한지, 풀내음 나는 왕골 등은 ‘별것’도 아니건만 시선을 고정시킨다. 한 가지 더 놀라운 점은 자연 소재로 무장했건만 어느 한 곳 마냥 소박하거나 부드럽게만 보이지 않는다.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게 구획된 면, 그리고 자연 소재와 함께 사용된 래커 도장, 노출 콘크리트 등 차가운 소재는 오히려 공간 전체를 남성적인 모던함으로 이끌고 있다. “체리목 몰딩이 싫어서 시작한 인테리어 공사가 이렇게 커졌어요. 지난해 10월 입주할 때 베란다를 확장했는데, 베란다와 거실의 경계가 되던 체리목 몰딩이 그대로 남아 있더라고요. 그걸 없애려고 거실 벽과 천장 공사를 시작했지요. 하다 보니 이왕 시작한 거 집 전체를 제대로 바꿔보자고 욕심을 냈지요.”
부부가 주문한 것은 크게 두 가지 사항. 먼저 자연적인 것을 좋아하는 남편과 모던한 스타일을 선호하는 아내의 취향에 맞춰 집을 내추럴과 모던, 두 가지 스타일로 연출해달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눈부신 형광등을 싫어하는 남편을 고려해 조명은 모두 간접 조명으로 설치하도록 특별 주문을 덧붙였다. 단순 명확한 요구 덕분에 공사는 착착 진행되었다. 집 전체는 군더더기 없이 미니멀한 디자인으로 만들되 거실과 주방, 서재는 종이, 돌, 왕골, 원목마루 등 내추럴한 소재로 마감하고, 바 공간과 부부 침실, 복도 등은 노출 콘크리트와 래커 도장, 대리석, 유리 등 모던한 소재로 연출했다.
내추럴한 공간과 모던한 공간은 이색적인 대조를 이루며 평등하게 공존한다. 특별 주문에 따라 설치한 간접 조명은 기대 이상 독창적으로 완성돼 이 집의 볼거리가 되었다. 조명은 모두 돌 벽면 사이나 천장 둘레를 따라 숨겼는데, 가장 돋보이는 조명은 한지로 마감한 거실 천장. 한옥 문짝을 붙여놓은 듯한 이 천장은 그 자체가 거대한 간접 조명이다. 공간에 은은한 빛을 뿌리며 부드러운 한지의 질감을 내비친다. 또 하나의 독특한 조명은 홈바에 있다. 반투명 유리로 바의 몸체와 기둥을 만들고 내부에 조명을 설치했는데, 마치 빛으로 된 기둥 같다. 흡사 라운지 바에 온 듯, 완벽한 모습을 갖춘 바는 와인을 즐기는 부부가 특별히 공을 들인 흔적이 역력하다.
3 악기가 세면대로 변신했다. 모던하게 연출된 손님용 화장실의 세면대는 징을 뒤집어놓고 배수구를 연결한 것.
4 빨간 턴테이블은 남편이 컬렉션한 오래된 LP 음악을 들을 때 사용한다. 음악을 좋아하는 남편은 마음을 평온하게 하는 데 좋다며 명상 음악도 즐겨 듣는데, 아내 박혜연 씨는 좋은 것은 모르겠고 그저 잠만 오더라며 웃는다.
의도했던 대로 집이 완성된 후 세 달. 역시 예상대로 남편은 내추럴한 공간을, 아내는 모던하게 완성된 공간을 더 좋아한다. 그러나 그 이상으로 마음에 드는 점은 한 집에서 이처럼 두 가지 스타일을 경험할 수 있다는 것. 손님들이 찾아오면 웅장한 자연석 벽과 은은한 빛을 발하는 종이 천장의 거실에서 편안하게 차를 마시며 수다를 떨고, 남편이 퇴근하면 간접 조명으로 밝힌 서재에서 못다 한 업무를 처리한다. 밤이 깊으면 모던한 와인 바에서 오붓하게 와인을 마시며 하루의 일과를 이야기하고, 스트레스를 많이 받은 날이라면 심플하고 단아한 침실에서 조용히 페퍼민트 오일로 아로마테라피에 빠진다. 서울 한복판에서 고즈넉한 한옥과 세련된 스파 살롱을 오가며 사는 맛이랄까.
5 빛을 이용해 이색적으로 완성한 바 공간. 이곳에서 부부는 함께 와인을 즐기며 일상을 나눈다.
6 복도 너머로 활발한 성격의 강아지 점상이의 보금자리가 엿보인다.
모던 공간과 내추럴 공간을 오가며 일상을 즐기는 건 이들 부부만이 아니다. 부부가 키우는 강아지 ‘점상이’도 마찬가지. 집안을 신나게 누비며 애교를 부리거나 장난에 몰두하는 점상이는 매끈하기 그지없는 대리석 바닥에 보란 듯이 뼈다귀, 뿅망치 등 자신의 발랄한 장난감들을 어지러이 늘어놓는다. 이 풍경이 묘한 웃음을 자아내는데, 점상이의 이름 뜻을 알게 되면 웃음은 더욱 커진다. ‘점상이’는 박혜연 씨 남편이 지어준 것으로, 금융업에 종사하는 그가 주식이 ‘점 상종가’를 치면 좋겠다는 바람을 담아 작명한 것이라고. 티끌 한 점 없고 시선을 방해하는 장식도 없이 깔끔하게 정돈된 공간, 사뭇 엄격해 보이기까지 하는 이 집의 주인들은 이처럼 자신의 강아지에게만은 의외로 푸근하고 정겹다. 그러고 보니 집안 공간 또한 모두 그렇게 반듯한 것만은 아니다. 매끈한 콘크리트 벽면의 여백에 와이어를 매달고 들쑥날쑥 제 멋대로 사진들을 장식한 코너가 바로 그렇다. 유머감각 넘치는 남편과의 행복한 일상이 담긴 사진은 공간에 따뜻한 표정을 더해준다.
거실 전면은 자연석으로 마감했다. 과감한 연출이 돋보이는 인테리어는 디자인 누(02-537-4143)에서 했다.
잠자기 전 명상 음악을 즐겨 듣는다는 부부의 취향답게 정적이고 심플한 집. 그러나 자칫 차가울 수 있었던 미니멀한 집은 의외의 웃음과 반전이 더해져 그 여백에 온기를 채운다. 한나절을 머물다 보니 이 집, 겉보기에는 남성적이고 모던한데 만져보니 속내는 부드럽고 소박하다. ‘외강내유’형의 믿음직스럽고 매력적인 보금자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