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병두 씨는 삼성전자, LG텔레콤 같은 첨단 전자 기업의 전시 부스를 디자인하는 일을 한다. 유비쿼터스 아파트 라이프를 구현해놓은 서울 일원동 삼성래미안의 유스타일U-style관도 그의 회사에서 디자인한 것이다. 공간 디자인 감각도 있어야 하고, 전시하는 제품과 내용에 대한 이해도 있어야 하며, 관람객에게 이를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커뮤니케이션 기술도 있어야 하는 것이 그의 일이다. 이 같은 첨단 미래 기술을 공공에게 소개하는 직업을 가진 그의 집은 강남구 청담동에 자리 잡은 60평형대 아파트. 과연, 직업에 어울리는 세련되고 트렌디한 주거 환경이다. 군더더기 없이 매끈한 모던 가구와 최신 기능의 디지털 용품 사이에서 분주한 일상을 보낼 집안 풍경이 자연스레 연상된다.
하지만 그에 대한 이런 선입견은 큰 착각이었다. 집안에 들어서면서부터 눈에 띄는 앤티크 가구가 심상치 않더니만, 둘러볼수록 의외로 부드러운 나무 질감이 느껴지는 편안하고 자연스러운 스타일. 게다가 이 남자가 열광하는 취미는 옛날 물건 모으기란다. 여기저기서 부스럭대며 그간 수집한 낡은 물건들을 꺼내는데, 이 방 저 방에서 자신의 ‘보물’을 꺼내는 품새가 신바람 난 소년 같다. 이렇게 늘어놓은 수집품들은 낡은 라디오, 칠이 벗겨진 망원경, 다이얼식 전화기 등. 무엇에 쓰려고 이것들을 모으는지 모르겠다며 그의 아내는 타박 아닌 타박을 하지만, 아내 역시 세월의 멋이 담긴 앤티크 가구를 좋아한다고 고백하니 역시 부부는 괜히 부부가 아닌 모양이다.
1 12월 크리스마스 시즌을 맞아 순록 모자를 쓴 뭉치가 강아지가 아닌 척하며 소파 위에 자리를 잡았다. 작년 겨울에 이 같은 차림을 하고 스키장 눈밭을 뛰어다닌 뭉치는 스키어들에게 최고의 인기를 끌었다고.
2 거실 창 밖으로는 푸른 녹음이 펼쳐진다.
3 황학동에서 구입한 전통 제주도 장. 판화는 북 디자이너인 아내의 작품. 주전자는 중국 베이징의 유명한 골동품 시장 인 ‘ 유리 창 ’ 에서, 불상은 여행길에 캄보디아에서 구입했다.
제주도 이층장과 영국 앤티크 의자 곽병두 씨 부부와 두 아이, 그리고 강아지 뭉치가 지난 6월부터 오순도순 살고 있는 이 아파트는, 그의 평소 생각과 바람을 담아 직접 인테리어를 구상하고 시공해 완성한 것이다. 그가 하는 일이 결국 공간을 디자인하고 만드는 것으로, 주택 인테리어와 크게 다르지 않기에 가능했던 일. 집안 전체는 가구와 마감재를 이용해 따뜻한 나무 질감을 살렸고, 각각의 공간에는 가족들이 좋아하는 물건들로 아늑하게 단장했다. 그래서인지 이 집은 억지로 꾸민 것 같지 않은 멋스러움과 가족 각각의 개성이 곳곳에 살아 숨쉰다.
현관을 지나 거실로 들어서면 여느 아파트와 달리 나무로 마감한 벽면이 시선을 끈다. 바닥이 아닌 벽면에 이처럼 과감하게 나무를 사용하는 것은 드문 경우다. “보통 아파트 어느 집에나 있는 차갑고 삭막한 시멘트 벽이 싫었습니다. 이 나무 벽면은 절에서 구한 오래된 나무를 가로로 켜켜이 잘라 마감한 거예요. 훨씬 자연스럽고 따뜻한 느낌이 들지요.” 고재古材로 마감한 거실 벽면에는 평면 PDP TV가 부착되어 있다. 조선시대 것이었을지도 모를 절간의 나무 기둥과 21세기 최첨단 평면 TV와의 만남이다. 그 옛날 저 기둥을 만들었던 대목大木은 과연 이 같은 미래를 짐작이나 했을까? TV 옆쪽으로는 황학동에서 구했다는 옛날 제주도 전통 장이 시선을 끈다. 오래 묵은 짙은 나뭇결이 초록 화분과 대비를 이루고, 주물 불상과 주전자 그리고 주전자를 꼭 닮은 작은 판화가 어우러져 보고만 있어도 기분이 좋다. 
1 곽병두 씨는 따뜻하고 자연스러운 나무 질감을 좋아한다. 안방 문 앞에 놓인 앤티크 의자는 영국 중고 가구 벼룩시장에서 구입한 것. 옛 교회에서 쓰던 예배용 의자로 앉는 부분을 위로 접으면 우아한 조각이 드러난다. 왼쪽으로 보이는 소를 타고 있는 소년 오브제는 베트남 여행의 기념품이다.
2 케냐 여행에서 구입한 말 조각상. 케냐는 곽병두 씨 가족 모두에게 잊을 수 없는 감동을 안겨주었다. 그 옆으로 보이는 것은 용돈 상자. 부부가 모두 집을 비우게 될 때 아이들이 간식을 사 먹을 수 있도록 이곳에 용돈을 넣어둔다.위에 걸린 작은 그림은 화가 고지영 씨의 작품.
3 프리랜스 북 디자이너로 활동하는 아내의 작업실 선반. 한때 깊이 빠졌었던 프리다 칼로의 초상이 선반에 놓여 있다. 그 위로는 최근 작업한 아내의 판화 작품이 걸려 있다.
4 곽병두 씨 부인 작업실에 있는 종이 보관용 수납장. 어느 외국 잡지에서 본 수납장 디자인이 너무 마음에 들어 남편에게 부탁해 그대로 본떠 제작한 것이다. 부인은 직업상 큰 사이즈의 종이를 사용할 일이 많은데, 각각의 서랍이 넓고 낮은 이 수납장은 최적의 보관 장소라고. 벽에 붙은 네 장의 그림은 부인의 판화 작품.
5 은은한 나무 패턴의 윌리엄 모리스 패브릭으로 커튼을 만들어 단 침실.
1 미술에 재능을 보이는 딸아이의 방. 이젤 위의 인물 스케치가 예사롭지 않다. 붓으로 그린 듯 자연스러운 느낌의 꽃무늬 벽지는 윌리엄 모리스 벽지.
2 초등학생인 아들은 아토피 피부염이 약간 있기 때문에 책상이며 블라인드, 책장 모두 화학 처리를 하지 않은 나무 소재로 장만했다. 책상 위에 놓인 부엉이 인형은 옥스퍼드 도서관에서 구입한 것으로 아들의 애장품 목록 1호다.
특히 이 판화는 북 디자이너이자, 최근 판화 배우는 재미에 푹 빠져 있는 아내의 첫 번째 작품이라고. 이외에도 집안 곳곳에는 현관에 놓인 의자부터 복도의 장, 안방의 책상까지 유럽 앤티크 가구들이 많다. 동서양의 가구 스타일을 오가며 만나는 오래된 나무 질감은 공간을 한층 아늑하고 편안하게 만든다. “공부를 하기 위해 2년 반 정도 가족이 함께 영국에서 지냈습니다. 우리나라에선 앤티크 가구를 고급 숍에서 잘 치장해놓고 판매하지만 유럽에서는 번잡스러운 중고 벼룩시장에서 온갖 가구와 낡은 잡동사니를 함께 쌓아놓고 팔지요. 그때 중고 가구 벼룩시장에서 건진 물건들이 지금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복잡하고 정신없는 시장에서 골랐다지만 디자이너의 뛰어난 안목으로 선별한 덕분인지 가구마다 마모된 흔적도, 희미해진 조각도 은은한 매력을 뿜어내며 기품 있다. 이탈리아에서 힘들게 들여온 주방의 노란색 나무 소재의 전원풍 부엌가구와도 따뜻하게 잘 어우러진다.
가구와 함께 영국에서 들여온 다양한 벽지 역시 이 집을 멋지게 장식하고 있다. 사실 이 벽지는 우연치 않은 기회에 발견한 것. 무심코 들어간 어떤 가게의 벽이 너무 예뻐서 대체 어떤 벽지를 바른 것이냐고 물어보았다. 그것은 19세기 말 미술공예 운동의 대표주자였던 윌리엄 모리스William Moris의 디자인을 복원한 벽지였던 것. 당장 그 길로 몇 롤을 구해 돌아왔고, 수공예적인 손맛과 우아함이 느껴지는 벽지는 현재 딸아이 방과 주방 벽을 장식하고 있다. 한국에 돌아온 뒤에도 윌리엄 모리스 패브릭을 구입해 안방 커튼을 만들었다. 초록 나뭇잎이 그려진 은은한 커튼 사이로 밤의 불빛이 비춰 들어올 때면 아름다운 숲 한가운데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그림과 판화, 여행지에서의 기억 담은 오브제 최근 곽병두 씨는 대형 그림을 한 점 샀다. 후배들의 졸업 전시 공간 디자인을 맡으면서 십 수년 만에 모교인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을 찾았는데, 그곳에서 마음에 꼭 드는 그림을 발견한 것. 학생의 작품인 까닭에 과하지 않은 가격으로 구매했는데, 자신의 안목이 잘 맞아떨어져서 언젠가 이 학생이 유명한 화가가 되어 그림값이 오를지도 모를 일이라며 기대 섞인 말을 한다. 남색 바탕에 붉은 꽃이 커다랗게 그려진 이 유화는 높이 2미터가량으로 이 집 그림들 중 가장 큰 사이즈. 부담스럽다면 부담스러울 수 있는 큰 그림을 침실 정면에 떡하니 걸어놓고, 자신들이 발견한 어린 작가가 잘되기를 바라는 모습에서 미술 애호가로서의 면모가 엿보인다. 이 그림 외에도 집안 곳곳에는 귀여운 오리를 담아낸 판화, 기하학적인 도형을 그린 추상화, 그의 아내가 직접 작업한 판화 등 근사한 작품들이 걸려 있다.
이 같은 집안 환경과 디자이너 부부의 유전자가 영향을 미친 덕분인지 중학생인 큰딸은 벌써부터 그림에 재능이 있는 편이다. 방에는 이젤과 미술 도구가 놓여 있는데 표정이나 주름이 섬세하게 드러난 인물 스케치를 보니 그 솜씨가 예사롭지 않다. 초등학생인 아들은 미술보다는 어지르는 데 일가견이 있다고. 촬영을 한 날은 평소답지 않게 아들 방이 깨끗한 상황이라는데 보통은 여러 가지 잡동사니가 뒤섞여 그야말로 정신이 없단다. 어지르기 좋아하고 덤벙대는 성격인 아들을 위해 곽병두 씨는 최근 자신이 쓰던 양복걸이를 물려주었다. 아침마다 교복을 찾다가 지각하지 않도록 아예 하교하자마자 문 앞 양복걸이에 교복을 벗어놓으라는 깊은 뜻이 담겨 있다. 아들은 덤벙대는 대신 사소한 것에 애착이 많고 예쁘고 아기자기한 것을 좋아하는 성격. 아들의 이런 성품은 엄마를 닮은 것이다. 그리고 딸은 아빠를 많이 닮았다. 그래서 이 4인 가족은 어딜 가도 어떤 상황에서도 둘씩 나뉘기 때문에 혼자 외로울 일이 없단다. 놀이기구를 타도, 메뉴를 선택해도 어떻게든 두 사람 이상은 함께하고 공감할 수 있다고.
이들은 앞으로 기회가 허락하는 한 여행을 많이 다니려고 한다. 이미 베트남, 캄보디아, 중국 등에 다녀왔는데, 그중 케냐를 잊을 수 없는 여행지로 꼽는다. 영국 생활을 정리할 무렵 이들은 한국으로 돌아가면 여간해선 걸음하기 힘든 아프리카를 여행하기로 만장일치했다. 아이들과 함께 경험한 케냐의 대자연은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초원 한가운데 움막집에서 며칠간을 보냈는데 황금빛 초원으로 지는 석양이나 별이 쏟아질 듯한 밤하늘도 놀라운 광경이었지만, 움막 안에서 잠을 자고 있으면 바로 옆에서 들리는 하마의 풀 씹는 소리가 그중 최고였다. 의외로 야행성인 하마는 낮에는 하품만 하고 있다가 밤이면 먹이를 찾아 돌아다닌다고. 그럴 때면 숨을 죽이고 하마가 지나가기를 조용히 기다렸다고 한다. 케냐에서 가져온 얼룩말과 기린 조각상을 보면 그때의 감동이 다시 떠오르곤 한다. 여행 때마다 함께 돌아온 소품은 그들의 집 여기저기에 놓여 있다. 이것들은 세상 곳곳에서 보고 느꼈던 풍경과 대자연의 속삭임을 상기시켜준다. 더 넓은 세상을 안다는 것, 그것이 여유를 만드는 것이 아닐까? ‘지금’ ‘여기’가 전부가 아니라는 마음. 그래서 현란한 도심 한복판에서도 이 집의 공기는 그토록 안정되고 편안했는가 보다.
1 디자이너 부부의 집답게 곳곳에 미술 작품이 걸려 있다. 오른쪽 소파는 곽병두 씨가 집에서 제일 좋아하는 자리. 등받이가 젖혀지는 이 소파에 드러누워 뭉치를 쓰다듬으며 TV 보는 것을 즐긴다.
2 아내가 가장 좋아하는 영국 앤티크 장과 의자. 가끔 손님들이 이 이 귀하고 약한 앤티크 의자를 높은 선반에 닿기 위한 발받침으로 사용해 애가 탄다고.
3따뜻함과 정겨움이 느껴지는 전원풍 부엌. 이 부엌가구는 이탈리아 산타로사Santarossa의 린다 시리즈. 국내에 잘 수입되지 않는 제품을 힘들게 들여온 것인데, 시공 과정에서도 우여곡절이 많았다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