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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기 짓는 외길 인생 35년, 우송 김대희 흙과 불에 순응하면 자연의 마음을 알게 된다
그는 도자기 만들고 굽는 것밖에 모른다. “그냥 도자기가 좋아서” 도자기 짓는 일을 선택하고부터 오로지 도자기만 생각하고 도자기만 만들었다. 젊은 날에는 치열한 만큼, 열정이 높은 만큼, 자신을 볶아대는 시간도 많았다 . 자신과의 처절한 싸움은 도예가가 되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무엇이든 곪으면 터지고, 다하면 사그라진다. 미쳐야 미칠 수 있다. 몸부림의 끝에서 그는 자신의 욕심과 마주하게 되었다. 욕심을 알고 욕심을 이해하자 욕심이 사라졌다. 비로소 ‘참 나 ’ 를 만났다 . 자연에 순응하는 자세가 무엇인지 깨우치게 되었다. 흙의 마음 따라 흙의 길을 열어주니 그것이 바로 자연의 삶이었다.
마지막 한 방울의 찻물이 진주알처럼 떨어지는 다관
우송又松 김대희 씨의 집은 경기도 이천군 용면리 국수봉 산자락에 있다. 자동차 한 대 지나기도 버거운 산길을 따라 올라가면 집이 없을 것 같은 산 중턱에 이르러 외딴집을 보게 된다. 여기가 산길 끝. 우송의 집은 깔끔하게 정돈된 정원과 담과 대문 없는 입구가 인상적이다. 우송의 작업실을 겸하고 있는 이 집은 지난해 완공되었다. 다섯 기의 장작 가마가 있는 ‘우송움막’, 작품을 전시하는 ‘도운방陶韻房’(그릇 소리가 나는 방), 작업실 ‘환니방換泥房’(흙이 바뀌는 방)이 갖추어져 있다. 

그의 이름을 아는 사람이 많지는 않다. 도자 일이 각광받는 직업이 아닐뿐더러 장인이 만든 도자기를 아는 사람이 많지 않은 까닭이다. 그러나 알 사람은 안다. 특히 차를 마시는 사람들에게 우송이 만든 다관茶罐은 말 그대로 일품으로 꼽힌다. 20여 년 전 완성한 우송의 다관은 물 끊김이 깔끔한 게 특징. 마지막 한 방울을 떨기 위해 다관을 흔들지 않아도 된다. 국회의원 이계진 씨는 2001년 우송의 도예생활 30년 만에 열린 한 번뿐인 전시를 축하하며 “우송의 ‘설백 다기’는 가히 미인이다. 외양의 품과 크기의 알맞음은 물론 높은 장인의 솜씨가 배어 있다. 한국적이면서도 완벽한 아름다운이 있다”는 글을 써주었. 고 김명성 롯데자이언츠 감독은 생전에 “우송은 도자기만 만드는 사람이 아니라 녹차를 공부하면서 마시고, 녹차를 제대로 아는 사람이 만드는 다관, 마지막 한 방울의 찻물이 마치 진주알 하나가 굴러 떨어지듯 ‘똑’ 떨어지도록 빚어내는 우송의 탁월한 제작기법은 가히 천하일품이라 칭찬해도 아깝지가 않다”고 말했다. 어떤 이는 해외 대학으로 떠나면서 우송의 다관부터 챙길 정도였으니 알 만하겠다.

우송은 명성을 듣고 찾아간 객을 다실로 안내한다. 그러고는 손수 발효시켜 만든 차를 내주는데 그 맛이 뛰어나다. 부드럽게 상대를 감싸는 것이 만든 이의 마음도 이러하지 않을까 여겨진다. 우송의 설명에 따르면 오래 전 우리 선조들은 잎차가 아니라 발효차를 마셨다고 한다. 우송은 선조들이 만들던 차제茶劑 방식을 따라 이 발효차를 만들었다.

우송이 도자 일에 대해 알게 된 것은 초등학생 때. 도자의 삶으로 뛰어든 것은 서울공고 도예과에 진학하면서부터다. 현장에서 일을 배우기 시작한 것이 고등학교 3학년이던 1968년이었고, 차 도구를 만들기 시작한 것은 1973년이었다. 그리고 1979년 본격적으로 다기를 만들기 시작해 다관 연구에 매진했던 그는 6년 뒤 결실을 맺는다.

“찻물이 깔끔하게 떨어지는 다관을 만든 것은 (팔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마시기 위해서였지요. 정성을 들이니 방법을 알게 됩디다. 직접 차를 마시면서 주전자 주둥이의 각도, 압력, 물이 떨어지는 속도 등을 살폈고, ‘이 정도면 되겠다’ 하는 생각이 드는 데서 수정하는 작업을 반복했습니다. 그렇게 했는데도 안 되면 오히려 그게 문제인 것이지요.”

말이 쉬워 6년이지, 중 . 고등학교의 재학 기간과 맞먹는 세월. 그래도 이 정도면 빨리 뜻을 이룬 축에 든다. 무엇을 새롭게 개발한다는 것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 그러기 위해서는 그에 관한 모든 것을 체득해야 하고, 알고 난 뒤에는 다시 그것들을 모두 버려야 한다. 창조란 그 위, 아무것도 없는 데서 시작된다. 우리 도자의 역사를 중국 것을 모방하던 관행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행보를 시작하던 고려시대부터 따진다면, 약 1천 년. 그러니 1천 년 역사를 아우른 뒤 버리고 다시 시작한다는 것은 여간 녹록한 일이 아니다.

“중국 도자기는 선이 너무 과장되었어요. 중국 도자기를 모방한 일본은 너무 움츠러들어 곱기만 하고요. 그러나 한국은 공백 처리가 자연스러워 도자기의 선이 살아 있죠. 생명력이 있어요. 중국에서 들여온 문화인데도 중국 도자기를 모방하지 않고 우리 것을 만들었다는 것, 정말 감사한 일입니다.” 우리 도자사를 살펴보면 흥미로운 이야기가 있다. 중국이 2천 년 동안 완성한 청자를 불과 1세기 만에 고려 전역에 산포해 있는 청자요에서 거의 같은 시기에 만들어낸 놀라운 사건이 그것이다. 현대 한국이 이루어낸 급속한 발전과 성장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남들이 알아주지 않는다고 불평했던 젊은 시절
우송의 스승은 물레질이 뛰어나 1960~70년대 ‘이천의 삼총사’ 중 한 사람으로 꼽혔던 고영재 선생이다. 고교 졸업반 때 실습 나갔던 여주 실습지에서 고영재 선생을 만났던 그는 스승의 부름을 받아 이천에서 도요 생활을 했다.

그러나 스승은 그에게 가르쳐주는 것이 별로 없었다. 그저 “도자기 하는 집에 가서 밥 달라 하면 밥 한 상 얻어먹을 수 있지만 흙 한 줌 달라 하면 안 준다”는 말뿐. 그만큼 흙을 귀하게 여기라는 말씀이었다. 그는 지금까지도흙 한 줌도 버리지 않으며, 수비水飛(흙을 물속에 넣고 휘저어 잡물을 없애는 일) 작업을 반복해가며 마지막 한 톨까지 쓴다.

수련 생활은 길고 혹독했다. 며느리살이 같았다. 첫 3년 동안은 수비 생활을 했다. 다음 3년간 흙 밟는 일을 했고, 다음 3년 동안에는 흙을 밀었다. 그런 다음에 성형成形을 배울 수 있었다. “아주 고루한 방법처럼 보일지 몰라도 이 수련 방식이 가장 과학적입니다. 이렇게 수련하면 손 감촉, 발 감촉으로 흙을 느끼게 됩니다. 흙을 온몸으로 알게 되는 거죠. 머리로 아는 건 아주 얕은 지식입니다. 가슴과 몸으로 느껴야 흙에 대해 알게 됩니다. 이 또한 흙을 접한 자신의 경험과 노하우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이지요.”

주춧돌 놓는 데만 10년 걸리는 것이 도자 일이다. 수련자로 10년쯤 지내면 하고 싶은 것을 ‘대충’ 할 수 있는 수준에 이른다. 그러나 그를 찾는 요즘 젊은이들은 대개 10년을 채우지 못하고 떠난다.

“흙을 처음 배울 때, 조금 나아지면 까불게 돼요. ‘나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기고 작업 내용에서도 질적인 변화가 일어납니다. 하지만 흙과 불과 유약이 내 맘대로 안 되니, 아주 좌절하게 되지요. 그러나 이 좌절을 겸허하게 받아들이면 다시 초발심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불火과 유약, 흙을 강제로 이끌 수 없다는 걸 알게 되지요. 그러면 자연에 순응하게 되고, 자연에 순응하면 자연을 거스르려 하거나 정복하려 하지 않아요. 자연과 더불어 같이 살아간다 생각하니 오히려 작업이 편해집니다.”

우송의 1년 작업량은 1천 점에서 1천2백여 점. 잔을 많이 만들기 때문에 숫자가 많다. 가마는 주로 가을에 한 번 땐다. 예전에는 봄가을에 땠지만 기후가 변화하면서 봄에는 잘 때지 않게 되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항아리를 많이 만들었지만 요즘에는 아무래도 다기류가 많다. 자기, 분청, 청자를 모두 작업한다. 다만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도자기는 백자다. 밝고 깨끗하고 순결하기 때문이다. 고요함조차 없는 순백의 아름다움을 좋아한다. 그리고 모든 흙을 존중한다. 우송에게 안 좋은 흙이란 없다. 다 나름대로 쓸모가 있다 여기고, 그 또한 흙과 한 몸이 되어 까만 놈(흙)은 까맣게, 하얀 놈(흙)은 하얗게 만든다. 흙과 한 몸이 되면 이 흙으로 무얼 만들어야 할지 알게 된다. 지금은 흙의 본성을 살리기 위해 가급적 흙을 섞지 않는다. 많아야 한두 가지 섞는 것이 고작이다. 그러나 실험적이고 추상적인 작업을 추구하던 젊은 시절에는 15~16가지의 흙을 섞은 적도 있다. 안료는 철화만 쓴다. 가마에 불을 지피는 장작으로는 우리나라 토종 소나무인 적송을 쓴다. 불을 알면 나무를 많이 쓰지 않고도 온도를 올릴 수 있으므로, 나무 사용량이 많지는 않다.

“못 나온 놈도 존재 가치가 있잖아요. 물도 담지 못한다면 깨뜨리지만 간장 종지로도 쓸 수 있다면 존재 가치가 있는 것이죠. 깨뜨려버리는 것이 능사는 아니거든요. 또 깨지는 놈은 얼마나 아프겠어요.”

흙의 마음부터 도자기의 마음까지, 우송이 작업의 전 과정을 섬세하게 헤아릴 수 있게 된 것은 젊은 날의 시련 덕분이다. 1980년 초부터 3년간 우송은 서울 창경궁 근처에 자리를 잡고 매일 가마에 불을 땔 정도로 맹렬하게 일했다. 이때 그는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 세상이 한스러워 어느 공모전에 응모하려고 했단다. 그러나 두 달간 작업해 응모작을 완성한 뒤 그는 생각을 바꾸었다. ‘공모전에서 1등을 하면 뭘 하나? 내가 내 자신을 알아주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닌가?’ 하는 마음 때문이었다. 공모전에 응모하려던 자신의 생각 자체를 근본적으로 회의하고 반성했다. 이 과정을 통해 그는 도예 작업은 남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좋아서 하는 일’임을 자각했다. 그러고 나니 공모전에 대한 미련이 사라졌다. 응모작을 깨뜨리고 이천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자신의 호를 붙인 도자기 가마 ‘우송움막’을 만들었다.

“그 즈음에는 밤마다 밖으로 나갔어요. 아내가 귀신 애인 뒀냐고 할 정도였지요. 밤거리를 다니며 생각하다 보니 ‘내가 뭐하는 짓이냐, 여태까지 좋아서 했는데 왜 도자기 때문에 힘들어야 하는가? 첫 시작은 내가 한 것 아니냐, 그런데 남들이 알아주지 않는다고 남에게 책임을 돌렸구나’ 하는 걸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러고 나니 작업이 편해졌어요.”

도자기 작업은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가 원해서 하는 작업임을 알고 나니 사회 불만이나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 도자기 애호가들에 대한 불만이 일거에 사라졌다. 불만이 사라지니 그전에는 볼 수 없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불이 타는 소리, 불의 냄새와 색깔, 장작의 경중…. 이 모든 것들이 오감으로 느껴지게 되었다. 이때부터는 무언가를 애써 알려고 하지 않아도 저절로 알게 되고, 저절로 보이게 되어 즐겁게 작업할 수 있었다고 하니, 신바람의 경지를 느꼈던 것 같다.

“한 15~20년 전인가? 어느 날 가마 문을 여는데, 순간 희열 같은 기쁨을 느꼈어요.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데, 흙이라는 것 자체가 갑자기 나에게 다가와서 확 닿는 느낌을 받았죠. 흙에게 있는 어떤 고유한 흐름이 느껴졌어요. 그날 하루는 무지개를 밟고 다니는 것 같았죠. 정말 온 세상이 금빛으로 휘황찬란했어요. 그때부터 흙 자체를 읽어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전까지는 실험을 무지하게 많이 했지만 그다음부터는 실험을 많이 하지 않았어요.” 이러니 우송이 이야기하는 ‘까만 놈은 까맣게, 하얀 놈은 하얗게’라는 작업 명제가 가벼이 여겨지지 않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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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자 철화 물항아리. 백자는 흙이 꽤 부드럽고, 아무 무늬 없는 흰색이라 기물의 형태나 선이 금방 도드라지기 때문에 성형하기가 어렵다. 2 덤벙분청(기물을 백토물에 푹 담가 분장한 후 투명유를 입히는 기법) 다완. 3 백분청 철화 ‘ 매화무늬梅花紋 다 관 ’ . 4 철분이 많은 태토에 철유를 두텁게 발라 굽 주변과 바닥에 매화 껍질 같은 유약 말림 현상이 있는 이라보伊羅保 다완. 5 분청 철화 넝쿨무늬唐草汶 귀얄병. 모두 2005년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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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도자기가 좋아서 도예가의 길을 선택한 것이 중학교 3학년 때. 서울공고 요업과로 진로를 선택하면서 그의 인생 길은 정해졌다. 2 5기의 가마가 연속되어 이어지는 우송도예의 가마. 그는 늘 새로운 작업에 도전하는데 올해에는 달항아리와 같은 큰 도자기들을 제법 만들었다. 나중에 큰딸 김현진 씨에게 들어보니 좋은 결실을 얻었다고 한다. 3 안료로 포도를 그리는 우송. 그는 철화 안료만 쓴다. 그는 글씨 . 그림 . 전각 장인인 여송 이승만 씨를 사사했다. 그의 집에 걸린 현판들은 모두 여송의 글씨다. 4 다관의 몸통을 성형하는 우송. 그의 다관은 물떨굼이 좋아 차 애호가들 사이에 인기가 높다. 백자, 청자, 분청 가운데 성형이 가장 까다로운 것은 1200℃ 이상의 고온에서 굽는 백자. 분청은 성형이 쉬운 편이고 또 여러 가지 흙을 개성 있게 조합하여 다양하게 표현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상감기법을 사용하는 청자는 빛깔 내기가 어렵다. 5 주경야독으로 일을 배우고 있는 큰딸 김현진 씨의 수련 생활도 6년이 되었다.

전부를 잘 만들려고 하지 말라, 하나만 잘 만들면 된다
대개 우송요를 방문하면 어여쁜 여인 두 명의 인사를 받게 된다. 한 여인은 우송의 부인 김정옥 씨요, 다른 여인은 우송의 큰딸 김현진 씨이다. 지금의 우송이 있기까지 따뜻하게 내조해온 김정옥 씨는 남편이 만든 도자기를 판매하는 역할을 한다. 객에게 따뜻한 밥 한 끼를 지어 내오는 신속한 몸놀림에서 대단한 경력이 느껴진다. 대학에서 동양미술을 전공한 김현진 씨는 부친의 뒤를 이으려 수련 생활을 하고 있다. 대학원에서 예술경영학을 공부하고 있는 김현진 씨의 주경야독 생활이 6년째이건만 스승은 제자의 작업에 대해 가타부타 말이 없다. 스승은 절대로 가르쳐주지 않는다. 객이 수련생의 싹수에 대해 묻자 “아직 멀었다”고만 짧게 말한다.

“작가는 무엇인가요?”

“작가? 그 개념이 뭔지 모르지만(웃음) 작가라는 개념을 잊어야 되는 것 아닙니까? 그래야 뭔가를 하지, ‘나는 작가다’ 라고 생각을 하면 작가라는 것에 자신을 가두게 되겠지요. 저는 그런 생각 없습니다.”

“도자를 만들면서 ‘됐다’ 하고 멈추는 때는 언제인가요?”

“요새는 욕심을 안 부려요. 전에는 욕심을 부렸고, 내가 하고자 하는 것에 대한 집착이 굉장히 강했어요.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강제로 하지 말자, 작위를 하지 말자, 마음 흘러가는 대로 작업을 하자’는 마음으로 작업하게 되더군요. 어떤 목적의식을 갖고 사는 것도 좋지만, 그렇게 되면 항상 어떠한 저항을 받게 되어 있어요. 무엇이든지.” “요즘에는 실험을 많이 안 한다고 하셨는데?”

“예전엔 밀리그램까지 다 재면서 작업했어요. 그렇게 해봤기 때문에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을 지금에 와서 느끼는 것이겠죠. 치열하게 실험한 노하우가 나도 모르는 사이 몸에 배게 된 것이니까 어떻게 설명할 수도 없어요.” “좌우명이나 작업관은 무엇인가요?”

“있을 수가 없죠. 내가 좋아서 하는 작업에 무슨 이유를 붙이겠습니까. 그때그때 계획이야 세웁니다만 물레에 앉아 머릿속으로 그려지는 것을 만들어요. 하지만 모두 잘 되는 것은 아닙니다. 잘 안 만들어지는 날은 징그럽게도 하루가 안 가요. 그럴 때에는 여행을 간다든지, 산책을 한다든지, 책을 본다든지, 음악을 듣는다든지 하지요. 그런데 그게 책 보고 음악 듣는 게 아니에요. 책을 봐도 책장이 안 넘어가니까.(웃음)”

“만약 우송요의 대가 이어지지 않는다면…?”

“할 수 없죠. 그것에 대한 것도 별로 개의치 않아요. 어차피 내가 좋아서 시작한 것이니까. 대를 잇겠다고 되지도 않게 대를 잇게 하면 본인도 힘들어요. 그것은 강요해서 되는 일이 아니에요.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듯 조건 없이 좋아해서 시작해야 해요. 그래야 작업에 집중할 수 있거든요.”

“행복은 뭔가요?”

“지금 처해 있는 상태에서, 지금 처해 있는 일을 하는 것이겠지요.”

인터뷰를 끝내면서 우송은 어떤 사람이 자신에게 어떻게 하면 작품들을 다 똑같이 잘 만들 수 있는지를 묻기에 “다 잘 만들려고 하지 말고 하나만 잘 만들려 하면 된다”고 답했다는 일화를 들려주었다. 자의적으로 해석하면 젊은 날의 그는 모든 도자기를 잘 만들려 애썼을 것이고, 지금의 그는 잔 하나라도 그것 하나 잘 만드는 데 집중할 것이다. 그때의 그는 아마추어였고, 지금의 그는 프로. 우송은 아무리 욕심 부린다 한들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한 가지뿐이고, 아무리 뛰어난 도예가라 한들 이 순간 작업할 수 있는 도자기도 하나뿐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가 ‘하나만 잘 만들면 된다’고 강조하는 것도 그 하나하나들이 모여 전부全部를 이루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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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근감을 주는 분청은 예술적 가치가 청자나 백자에 비해 떨어진다. 하지만 청자의 극도의 절제미, 백자의 완벽한 단아함과는 다른 자유로운 맛이 매력적이다. 분청 물고기무늬漁紋 항아리. 2 상감기법을 이용해 만든 청 자 ‘ 목단무늬牧丹紋 물항아 리 ’ . 3 유약을 바르지 않고 약황토 흙인 상태로, 1200℃ 이상의 온도에서 구운 무유無釉 참외 다관. 4 분청 꽃무늬印花紋 물항아리. 5 분청 흑유黑釉 각화병. 모두 2005년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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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년 동안 작업한 작품들을 모아놓은 보관실. 대작들이 많다. 조만간에 완성될 그릇들을 바라보는 모습이 마치 자식들 바라보는 것 같다. 고등학교 재학시절부터 따지자면 도예 경력 37년. 한눈팔지 않고 살아온 그 긴 시간에 대한 그의 소회는 단순하고 소박하다. “뜻을 세운 뒤 지금까지 그 뜻을 버리지 않고 왔다는 성취감이 있어요. 지금까지 온 나 자신에게 고맙지요.” 2 우송은 손님들에게 자신이 직접 만든 다구와 발효시켜 만든 발효차를 대접한다. 그의 작업실 옆에는 잠깐씩 쉴 수 있는 작은 방이 하나 있고, 그 방에는 큰 오디오 기기가 있다. 음악을 좋아하는 그를 위해 스님이 주었다고 한다. 그가 좋아하는 음악은 드보르자크의 ‘신세계 교향곡’. 그의 백자와 느낌이 퍽 비슷한 음악이다. 3 가지런하게 놓인 채 가마에 들어갈 날을 기다리고 있는 찻잔들. 4 집 뒤 텃밭에서 키운 고추. 5 가을 김장용으로 심은 조선 배추 1백 포기를 심은 텃밭에서 배추 벌레를 잡고 있는 두 부부. 발효시킨 퇴비로 키운 청정배추다.

김선래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06년 11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