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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륜산 일지암 여연 스님 차'를 한다는 건 마음을 나누는 것
첫째 잔은 입술과 목을 적셔주고, 둘째 잔은 고민을 씻어주고, 셋째 잔은 무뎌진 붓끝이 풀리게 하고, 넷째 잔은 가벼운 땀을 솟아나게 하고, 다섯째 잔은 살과 뼈를 맑게 하고, 여섯째 잔은 신선의 영과 통하게 하고, 일곱째 잔은 두 겨드랑이에 맑은 바람을 일으킨다. 크고 작은 차인들의 모임이 수천 곳에 이르고, 차도茶道를 배우려는 사람도 늘고 있다. 차는 이제 하나의 문화 코드다. 이 디지털 시대에 차는 과연 무슨 의미일까. 한평생 차에 매료돼 살아온 여연스님과 차를 나누었다.

가을 초입에 찾은 두륜산은 이제 서서히 생장판을 닫고 물을 내릴 준비를 하는 듯하다. 대흥사 일주문에서 걸어서 30분 정도 산길을 오르니, 제멋대로 아무 곳에나 둥지를 틀지 않는다는 배롱나무만이 붉은 꽃을 피워 아름다운 자태를 드러내고 있었다. 조용한 산사의 앞마당이나 이름난 정자의 뒤뜰 같은 길한 곳에 한번 뿌리를 내리면 석 달 열흘 동안 꽃이 핀다 하여 백일홍이라고도 불리는 나무다. 곧이어 자우홍련사 누각 뒤로 소박하면서도 반듯한 암자가 보인다. 기와가 아닌 볏짚을 이고 있는 암자 일지암一枝庵. 조선시대 말 초의草衣선사가 직접 짓고 40여 년 동안 머물렀던 차茶의 성지聖地다. 초의는 다산 정약용의 제자가 되어 시를 익히고, 추사 김정희와 다우茶友가 되어 명맥이 끊겨가던 우리 차를 중흥시켰던 인물로 ‘다성茶聖’으로 불린다. 초의선사가 차를 달여 부처님 전에 올리면서 존재의 근원을 사유했던 일지암에는 이제 여연스님이 남아 차인의 삶을 엮어가고 있다.

여연스님이 기거하는 자우홍련사 대청마루와 손님이 머무는 별채에는 늘 정갈하게 다구가 준비되어 있다. 멀리서 온 객을 맞으며 스님이 방 한편에 놓인 작은 항아리에서 바가지로 물을 퍼 전기주전자에 붓고 버튼을 누르니, 잠시 후 펄펄 물 끓는 소리가 난다. 그러고는 자신은 바깥으로 물러나고 객을 찻상 가운데자리에 앉히며 대뜸 “차 한잔 해야지? 거기 차 좀 넣고 만들어봐요” 하신다. 이 얼마나 당황스러운 일인가. 차의 고수에게 한 수 배우러 왔다가 차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듣지 못한 채 벼락같은 시험을 먼저 치르게 생겼으니 말이다. “네? 제가요?”라는 반문에 “그래. 편하게 한번 해봐요”라 하신다. 언젠가 차 애호가와 차를 마시던 기억을 더듬거리며, 책이나 텔레비전에서 주워들었던 내용들을 떠올리며 긴장된 손길로 차 끓이기를 시작했다. 먼저 주전자의 물을 물식힘그릇인 숙우에 부어 식혔다. 차시로 찻잎을 떠서 다관(주전자 모양의 차우림그릇)에 담고 식힌 물을 부었다. 몇 분 후 우려낸 차를 다시 숙우에 옮겨 담고, 숙우에 담긴 차를 각 찻잔에 채워 함께한 사람들에게 맛보게 했다. 과정마다 적절한 양이며, 시간, 도구들을 스님께 재차 확인하면서 차를 우려냈다. 차를 함께 나누다 보니 자연스럽게 이야기들이 오갔다. “차는 이런 거야. 거기 그렇게 앉아 있으니 꼭 차인 같네” 하며 웃으신다. 내게도 차가 한뼘쯤 가까워진 듯하다. 

차가 아름다운 이유 여연스님과 차의 인연은 35년이 가까워진다. 초의선사와 차가 마치 ‘벼락 치듯’ 다가왔다고 회상한다. 차생활의 첫경험은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일이었다. 행자 시절, 절 살림살이의 총책임을 맡은 원주스님이 초겨울 추위에 심한 감기 몸살에 걸렸다. 산중에서 약을 사러 나갈 수도 없어 걱정하고 있던 그에게 한 채공보살이 귀띔하기를 “여름 공부철에 보니까 스님들이 감기에 걸렸을 때 찬장에 있는 무슨 풀을 달여 마셔 몸이 낫는 것을 봤다”는 거였다. 그는 칭찬받을 양으로 통에 들어 있던 풀잎을 약탕기에 다 쏟아넣고 정성껏 달여 원주스님께 갖다드렸는데, 오히려 호통을 치시며 불같이 화를 내셨다. 그 풀잎은 다름 아닌 원주스님이 큰스님 드리려고 귀하게 아껴 깊숙이 보관해온 작설차였기 때문이다. 이처럼 부끄러움과 민망함 속에 시작된 차와의 인연은 또 한번의 반전의 기회가 있었다. 새해 첫날 해인사에서 수좌스님께 세배 드리고 얻어 마신 차에 대한 기억이다. 그 겨울에 맛보았던 차의 맛과 향은 그 생애 최고의 차였다. 


1 일지암을 찾은 손님이 묵어가는 조그만 별채에 차려진 찻상. 좌탁 위엔 언제든 차를 마실 수 있도록 다기가 갖춰져 있다. 오늘 만남에는 어떤 찻잔이 어울릴까. 색도 모양새도 제각각인 찻잔들이 조그만 방 한편을 차지하고 있다.
2 찻잎은 구름과 비가 뒤섞여 내리는 골짜기에서 나는 것이 가장 좋다. 올봄 일지암 야생 차나무에서 얻은 찻잎들을 고르고 덖고 말려서 여연스님이 손수 만든 차. 찻잎이 가늘고 말려진 상태가 균일하고 고유한 형태를 잘 유지하며 색과 윤기가 균일한 것, 신선한 것이 좋은 차다.
3 차는 우려냈을 때 봄날 갓 돋아난 여린 잎에서 볼 수 있는 맑은 비취색을 띠어야 상품이다. ‘찻물’에 길들여져 찻잔 속에 스며든 차색이 아름답다.
4 차맛의 절반은 물맛이라는 말이 있다. 차는 물에 우려내는 것이므로 물의 등급에 따라 차맛과 효능이 천차만별이다. 일지암은 예로부터 물 좋기로 유명한 곳. 별채 앞 장독대 옆으로 떨어지는 이 물로 스님은 차도 끓이고 밥도 짓는다.
5 주변 야생 차나무. 이즈음 차나무는 온몸의 물을 내리고 경화하여 겨울 날 준비를 시작한다. 그리고 내년 춘분 즈음, 봄비가 내리고 나면 다시 물이 오른다. 그러면 하얀 꽃을 피우며 겨울 삭풍을 견뎌낸 찻잎들 속으로 연녹색 새잎이 고개를 내밀 것이다.

“하얀 살진 백자 찻잔은 쪽빛 난꽃이 그려진 것이었다. 김이 무럭무럭 나는 찻잔을 보니 난꽃 향기가 진동하는 것 같았다. 비취색 찻빛은 예쁜 소녀의 눈물처럼 그렁거렸다. 나를 진땀 배게 했던 작설차가 분명한데 그 차가 이번에는 나를 황홀한 세상,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감각, 묘미 깊은 현현함 속으로 빠지게 하는 것이었다. 푸른 빛깔과 난꽃 향의 은은함 그리고 유년 시절 산 동산에 올라 먹던 삐비 속에 들어 있던 보드레한 달콤함으로 나를 취하게 하는 이것이 정말 차라는 물질이란 말인가.”   -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 차> 중에서


이처럼 좋은 차는 참된 향, 참된 맛, 참된 빛깔을 동시에 품고 있어야 한다. 좋은 차의 향기는 겉과 속이 한결같은 순향, 너무 설지도 너무 익지도 않은 청향, 불김이 고르게 머문 난향, 곡우전에 신묘한 기운을 갖춘 진향이 제대로 담겨 있어야 한다. 초의스님은 좋은 차의 색깔로 “맑고 푸른 것이 뛰어나고, 물결은 남백색이 아름다우며, 누렇거나 검거나 붉고 어두운 것은 품수에 들지 못한다”고 하였다. 또 차맛은 달고 부드러워야 한다.

끽다거와 다반사 차인의 인구가 5백만에 달하고 차에 대한 관심이 증폭되는 요즘, 차는 이제 하나의 문화 코드로 자리 잡았다. 대학에는 다도학과가 생겼고, 차를 공부하려는 사람들도 많이 늘었다. 그런데도 차를 잘 모르고 별로 접해보지 않는 보통 사람들의 눈에는, 차는 격식과 형식이 중요하고 까다로운 듯해 왠지 가까이 하기엔 어려운 게 사실이다. 하지만 여연스님은, 흔히 일상에서 접할 수 있는 ‘끽다거喫茶去(차나 한잔 하게)’에 차 한잔의 도리가 있다고 여긴다.

“우리도 요즘 들어 차가 하나의 문화가 되었지요. 한데 문화 허영꾼들이 까탈을 부려. ‘다반사’라는 말이 ‘차 마시고 밥 먹고’라는 의미예요. 우리 조상들은 밥 먹듯이 흔히 있는 일처럼 차를 마셨다는 얘깁니다. 차를 차실茶室의 차로 머물게 하면 안 됩니다. 차가 차인들만의 전유물이 되면 안 된다고…. 차는 반드시 생활 속에서 일상의 차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밥 먹을 때도 친구끼리 가족끼리 있으면 편하게 먹다가도, 사돈이나 선생님 같은 어려운 손님이 집에 오시면 음식에도 지단이나 실고추 같은 걸로 고명도 얹고 숨겨놓은 그릇도 내면서 접빈하잖아요? 정성을 표하는 거지요. 차도 마찬가집니다. 매번 무대에 나가는 것처럼 예를 갖출 수는 없잖습니까? 그런데 요즘 차인들은 그걸 착각한다고요. 차에 대해 공부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지만 그게 전부면 안 됩니다. 이왕 마시는 거 알고 마시면 다르니까 공부해서 길라잡이를 갖고 마시자는 의미지요. 더 맛있게, 더 가치 있도록요.”

우리가 흔히 일상에서 접할 수 있는 ‘끽다거’에 담긴 차 한잔의 의미는 중국 조주스님으로부터 설파됐다고 한다. 당대 최고의 선승이었던 조주스님에게 깨달음을 얻으러 많은 사람이 찾아왔다. 그럴 때마다 스님은 미소지으며 “그래, 끽다거, 차나 한잔 하고 가게나” 하고 일갈했다. 진정한 불법의 대의를 묻는 것은 이미 불법에 집착하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진정한 깨침은 번뇌와 집착을 여읜 해탈심에 있다. 그것은 어떤 상황에서도 항상 행복하고 즐거울 수 있어야 하는 평상심에서 나온다. 조주스님은 이것저것에 치우치지 않는 평상심을 가장 편안하고 즐겁게 마시는 차 한잔에 비유한 것이다.

1 초가을의 일지암 자우홍련사는 붉은 배롱나무꽃이 지천이다. 처마 밑에 서면 두륜산 줄기 아래로 서해바다가 한눈에 들어온다.
2 ‘일지암’을 소재로 한 작품. 작가 정찬주가 쓴 <암자로 가는 길>에 등장한 일지암을 보고 중견화가 박주아가 그린 것을 지인으로부터 선물 받은 것. 일지암과 차나무, 찻잔이 소담하다.
3 여연스님은 불교잡지 <해인> 편집주간, <불교신문> 논설위원과 주간을 지냈을 정도로 소문난 달필이다. 얼마 전에는 우리 차에 관한 책도 냈다. 글은 원고지에 만년필로 써야 제맛이라는 스님의 좌탁 위엔 바늘 가는 데 실 가듯 역시 찻잔이 놓여 있다.
4 일지암에서 차와 함께 40여 년을 머물렀던 초의선사의 초상화. 차 한 잔에도 존재의 근원을 사유했던 그야말로 오늘날 쉽게 얘기하는 다도일미茶道一味, 선다일여禪茶一如의 삶을 자연 속에서 즐기며 사셨다.
5 깊은 산사에서 진공관 앰프를 타고 퍼져나오는 콘트라베이스의 울림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여연스님은 음악과 오디오에 대해서도 전문가 수준이다. 스님의 이런 감성을 잘 아는 사람들이 선물한 CD가 벽장을 꽉 메우고 있다. 타인에게 나누어준 CD는 이보다 몇 배 더 많다. 신기하게도 나누어주면 그만큼 누군가가 반드시 채워준다.

오후 지친 시간, 쓴 한 사발 차 어렴풋이, 한 가닥 밝음을 볼 수 있다. 소년 때부터 가난했던 마음, 이제 즐거움이, 즐거움이 될 수 없는 나이, 해질녘 긴 그림자,  어쩌다 마음껏 차 달여 마신 날이면, 저녁도 새벽처럼, 맑은 가슴을 가질 수 있다. - 서귀자돈수 <차를 마시며>

차는 하늘이 내린 신령스러운 풀 차가 이렇게 우리 곁에 가까워진 가장 큰 이유는 세간에 퍼진 ‘웰빙’ 바람 때문이다. 실제로 차는 머리와눈, 귀를 맑게 하고, 겨울엔 몸을 따뜻하게, 여름엔 서늘하게 만든다. 피곤함을 덜어주고, 숙취도 없애준다. 차의 주요성분인 카페인은 커피와는 달리 혈청 중 지질농도를 낮춰 동맥경화의 발병률을 낮춰준다. 가장 주목받는 성분은 폴리페놀이다. 얼마 전 ‘프렌치 패러독스’라는 말이 유럽에서 회자되었다. 유럽 7개국에서 현대병을 유발하는 요인을 조사한 결과 스트레스, 술, 비만이 꼽혔다. 경쟁 사회에서 욕망을 극대화시키기 위해서는 일을 해야 하고, 일을 하다 보면 스트레스 받고, 그 스트레스 풀려고 술 마시고, 술 마시면서 안주를 많이 먹다 보니 비만이 된 거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술을 가장 많이 마시는 프랑스인들이 병은 제일 적었다. 이유인즉슨 적포도주에는 노화를 방지하고 암을 억제하는 폴리페놀이 다량 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 폴리페놀이 차에는 2배나 들어 있다. 또 미국에서 똑같은 조사를 한 결과 성인병의 요인으로 스트레스, 비만, 외로움이 꼽혔다. 외로움은 경쟁사회에 대한 소외를 의미한다. 물질의 풍요는 왔을지언정 노동의 아름다움은 물론 건강까지 잃어버린 셈이다. 여기에 차는 한 모금 단비와 같다. 차는 정신과 육체를 동시에 단련시키는 조화로움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웰빙은 고급스러운 게 아닙니다. 옛사람들이 자기 텃밭에서 자기 가족을 위해 채소를 기르고, 이렇게 키운 나물로 밥을 차리고, 일기예보가 아닌 자기의 예감으로 계절을 읽던 알뜰한 정성 같은 겁니다. 옛날의 단순하면서도 소박한 행복이 지금 풍요로운 사회 속에서 갖는 아름다움보다 더 깊이가 있어요. 따뜻한 사고思考, 그게 웰빙이고, 삶의 에너지가 되는 거지요. 차 한잔이 삶을 따뜻하게 해방시키고, 따뜻한 문화를 만들고, 그것으로 인해 살 만한 세상이 되는 것, 거기에 차의 의미가 있습니다.”

일지암에 풍광의 삶을 담그고 수행과 차를 한 지 15년. 수행보다는 비취빛 차 한잔에 더 깊게 자신을 던졌다. 일지암에 귀향하면서 꿈꾼 것은 목탁보다 차도의 텃밭을 가는 일이었기에…. 차로 사람과 사람 사이의 다리를 만들고 싶었다던 그 프로젝트는 현재도 야심차게 진행 중이다. 내년부터 선차문화체험센터를 짓기 시작하는 것이다. 일반인들이 차도 만들어보고, 차를 마시며 명상도 하고, 봄엔 씨를 뿌려 채소도 기르고, 두부나 묵도 만들어 먹는 등 주말 농장보다 더 전문화된 프로그램을 개발 중이다. 

“GNP만 높여서는 절대로 잘살 수 없어요. 끊임없는 경쟁만 있을 뿐 만족도가 없지요. 결국은 의식이 변하고 가치관이 변해야 하는 겁니다. 가치관을 전환시켰을 때 느끼는 행복이 훨씬 ‘맛있는’거예요. 그 훈련을 차를 통해서 할 수 있습니다.”

한 잔의 차는 누구에게나 허용되는 ‘길’처럼 늘 곁에 있다. 가난한 마음이든 부유한 마음이든, 지친 사람이든 부지런한 사람이든 모든 이에게 맑은 영혼을 지니게 하는 마음을 만들어준다. 그런 점에서 차는 우리 곁에 있는 또 하나의 길인 셈이다.

구선숙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06년 10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