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녀 딸 매화꽃아
매화꽃은 에미 발자국 소리만 들어도 좋아서
“엄마 오는 소리제? 너거들아, 조용히 잘 들어봐라. 비탈진 산이라 우리 엄마 올라옴서 힘이 들어 숨 쉬는 소리가 크게 들리제.”
“맞다, 우리 엄마 오는 소리다.”
“너거들아, 인자 엄마 오면 엄마 얼굴 잘 보자. 걱정이 있는 얼굴인가, 화난 얼굴인가. 엄마가 걱정이 있으면 저 봄바람에 다 날려 보내뿔고, 엄마 화났으면 저 구름에 다 날려 보내뿔고. 활짝 웃는 딸하고 놀면서 엄마 웃는 모습 보고 싶다 하자. 엄마 보고 싶고 배고팠으니까 엄마, 니는 우리 보듬고 젖 좀 줘라 하자. 엄마 품에서 젖 물고 잠들고 싶었다 하자.”
“엄마 아프지 마라. 엄마가 건강해야 우리 보고 싶어 날마다 이 산비탈에 올 거 아이가. 해마다 매화꽃 이 딸랑구 다시 피면 엄마 니는 꼭 그 자리에 있어야 된대이.”
“매화꽃 우리 형제들아. 아무리 추워도 꽃받침 문 꼭 닫고 이 추위 잘 이겨내야 우리 엄마 만나볼 수 있대이. 내 형제들아, 겨울 강풍이 우리 매화꽃을 뚜드리 패도 절대로 떨어지지 말고 엄마 얼굴 안 보고는 떨어져 죽지 않을끼라고 약속하자. 7월에 꽃눈이 생겨 그 이듬해 3월까지 여덟 달이나 그 먼 길 걸어옴서 고생한 것 생각해서, 저 바람 소리에 딸 다칠까봐 잠 못 자고 뜬 눈으로 밤샐 우리 엄마 생각해서. 작년에 강풍으로 떨어진 매화꽃 주우면서 엄마 흘리던 눈물, 우리 딸들도 우는 소리 잘 들었제? 우리 엄마 하느님 원망하면서 통곡하는 소리 이자뿔지 말고. 눈, 비, 바람에도 잘 견디어 따뜻한 봄날에 활짝 웃는 엄마 모습 보자고 약속하자. 형제들아, 겨울 형제들아! 우리 엄마 만나러 갈 때는 꼭 이 손 놓치지 말고 저 산이 울려 메아리치도록 노래 부르며 우리 엄마 만나러 가제. 우리 엄마 사립문에서 매화꽃 딸 기다리고 있으면 ‘엄마, 우리 너무 보고 싶었제?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다. 우리도 그 먼 길 옴서 엄마 보고 싶은 것만 생각하믄서 엄마 품 생각하고 참았다 아이가. 우리 엄마 얼굴에 주름 하나 더 생겼네? 엄마 자꾸 늙으면 냉중에 우리가 엄마 못 알아보면 우짤끼고? 형제들아, 엄마 얼굴 자세히 잘 보래이. 우리 엄마 늙어도 얼굴 안 이자뿌고 잘 찾아오구로함서.”
“내 딸 매화야, 세월이 이 에미를 그냥 두느나? 울지 마라. 이 에미 너거들 안 이자뿌고 언제나 봄이 오면 사립문 열어놓고 내 딸들 기다리고 서 있을게.”
홍쌍리 여사는 매화를 딸로, 매실을 아들로 둔 농사꾼입니다. 자식을 가슴으로 품어 젖을 먹이고, 웃는 낯으로 어르고, 배꼽에 바람 불어넣으며 키워내는 것처럼 매화 딸과 매실 아들을 가슴으로 품어 키우는 ‘매실 엄마’입니다. 매일 새벽 바지런히 산비탈을 올라 매화꽃 딸들에게 이르면 딸들은 매실 엄마에게 수선수선, 두런두런 속삭입니다. 딸내미들 뒷바라지하느라 고단한 매실 엄마의 마음을 매화꽃 딸들이 도닥도닥 만져줍니다. ‘농사는 작품’이라 말하는 홍 여사님은 ‘자식 농사’도 작품으로 지으셨네요. 매화꽃 딸들과 나눈 곰살가운 대화를 그는 한 자 한 자 글로 적었습니다. 풀 냄새, 매실 냄새, 된장 냄새 가득한 홍 여사님의 사투리를 그대로 싣습니다.
보소. 고마운 영감탕구야
보소. 내는요, 물 위에 뜬 수련이 아니라 흙 속에 뿌리내려 엄동설한에도 잘 견디는 야생화가 될끼요.
보소. 울면서도 인생의 파도를 잘 넘는 뜨거운 가슴으로, 오염되지 않은 연기처럼 잘 살끼요.
보소. 당신은 나에게 이런 말씀을 많이 했지요. 세상에서 수야 엄마같이 불쌍한 사람 없다고.
보소. 하루는 당신이 나에게 “밥 세끼 다 먹는 날이 드문 우리 집 머슴 수야 엄마야. 왜 그라고 사나” 했지요. 광산 하다 화병으로 몸져누운 뒤 일을 못 도와줘서 언제나 미안해한 당신.
보소. 일이 뭐길래 일 좀 더 하려고 내가 산에 있으면 당신은 아픈 몸 이끌고 풋고추 따다 씻어 놓고 산에서 일하는 마누라 언제 내려오나, 마당가에서 몇 번이고 산천만 쳐다볼 뿐, 숨이 가빠서 부르지도 못했지요. 보리밥에 된장, 풋고추 씻어 놓고 나를 기다리곤 했지요. 찬물에 밥 말아 된장에 풋고추 찍어먹는 이 맛!
“고맙소, 풋고추 따다 줘서….”
“수야 엄마, 일이 아무리 중요하지만 때가 되면 제때 밥 먹고 일해라. 쌀이 없어 보리만 삶아먹는데 끼니를 놓치면 수야 엄마 몸까지 병날까 걱정된다. 수야 엄마야, 여자 혼자 살림살이며 아이들 뒷바라지, 남편 병 수발, 빚쟁이 시달림…. 내가 수야 엄마 볼 면목이 없다.” 땀에 옷 다 젖고 흙조배기 되어 돌아온 내게 당신이 해줄 것은 보리밥에 된장, 풋고추 따와서 밥상 차리고 마주 앉아 물에 밥 말아 먹는 것.
내 입에 밥 들어가는 모습 볼 때마다 말 못하고 담배만 태우다, 나 잠잘 때 모기 때문에 잠 못 잘까 모깃불 피우고 방 쪽으로 연기가 들어가라고 부채질함서,
‘서방 하나 잘못 만나 고생만 하는 불쌍한 수야 엄마’ 하면서 혼자 구시렁거리는 소리 나도 다 들었소. 고마운 영감, 그 맘씨 덕분에 내 이렇게 잘 살아왔지요. 보소. 영감탕구야. 저 세상이 얼마나 좋아서, 무엇이 그리 바빠서 얼른 가뿌요? 하느님, 화병에 헐떡거리는 우리 영감이 어디가 필요해서 그래 얼른 데리고 갑니까? 보소. 영감요. 단 한 번이라도 당신과 같이 일해봤으면….
33년을 아픔과 씨름하다 먼저 가신 영감탕구야. 언제나 이 할멈 용기 주시고 우리 청매실농원 성장하는 모습 지켜봐 주이소.
항상 이 할멈에게 미안해하는 영감께 이 글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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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밀양에서 태어난 홍쌍리 씨는 8남매 중 제일 예쁘고, 자존심이 강하고, 멋을 부리던 ‘경상도 가시내’였습니다. 그 멋쟁이가 밤나무, 매실나무가 심어진 전라도 광양의 산비탈 농가, ‘밤나무골 김 영감님’ 아들인 김달웅 씨에게 시집왔습니다. 시아버지인 김오천 선생이 13년 동안 일본에서 광부 생활을 해 모은 돈으로 밤나무 1만 그루, 매실나무 2천 그루의 묘목을 들여와 심었는데(김오천 선생은 1965년에 정부로부터 산업훈장을 받았다), 스물두 살의 새색시 홍쌍리 씨가 그걸 이어받게 된 거죠. 첩첩산중의 궁색하고 고된 삶에 지친 새색시는 하루에도 수십 번 도망갈 궁리를 하며 눈물을 쏟았지만, 그때마다 마음을 붙잡은 것이 매화꽃이었다지요. 1970년대, 광산업에 투자했다가 돈을 모두 날린 뒤 남편이 화병에 몸져 누웠습니다. 이때부터 홍 여사는 30여 년 동안 남편 병 수발을 들면서 비탈에 심어져 있던 밤나무를 베어내고 매화나무 심기에 매달렸습니다. 매실을 공짜로 줘도 먹지 않던 시절에 말이지요. 동네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으며 매화나무를 가꾼 그는 결국 지금의 청매실 농원을 일궈냈습니다. 생의 온갖 간난신고를 겪으면서도 좌절하지 않은 그는 영락없이 눈 속에서 피어나는 매화꽃입니다. 그 찬겨울 시린 바람 같던 시절을 그가 글로 적었습니다. ‘고마운 영감탕구’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담뿍 담겨 있는 글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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