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졸레의 전형적 여름 풍경. 포도밭으로 뒤덮인 구릉이 있고, 언덕 아래 와이너리와 집들이 모여 있다. 사진 속 풍경은 모르공 지역의 생 조제프 와이너리.
와이너리 기행을 위해 찾은 11월 보졸레의 자연은 노란색 수채 물감을 풀어놓은 듯 깊고 아름다운 가을을 뽐내고 있었다. 또 이곳의 사람들은 포도 수확과 와인 양조를 끝낸 뒤 보졸레 누보 축제일을 기다리는 여유롭고도 설레는 모습이었다.
‘굴르양 gouleyant’. 프랑스어 사전에는 ‘포도주 맛이 신선하고 담백한, 개운한’이라는 뜻의 형용사로 표기되어 있다. 언제나 가볍게, 즐겁게 마실 수 있는 와인, 상큼한 과일 향이 선명한 보졸레 Beaujolais 지방의 와인이 목으로 넘어가는 느낌을 표현하면서 생긴 단어다. 남다른 맛과 향을 지니고 있어 형용사까지 만들어낸 보졸레 와인. 이 와인을 생산하는 보졸레 지방은 부르고뉴 Bourgogne 주의 남단, 리옹 Lyon의 북서쪽에 있는 전형적인 농업 지역이다. 온갖 채소와 곡물을 재배하는 소규모 자영 농장이 많고, 동쪽은 대부분 포도밭인데 그 면적이 프랑스의 수도인 파리 Paris의 2배에 달할 정도로 넓다.
포도나무와 땅의 찰떡궁합 프랑스에서 가장 신선한 와인을 생산하는 보졸레 지방을 두고 영국의 국보급 와인 평론가로 꼽히는 휴 존슨 Hugh Johnson과 잰시스 로빈슨 Jancis Robinson은 “보졸레는 포도나무와 땅이 결혼한 곳”이라고 말했다. 다른 지역에서는 무미건조한 포도 품종인 가메 Gamay가 화강암을 덮고 있는 보졸레의 모래 섞인 점토 땅에서는 매력적인 와인으로 변모하기 때문이다. 보졸레의 모든 레드 와인은 이 가메라는 포도 품종 하나로 만든다(가메 품종 재배량은 98%이며, 화이트 와인을 생산하기 위해 부르고뉴 백포도주를 만드는 대표적 포도 품종인 샤르도네 Chardonnay를 약 2% 정도 재배한다). 보졸레에서 가메만 재배하기 시작한 것은 14세기부터다. 당시 부르고뉴 주의 한 공작이 강제적으로 가메를 부르고뉴 주의 최남단인 보졸레에서만 재배하도록 명령했다. 가메로 만든 와인이 부르고뉴 와인을 대표하는 포도 품종인 피노 누아 Pinot Noir에 비해 우아하지 못하다는 게 그 이유였다. 부르고뉴 주 전역에서 드문드문 재배하다 같은 주의 남쪽인 보졸레 지역으로 귀양 온 가메는 다른 나라에서도 거의 재배하지 않는 희귀 품종이다. 이유는 역시 와인의 맛을 제대로 내기 어렵기 때문. 하지만 보졸레 지방에서만큼은 과일 향이 풍부한 햇와인을 생산하는 데 가장 적합한 포도 품종으로 꼽힌다. 화강암과 모래가 섞인 점토 땅, 일조량과 강수량 등 보졸레의 테루아 terroir가 가메와 최상의 궁합을 이루기 때문이다.
탄산가스에 풍덩 빠진 포도송이 보졸레 지방의 와인 양조법에는 두 가지 특징이 있다. 우선 포도송이째 발효조에 넣는 점이다. 다른 지역에서 포도알만으로 양조하는 것과 크게 다른 것으로 또 보졸레 지역에서 생산하는 대부분의 와인은 탄산가스 침용 용법(carbonic maceration)으로 양조한다. 빠른 시간 내에 포도에서 와인의 맛을 이끌어내기 위해 발효조에 탄산가스를 주입하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차이점이 보졸레만의 ‘신선한’ ‘상큼한’ ‘과일 향이 풍부한’ 특징을 지닌 와인을 만드는 비결이라고 할 수 있다.
보졸레 지역의 와인은 크게 네 종류로 나뉜다. 우리에게 익숙한 이름인 보졸레 누보 Beaujolais Nouveau는 그해 가을에 수확한 포도로 만든 와인이다. 본래 보졸레에서는 발효가 끝난 포도를 압착해 오크통에 넣은 뒤 병입을 하지 않고 오크통에서 직접 따라 마시곤 했다. 이 전통을 1951년 지역 축제로 발전시켰고, 1985년 프랑스 정부에서 매년 11월 셋째 주 목요일 자정을 보졸레 누보 판매 개시일로 규정했다.
‘보졸레 누보’ 외에 보졸레에서 생산하는 일반 와인을 통칭해 부르는 명칭은 ‘보졸레’다. 보통 보졸레 지역 남쪽에서 생산하는 이 와인은 대중 레스토랑에서 편안하게 마시기 좋은 소박한 맛을 지녔다. 그리고 보졸레 북부의 화강암 지역에서 생산하는, 일반 보졸레보다 좀 더 깊은 맛을 내는 와인을 ‘보졸레 빌라주 Beaujolais Village’라고 라벨에 표기해 판매한다. 그리고 보졸레 지역에서 가장 고급으로 분류되는 와인은 바로 크뤼 Cru 등급을 받은 10개의 마을에서 생산한 와인이다. 보졸레 지역에서도 북부 지방에 몰려 있는 이 마을들은 저마다 개성 넘치는 와인을 생산하고 있으며, 타 지역의 고급 와인을 넘어서기 위해 와인 양조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10개의 크뤼는 라벨에 ‘보졸레’는 표기하지 않고 마을 이름만 적는다.
1,2,3 보졸레의 모든 레드 와인은 이 ‘가메’라는 포도 품종으로 만든다.
10개의 크뤼를 소개하면, 쉬루블 Chiroubles은 해발 400m의 화강암 지형에 있어 보졸레 크뤼 중 가장 높은 지역에서 생산되는 와인이다. 마을 풍경이 아름다운 곳으로 유명하며, 그 풍경만큼 와인의 맛도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는다. ‘보졸레의 여왕’이라 불리는 플뢰리 Fleurie는 어린 와인(숙성하지 않은 햇와인)도 꽃 향과 함께 붉은 과일 향이 풍부해 목 넘김이 상큼하다. 연인들의 와인으로 불리며 결혼식 피로연 와인으로 많이 사용하는 생타무르 Saint-Amour는 활기차고 섬세한 맛을 낸다. 브루이 Brouilly는 보졸레에서 가장 남쪽에서 생산되는데 짙은 루비색에 과일과 미네랄 향을 지니고 있다. 코트 드 브루이 Cote de Brouilly는 브루이 산의 경사면에서 자란 포도로 만든 와인으로, 숙성시키면 과일과 견과류 향이 잘 어우러진다. 줄리우스 카이사르가 지나간 곳이라는 의미의 쥘리에나 Julienas는 햇와인은 맛이 신선하고 몇 년 숙성한 와인은 향신료의 향이 깊고 진한 것을 알 수 있다. 레니에 Regnie는 부드러우면서도 짜임새 있는 맛과 향을 지녀 보졸레 크뤼의 테루아를 잘 설명해주는 와인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셰나 Chenas는 루이 13세가 아끼던 와인 중 하나로 오랜 시간 보관할 수 있고, 꽃 향과 나무 향이 풍부하다. 모르공 Morgon은 짙은 석륫빛을 띤다. 와인 애호가들은 이 모르공이 잘 숙성하면 부르고뉴의 피노 누아 부럽지 않은 섬세하고 우아한 맛을 낸다고 평가한다. ‘풍차’라는 뜻의 물랭아방 Moulin-a-Vent은 보졸레 크뤼의 제왕으로 불리며 짙은 루비색에 짜임새가 뛰어나다.
(왼쪽) 보졸레에서 가장 아름다운 풍경과 역사를 자랑하는 와이너리인 샤토 드 라 테리에르에서 양조한 브루이.
(왼쪽) 가장 유명한 크뤼인 물랭아방의 상징인 풍차.
(오른쪽) 보졸레 10개 크뤼의 특징을 표현한 라벨. 보졸레 남부에 있는 와이너리인 메종 코카르에서 인근의 예술학교 학생들과 함께 디자인했다.
약간 차게, 안주 걱정 없이 즐겨라 그해에 바로 마실 수 있는 가벼운 와인부터 수년을 기다려야 맛과 향이 깊고 묵직해지는 와인까지 다양하게 생산해내는 보졸레 와인은 언제, 어떻게 마셔야 가장 맛있을까? 세계적으로 유명한 미식 평가서인 <미슐랭 가이드>에서 별 세 개를 받은 레스토랑 조르주 블랑Georges Blanc의 셰프 소믈리에(가장 높은 지위에 있는 소믈리에)이면서 2007년에 프랑스 최고의 소믈리에로 선정된 파브리스 Fabrice 씨는 샤토 뒤 샤틀라르 Chateau du Chatelard에서 양조한 물랭아방과 모르공을 시음하던 중 쉬운 예를 들며 보졸레 와인과 음식의 매치에 대해 설명해주었다. “당신이 연인과 함께 레스토랑에 갔습니다. 각각 어린 양고기 스테이크와 신선한 흰 살 생선 요리를 주문했습니다. 이때 어떤 와인이 어울릴까요? 보르도 레드 와인? 부르고뉴 화이트 와인? 아니죠. 보졸레 와인입니다. 아! 보졸레 와인은 다른 지역의 레드 와인보다 약간 차게 해서 드세요. 그래야 신선한 보졸레 와인의 특징을 100배 즐길 수 있습니다.” 이처럼 보졸레 와인은 성격이 강하지 않아 어떤 음식과 매치해도 무난하다. 그래서 와인 선택에 노하우가 없는 초보자, 와인보다 음식 맛을 음미하고 싶은 자리, 아무런 부담 없이 가볍게 마시고 싶을 때 선택하면 제격이다. ‘부담 없이’라는 뜻에는 비교적 저렴한 가격 정책도 한몫한다. 보졸레 와인 협회 마케팅 이사 앙토니 콜레 Anthony Collet 씨는 “보졸레 와인은 저평가되어 있어 프랑스 다른 지역의 와인보다 훨씬 저렴합니다. 가장 고가인 크뤼도 10유로(우리나라 돈으로 약 1만 6천 원) 정도입니다. 그렇다고 맛이나 품질이 떨어지지도 않아요. 보졸레가 속한 부르고뉴 주에서 세계에서 가장 비싸다는 와인인 로마네 콩티 DRC Romanee Conti를 생산합니다. 보졸레 지역의 와인을 마신다는 건 부르고뉴 주의 고품질 와인을 매우 저렴한 가격에 즐긴다는 의미로 생각해도 됩니다”라고 보졸레 와인의 저렴한 가격에 대해 설명했다.
(왼쪽) 와이너리 샤토 드 피제의 외벽에 담쟁이덩굴 단풍이 아름답게 물들어 있다.
(오른쪽) 와인 양조 과정을 스테인드 글라스로 표현한 작품.
베르사유 궁전 부럽지 않은 와이너리 보졸레에서 방문할 수 있는 와이너리 중 가장 대표적인 곳은 보졸레 와인 박물관까지 설립한 아모 뒤 뱅(www.hameauduvin.com)이다. 가장 처음 보졸레 누보를 상업적 마케팅 툴로 활용한 조르주 뒤뵈프 Georges Duboeuf 씨가 설립한 곳으로 와인 공원과 25개의 전시실, 양조장 등을 둘러볼 수 있으며 보졸레 누보에 대한 영상, 인형극 등의 관람도 가능하다.
와인 용어 중 네고시앙 Negociant이라는 말이 있다. 포도 재배자나 와인을 양조한 생산자에게서 포도나 와인을 사들여 자신의 양조장에서 양조나 블렌딩한 후 숙성, 병입 과정을 거쳐 자신의 이름으로 와인을 유통하는 업체를 일컫는다. 물랭아방에 있는 와이너리 샤토 데 자크 Chateau des Jacques는 본래 네고시앙을 하다가 포도밭을 마련한 곳이다. 이곳의 와인메이커 기욤 드 카스텔노 Guillaume de Castelnau 씨는 “좋은 와인을 만들려면 밭에서 포도를 잘 기르는 일이 가장 중요합니다. 포도 품질이 나쁘면 양조할 때 설탕이나 이스트 등을 넣어야 합니다. 그래서 좋은 품질의 포도를 확보하기 위해 15년 전부터 직접 포도 농사를 짓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부르고뉴에서 가장 규모가 큰 와이너리인 이곳은 품질이 좋은 물랭아방을 부르고뉴의 최고급 와인 등급인 프리미에 크뤼급으로 높이기 위한 작업을 하고 있다. “결과는 20년 후에나 나올 것”이라면서도 확신에 찬 모습이 인상 깊었던 곳이다.
1996년 G7 정상회의 때 각국 정상 부인들의 만찬 장소였던 샤토 드 라 테리에르와 오너인 캐롤라인 케이브 Caroline Cave.
보졸레 남부의 테이즈 Theize에 있는 메종 코카르 Maison Coquard는 인근에 예술학교가 있어 그곳 학생들과 함께 작업한 라벨이 유명한 곳이기도 하다. 라벨에 그려진 10개 크뤼의 특징을 담은 집 모양 그림은 멋스러울 뿐만 아니라 와인의 성격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어 기능적이다. 예를 들면 연인의 와인인 생타무르는 집 속에 세 개의 하트가 그려져 있고, 아름다운 꽃향기가 특징인 플뢰리 라벨엔 커다란 작약 한 송이가 그려져 있는 식이다. 이 라벨의 이름은 ‘메종 드 트라디시옹 Une Maison de Tradition’으로 가장 보졸레다운 마케팅 전략으로 손꼽히고 있다.
보졸레에서 가장 아름다운 풍경과 역사를 자랑하는 와이너리는 샤토 드 라 테리에르 Chateau de la Terriere와 샤토 드 피제 Chateau de Pizay를 꼽을 수 있다. 두 곳 모두 13세기에 성이던 곳으로 아름다운 건물이 시선을 사로잡는 것은 물론, 베르사유 궁전의 정원을 디자인한 정원사가 가꾼 널찍한 정원을 갖추고 있다. 샤토 드 라 테리에르는 13세기 보졸레 역사의 중심지인 세르시에 Cercie에 있으며 정원과 샤토가 아름답고, 역사가 깊다. 샤토 드 피제는 14세기 성이던 건물을 개조한 와이너리로 호텔과 스파, 레스토랑, 결혼식장도 함께 운영한다. 두 곳 모두 다양한 크뤼 와인을 생산하고 있으며 크뤼 와인 중에서도 고급 와인으로 분류된다.
(오른쪽) 프랑스에서 가장 아름다운 마을 중 하나로 지정된 우앵 플라스 프레스베르그 Oingt Place Presberg 전경.
취재 협조 소펙사(www.sopexa.co.kr)
- [와이너리 기행]프랑스에서 가장 신선한 와인을 만드는 땅 보졸레 와이너리 방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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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11월 셋째 주 목요일 자정을 기해 전 세계에서 동시에 출시하는 햇와인 ‘보졸레 누보’는 와인에 관심이 없는 사람도 한 번쯤 들어봤음 직한 익숙한 이름이다. 신선한 과일 향이 풍부하고 언제나 쉽게 마실 수 있는 이 매력적인 와인의 생산지가 궁금해 프랑스 보졸레 지방에 다녀왔다.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0년 12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