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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 전원일기- 귀촌사례]20년 차 ‘지식인 농사꾼’으로 살아온 최영준 교수 부부 “밭 갈고 씨 뿌리며 무소유를 배웁니다”
주중에는 서울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주말과 방학에는 강원도 춘천시 남산면의 홍천강변에서 농사지으며 20년을 산 최영준 교수. 정년퇴직 후 온전히 시골 촌부의 삶을 살고 있는 그는 매일 주경야독하며 한걸음씩 깨달음의 길로 나아가는 중이다. 몸을 부려 일하고, 거기서 얻은 깨달음으로 글을 쓰던 옛 선비들처럼.


1 퇴직 후 주소지까지 산수리로 옮긴 그는 해가 지도록 농사짓는 재미에 빠져 있다.
2 이 집은 대한제국 말엽 낙향한 선비가 서당으로 쓴 집이다.


집 앞 옥수수밭에서 막걸리처럼 구수한 냄새가 피어오른다. 수풀 속에선 여름 기운을 이기지 못한 새가 울어댄다. 눈이 빨개지도록 여문 고추밭 고랑에서 두 사람은 두런두런 이야기 중이다. 작년에 갈아놓은 묵정밭의 소출 이야기, 건너 숲에 사는 고라니가 강을 헤엄쳐와 애써 가꾼 콩을 다 따먹은 이야기, 평생토록 밥 벌어오느라 밥 하느라 고단했을 여보 당신 이야기…. 그렇게 한나절 두 양반이 채운 이야기보따리, 고추 부대가 밭고랑에 올라앉았다.
되뇌면 입안 가득 풋내가 고이는 이름, 산수리에 최영준 교수 부부가 살고 있다. 땅과 땅 위에 인간이 창조해놓은 문화유산을 연구하는 지리학자로, <영남대로> <국토와 민족 생활사> <한국의 짚가리> 등으로 이름을 알린 저술가로, 고려대학교 지리교육학과의 교수(3년 전 정년 퇴임했다)로, 그리고 손톱에 흙때 낀 농사꾼으로 이곳에서 20년을 살았다. 1천2백 평의 땅을 일구며, 다랑이 논에 벼를 키우고, 산비탈 밭에 고추, 옥수수, 마늘 농사를 지으며 한 해를 성실히 가꾸고 있다.

낡은 시골집 한 채를 사 산수리에 들어앉은 게 1990년이었다. 자갈이 깔린 비포장도로를 내달리고, 다시 차를 두고 농로 2km를 걷고, 나룻배 삿대를 저어 홍천강을 건너고, 또다시 1km 정도 꽃님이고개를 넘어야 닿을 수 있는 두메산골이었다. “현대식 개발을 겪지 않을 곳, 아니면 가장 늦게 그런 변화를 겪게 될 후보지를 물색하다가” 찾은 것이 이 궁벽한 터였다. 등짐으로 솥이며 밥상, 침구를 이고 지고 들어와 이 납작한 양철 지붕집에 살림을 풀었다. 대한제국 말엽 경복궁에서 참봉 벼슬을 하던 이가 낙향해 지은 집이라는데, 한동안 서당으로 쓰여서인지 낡았지만 기품이 있었다. 사람 키를 넘는 덤불숲 마당, 꺼진 방고래, 우수수 흙이 떨어지는 수수깡 벽을 그와 아내가 수년 동안 고쳤다.
“이런 두메에 들어온 게 나름대로 구실은 있었지요. 만 49세 생일날, 조상님들 중 49세 이상 사신 분이 없다고 초조해하시던 내 선친의 모습이 떠올랐어요. ‘마의 마흔아홉고비를 넘겼으니 앞으로의 생애는 덤으로 사는 것이다, 욕심 버리고 좋은 글 읽으며 공부한 내용을 더듬어 글을 쓰리라’ 생각했지요. 이 적막강산에서 퇴계나 다산 같은 선현을 본받아 낮에는 밭을 갈아 하늘이 베푼 만큼 먹고, 밤에는 책 읽는 생활을 시작하리라 맘먹은 겁니다.” 그 후 20년 동안 그는 주중에는 교수라는 직 職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서울에 머물고, 주말과 방학에는 농사와 공부라는 업 業을 위해 홍천강변에 머물렀다. 이 ‘이중생활’은 봄에서 여름으로, 겨울에서 봄으로 흐르듯 별다른 충돌 없이 흘러갔다. 전화도 없이(시골 생활하는 동안만이라도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으며 살리라 다짐하고 7년 동안 전화도 놓지 않았다) 밭고랑과 책시렁 사이를 헤매며 두메산골의 삶을 즐겼다.

(오른쪽) 주경야독하며 시골 촌부로, 선비로 살아가는 그의 집 사랑채.



물론 그의 20년 시골살이가 음풍농월하는 신선놀음만은 아니었다. 오십 줄임에도 이 동네에선 ‘새로 온 젊은 사람’이던 그는 도시인을 경계하는 주민들의 눈총을 이겨내야 했고, 말 그대로 ‘야생’과 다투며 생존해야 했다. 발목뼈가 부러진 상태에서 앉은뱅이걸음으로 밭고랑을 낸 일, 도시에서 내려온 이웃이 관정을 파서 그의 집 수도와 연못이 모두 말라버린 일, 토지 분쟁으로 관공서를 오간 일, 장인어른이 ‘창우헌 菖宇軒’이라 써주신 사랑채 현판을 도둑맞은 일…. 심사를 어지럽히는 사건이 끊이지 않았다. 무엇보다 농사일에 문외한이었던지라 몸을 낮추고 동네 사람들에게 농사를 하나하나 배워야 했다.
“밭고랑이 너무 넓다, 콩을 너무 깊이 심었다, 다음엔 무를 심는 게 좋겠다…. 동네 어르신들이 지나가면서 참견을 하시죠. 번거롭지만 나보다 경험 많은 농사꾼들의 충고라 고맙게 받아들였어요. 도시에서 나고 자라 아무것도 모르던 내가 이나마 농사꾼 냄새가 밴 건 다 참견하기 즐겨하는 그분들의 가르침 덕이지요. 지심 地心뿐만 아니라인심 人心까지 헤아릴 줄 알아야 진짜 농부가 된다는 걸 그분들을통해 배웠죠. 농부가 쟁기를 끄는 황소와 대화하고, 논밭의 작물과의사소통하는 걸 보세요. 그건 단지 넋두리나 혼잣말이 아니라 인간이 자연과 친밀해지는 방법이지요. 그들은 그런 지혜를 가졌답니다.”그 강물 같은 이야기에 시간이 잠시 공기 속에 멈춘다.


1 충청도에서 모셔온 장승이 집 앞을 지키고 있다. 장승을 음산한 물건으로 5 ‘잔디밭은 내 작품, 돌 축대는 내 작품’이라며 웃는 최영준, 손정리 부부.생각한 이라도 이 집에 오면 생각이 달라진다.
2 아내 손정리 씨가 빚은 항아리 뚜껑.



3 단출하면서도 질서 정연한 시골살이가 엿보이는 세간.

그는 점점 ‘진짜 시골 촌부’가 되어갔다. 농약이나 비료 없이 농사를 지어보려고 묵은 김칫국에 물을 섞어 밭고랑에도 뿌려보고, 세탁비누와 담배꽁초를 풀어 분무기로 뿌리기도 했다. 제초제 대신 밭고랑에 검은색 양탄자를 깔고, 낙엽을 긁어모아 퇴비를 만들었다. 그렇게 지심까지 헤아리려 애쓰다 보니 그는 어느새 퇴비 썩는 냄새를 구수하다고 느끼는 농사꾼이 되었다. 그러다 보니 언제부턴가 삼태기에 든 퇴비를 맨손으로 집어 밭에 뿌리게 되었다. 예술가 아내(그의 아내 손정리 씨는 한국교원대 미술교육과 교수를 지낸 도예가다)는 그가 잘 정리한 이랑과 고랑을 보며 “하나의 예술 작품처럼 아름답다”고 칭찬했다. 그는 “농사도 하나의 창작이고, 땅 위에 만드는 예술”이라고 일기에 적었다.
그렇게 논일 밭일 하다 보니 마음에 평화가 찾아왔다. “무엇인가를 가꾸느라 땀을 흘리고, 손톱이 거칠게 닳아 손끝이 시리며, 힘든 작업중에 손바닥에 박힌 굳은살이 뜯겨 아린 고통을 느끼며, 팔다리에 알이 배겨 땅기는 이 힘든 생활도 무소유 못지않은 의미가 있다고 느끼기도 한다. 밭 갈고, 씨 뿌리고, 김매고, 거두면서 나는 수시로 무의식에 빠진다. 이 무의식의 순간이 무소유에 비해 가치가 없을까.”(<홍천강변에서 주경야독 20년> 중에서)

대지모 大地母를 사랑한 선비 대낮에 질척한 밭고랑을 헤매다가도 밤 기운이 손님처럼 다가오면 그는 고요한 마음으로 책을 읽었다. 밤마다 글을 써 <한국의 짚가리> <국토와 민족생활사>도 펴냈다. 농사꾼의 나날을 차곡차곡 일기에 써내려갔는데 그 글을 얼마 전 <홍천강변에서 주경야독 20년>으로 묶어냈다. 이 책을 읽다가 나는 ‘문즉인 文卽人’ 즉 글이 사람이라는 말이 꼭 맞는구나 생각했다. 쉽고 단정한 글, 그러면서도 꼭 있어야 할 것만 있는 그의 글은 그야말로 문체의 실사구시다. 그러고 보면 이 집은, 이 시골 동네는 ‘현대판 선비’가 밭을 갈고 글을 읽는 선방이자 청정 도량이다. 군살이 하나도 없는 몸매에 눈빛만 빛나는 그는 조선 선비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퇴계와 반계도 농사를 지었습니다. 선비들은 체면치레하느라 굶주리는 자를 진정한 선비로 여기지 않았어요. 몸을 부려 일하고 거기서 얻은 깨달음으로 오래 삭힌 글을 썼지요. 공부란 게 무엇인가요. 농사일을 하다 보니 참 진리는 일상생활과 일 속에서 찾는 것 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제 자신에게도, 자신의 배움에도 진짜 삶이만들어낸 주름이 조금은 생겼다고 믿는다.


4 이 집에서 산 20여 년의 일기를 모아 <홍천강변에서 주경야독 20년: 역사지리학자 최영준의 농사 일기>를 펴냈다
5 ‘잔디밭은 내 작품, 돌 축대는 내 작품’이라며 웃는 최영준, 손정리 부부.


지리학자인 그는 요즘 땅의 역사에 대해 더 깊이 성찰하고 있다. “조상님들은 토양은 지모 地母의 살이고, 암석은 뼈이며, 식생은 체모 體毛로 생각했어요. 하늘이 내려주는 빗물을 지모인 땅이 받아 식물을키우는데, 인간들은 그 식물을 땔감으로 먹을거리로 지모에게서 빌려오는 겁니다. 그래서 조상들은 가능한 한 숲을 덜 불태우고 덜 손상 시켜야 한다고 믿었어요. 지모를 발가벗겨 수모를 주는 것을 불경한행위라 생각했거든요. 또 시골에서는 강에 바로 붙어 있는 땅은 안갈아요. 그 땅은 주인이 물이지 사람이 아니거든요. 몇 십 년 만에 홍수가 났다, 그건 물이 원래 자기 땅 찾아온 거예요. 물가에 집 짓고 농사짓고 그러다 물에 잠기면 강을 원망하고 하늘을 원망하는데 그건 잘못된 겁니다. 우리는 조물주가 수천만 년 동안 가꿔온 땅의 곡선을 욕심 때문에 직선으로 마구 잘라내고 있어요.조상들처럼 자연을 살아 있는 존재로 대하고 경외하면 이렇게 자연을 훼손하는 일은 절대 못합니다. 진짜 농심 農心은 자연을 살아 있는 존재로 믿는 마음이겠지요.” 이 대목에서 그의 표정은 고지식한 청년의 그것이었다.

3년 전 정년퇴직한 그는 주소지까지 춘천시 남산면으로 바꾸고 지역 농협의 조합원 자격까지 얻었다. 그날 일기에 “정년퇴직과 동시에 일시적으로 업 業을 잃었다가 농업인이라는 명예로운 업을 얻었을 때의 기쁨을 평생토록 간직하고 싶다”고 썼다. “17년 동안 남의 흉내나 내는 식으로 농사를 지어왔으나 이제는 진심으로 땅을 사랑하고 애정을 쏟으리라”라고도 썼다. 이제 귀밑머리 허연 칠순의 노인이 되었지만 연금 빼먹듯 허무감만 늘어놓는 노년은 그에게 없을 것이다. 땅과 종이 냄새를 함께 맡으며 하루하루 진정한 촌사람으로 변해갈 것이므로. 그야말로 진짜 선비의 겸손하고 부지런한 삶이 펼쳐질 것이므로. “늘그막에 집 하나 얽어/ 그 가운데 누워서/ 한가로운 정취 절반은/ 들사슴과 나누어 갖네.”(퇴계 이황의 <도산잡영> 중에서)

최영준 교수가 말하는 ‘시골 인심 人心 얻는 법’
“시골 사람들은 순박하지만 변화가 적은 생활에 익숙해 작은 소식에도 호기심을 갖게 마련인데 도시 사람들은 이 끈끈한 정을 번거롭게 여긴다. 시골에서 살려거든 도시적 사고는 완전히 잊고 새로운 삶, 새로운 인간관계를 만든다는 생각을 가져야 한다. 또한 시골 사람들은 자존심이 무척 강하다. 도시에서 살다왔다고 자신을 과시하거나 자랑하면 그들은 예쁘게 받아주지 않는다. 이사 왔다고 잔치를 여는 것 같은 공연한 돈 자랑은 역효과를 내기 쉽다. 우리 동네 사람들이 내게 마음의 문을 열기까지 족히 5~6년이 걸린 것 같고, 내가 그들의 마음을 읽기까지는 아마도 10여 년이 걸린 듯하다. 내가 그들만큼 감정이 순수하고 생각이 단순한 사람이 되기까지 이렇게 많은 시간이 걸린 것이다. 어디에서든 제일 중요한 건 사람 됨됨이와 근면성이다.”


최혜경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0년 9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