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의 태양 아래 벌개미취가 만발해 있다. 그는 하루에 12~14시간 넘게 뜰을 가꾸는데, 들꽃과 하나하나 눈 맞추고 이름 불러가며 자식처럼 기른다.
사는 날들은 다 꽃다운데, 난 그것도 모르고 꽃다운 나날은 이미 다 졌다고 슬퍼했다. 꽃이 너무 환해 꽃멀미가 날 것 같은 이 집 뜰에 와서 잠시 내게 속말을 건네본다. 아직도 내 가슴엔 붉은 꽃이 지천으로 피어 있으니 나의 날들을 기쁘게 살아가라고. 객이라도 마음을 쉬게 하는 이 집 뜰에서 맞은 늦여름 아침이다.
할머니는 숲에 물기가 돌기 시작할 무렵부터 뜰에 나와 있다. 달팽이처럼 이슬에 몸 적시며 뜰을 가꾸는 중이다. 호수와 맞닿아 뻗은 이 긴 뜰에는 5백여 종의 식물이 자라고 있다. 벌개미취·원추리꽃·마타리·부처꽃·꽃양귀비처럼 우리 땅에 자생하는 들꽃, 밤나무·호두나무 같은 유실수에 무·배추·밭벼까지 뜰을 살뜰히 메우고 있다. 무엇보다 이 뜰은 한 무더기 꽃이 지면 다른 꽃들이 또 지천으로 피어나 달마다 다른 옷을 갈아입는 야생화 정원이다(야생화는 보통 한 달 정도면 꽃이 진다). 할머니는 요즘 젊은 아낙들이 좋아한다는 ‘키친 가든(할머니식으로 표현하면 ‘채소 꽃밭’)’도 만들 생각이다. 파며 배추며 우리 몸을 살찌우는 채소들이 얼마나 예쁜 꽃도 피우는지 보고 싶어서다.
병을 얻어 공기 맑은 시골집으로 내려온 게 1990년대 중반이었다. 시아버님이 가꾸시던 이 집 뜰엔 나리꽃과 산수유나무가 자라고 있었다. 그 꽃들은 시아버님께서 며느리를 위해 손수 심으신 것이었다. 그는 그 정을 못 잊어 뜰을 살뜰히 가꿨다. 아버님이 더 좋은 세상으로 떠나시고 자식들도 제 식솔 찾아 객지로 떠난 지금, 이 부부만이 남아 애완해야 할 자식처럼 뜰을 가꾼다. 서로의 등에 기대어 늙어가면서…. 일흔 살을 넘긴 할머니는 뜰을 가꾸며 생각한다. ‘늙는다는 건 쓸쓸한 일이 아니구나. 다른 종류의 기쁨이 인생의 갈피마다 남아 있구나.’
조각 천을 누벼 만든 퀼트 작품 ‘풀물 꽃물 저어간다’. 가로 1.6m, 세로 1m의 작품으로 그의 뜰이 퀼트 안에 ‘그림처럼’ 펼쳐져 있다.
정원의 가을. 사진은 남편 양위석 씨가 찍었다.
할머니가 꽃과 연애한 내력은 좀 길다. 해방 직후, 그의 가족은 함경남도 학천에서 3년 동안 농사지으며 살았다. 단청 칠한 그 기와집 안뜰에는 꽃도 많고 새도 많았다. 넓은 뒤란에는 들나물이 만발했는데 그가 그 울 안에서 캐낸 들나물로 어머니는 죽을 쑤었다. 먹는 나물이 꽃을 피운다는 사실이 마냥 신기한, 들꽃 소녀의 나날이었다. 특히 아버지는 꽃을 잘 가꾸셨는데 어느 해 방학엔가 그 집에 내려가니 접시만 한 달리아를 가리키며 “꽃이 필 때 널 시집 보내려 했다” 하셨다. 피난 시절 병을 얻어 다대포에서 혼자 요양할 때 열네 살 소녀는 들꽃과 산들바람이 곁에 있어 외로움을 잊었다. “고향집 울 안에 피어 있던 그 꽃들, 내 영혼에 붙어 지워지지 않던 들꽃들이지요.” 가슴에 들꽃 한 다발 꽂아두고 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
그가 서울에서 살던 집은 안장산 한쪽에 올라앉은 하얀 집이었다. 건축가 김중업 선생이 지은 집으로 영화 <겨울 나그네>를 촬영한 후부터 ‘다혜네 집’으로 불렸다. 다혜를 흠모하는 총각들이 담 밖을 서성이던 그 집. 뜰 앞엔 수십 미터짜리 능수버들이, 집 뒤로는 그보다 더 키 큰 미루나무가 자라던 그곳에서 할머니 가족은 20여 년을 살았다. 그는 고향 집 뒤란에 피던 들꽃을 그 하얀 집 뜰에 심었다. 사람들이 야생화를 알지도 못하던 1970년대부터 그의 야생화 사랑은 열렬했다. 그 덕에 1987년 내무부가 주최한 전국토공원화대회에서 가정조경대상을 받기도 했다.
애면글면하는 세상살이 대신 오산 서랑동에서의 목가적인 삶을 선택한 할머니. “늘그막에 시골에 내려와 야생화니 나무니 욕심내어 심다 보니 갈퀴손에 거친 얼굴이 되어가지만, 들일이 즐거워 지치는 줄을 모르겠어요. 하루에 12~14시간씩 정원 일을 하는 날도 있어요. 그런 날은 밤에 쓰러지듯 몸져눕지요. 내 귀가 부처님 귀처럼 생겨서 보시를 하라던데, 딴 걸로는 못하고 꽃들에게 보시하는 것 같아요.” 하얀 머릿수건 쓴 채 수줍은 웃음을 머금는다.
역시 남편이 찍은 정원의 가을 풍경. 안홍선 씨는 주로 야생화를 심는다. 그는 ‘자생화’라고 표현하는데, 토종 꽃도 중요하지만 우리 땅에서 자라는 꽃이면 그게 다 우리 꽃이라는 의미란다.
1 그의 집 안은 돈 들인 흔적보다 손때와 시간의 흔적이 더 깃들어 있다. 벽에 걸린 작품은 예수를 생각하며 만든 ‘나를 위하여’.
2, 4 오래된 물건도 맵시 있게 정돈하니 ‘생활 명품’이 된다.
3 2년 전부터 정원 일기를 쓰고 있는데 딸에게 물려주기 위해서다.
밤에 자다가도 ‘어디어디에 꽃이 피었을 텐데’ 싶어서 나와 보고, 아침에도 꽃들이 궁금해 잠옷 차림으로 나왔다가 그 자리에 주저앉아 정신없이 잡풀을 뽑는다. 그렇다고 꽃들을 까다롭게 기르는 건 아니다. 적당히 거름 주고 물은 웬만하면 안 주고, 아주 가물 때나 어쩌다 한 번 주면서 하늘의 일기대로 기른다. “옛날에 우리 집에서 콜리를 키웠는데 동네 개들이 죄다 우리 집에 모여들어 개똥 거름이 꽤 많이 모였어요. 그걸 접시꽃 밭에 뿌렸더니 접시꽃이 하늘을 찌를 것처럼 자라더라고요. 그 옆에 거름 못 먹고 자라는 녀석들은 비실비실 땅에 붙어 있고. 그런데 어느 날 태풍이 와서 그 큰 꽃대들이 다 쓰러졌어요. 한데 그 옆의 비실비실한 녀석들은 대신 옆에서 흘러내려온 빗물 받아먹더니 보기 좋게, 예쁘게, 건강하게, 오래 살았어요. 이게 꽃들이 주는 교훈이죠. 과잉보호하면 꽃들도 비뚤어져 나가는 것 같아요. 꽃의 세상도 사람 사는 세상과 똑같아요.”
그는 이 뜰에서의 하루하루를 정원일지로 정리하고 있다. 아마도 그를 이어 이곳에 살게 될 딸을 위해 남겨두는 정원 지침서 같은 것이리라. “2월 26일. 지난겨울에 미처 걷어내지 못한 마른 꽃대들을 깔끔히 잘라내고 거름을 내기 시작했다. (중략) 3월 30일. 포기 나누기와 잡초 뽑기는 이미 시작되었다. ‘봄바람에/ 꽃다지와 냉이꽃이 나부댄다/ 겨우내 굳어진 가슴을 흔들며/ 작은 꽃 닮은/ 나는 내가 꽃처럼 예쁜 줄 안다’. *냉이는 철분이 많다. 살짝 데쳐서 멸치, 새우, 다시마 가루에 묻혀 주먹 크기로 냉동해놓고 된장찌개나 된장국에 넣으면 별미. 고추장에 묻히면 향긋한 봄맛! *이곳은 골바람이 부는 곳이라 식물들이 일주일 정도는 늑장을 부린다.” 군더더기 없는 문장이 나비처럼 너울대는 일기다. 아마 딸이 나중에 이 일기를 보게 된다면 하늘에서 만나가 쏟아진 기분일 것이다. 이 정원일기야말로 여자에게서 여자로 대물림되는 여자의 인생, 여자의 역사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5 조각 천을 잇는 그의 평화로운 일상.
6 시아버지가 살던 집에 들어와 조금씩 손보고 가꾸며 산 게 10년이 넘었다.
그는 자신의 뜰에 피는 들꽃처럼 아이들을 키웠다. 가정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독립적으로, 스스로 자랄 수 있게 했다. 모든 일을 결정할 때 스스로의 책임이란 생각을 먼저 갖게 했고, 자신의 주장대로 아이를 살게 하지 않았다. 그저 들꽃을 키우듯 가만히 지켜봐주기만 했다. 어린 딸은 자유와 자립심을 얻는 대신 가끔 실수도, 섭섭한 마음도 품었을 것이다. 이제 제 자식 거느린 어미가 된 어린 딸은 어머니의 그 교육이 자연의 크나큰 포용력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었음을 안다. 지금도 어머니는 일기에서 딸에게 이렇게 이야기한다. “딸아, 그늘에서 더 빛나는 얼굴이어야 한다. 꽃처럼”. 언젠가 딸이 이 뜰을 물려받으면 모녀는 달이 기울도록 뜰을 거닐면서, ‘사랑하며 사는 속 깊은 즐거움’을 이야기할 것이다.
내가 행복할 수 있었던 건 자연을 모방했기 때문 이 할머니는 그 안을 뒤지면 달도 별도 옛날이야기도 줄줄이 끌려 나올 것 같은, 보물 주머니 같은 사람이다. 자신이 잇던 그 조각 이불이 ‘퀼트’인지도 모른 채 몇십 년 전부터 바느질을 했다. 버려진 천들이 그의 손을 거치면 체열이 담긴 ‘헝겊그림’으로 변했다. 그는 삶에서 얻은 이야기를 고운 천 위에 부려두었다. 딸이 결혼 첫날밤 입었던 옷의 레이스로 만든 ‘춤의 메들리’엔 춤추듯 남편과 황홀하게 살라는 마음을 담았다. 남편의 65세 생일엔 65송이의 꽃다발을 바느질로 그리고 ‘당신께 이 꽃다발을’이라 이름 붙였다. 병약한 아내와 함께 살며 그 아내를 꽃처럼 피어나게 해줘 감사하다는 마음을 담았단다. 월드컵의 성공적인 개최를 기원하며 한반도 모양의 태극 소녀로 바느질한 ‘월드컵 전야제’, 실향민으로서 통일의 기원을 담은 ‘얼마나 아픈지’도 있다. “온갖 무늬와 색깔의 천을 뒤져보는 것만으로도 즐거운 나의 스토리 퀼트지요. 그 안에는 내 가족과 자연의 속삭임이 배어 있어요. 가장 아름다운 나의 유산이지요.” 딸은 회화를 능가하는 이 ‘스토리 퀼트’를 한데 모아 개인전을 열어주었다. 밤마다 어머니가 쓴 일기와 글을 모아 <사라져가는 연습… 물안개처럼 이슬꽃처럼>이란 책으로도 묶어냈다.
(왼쪽) 딸이 결혼 첫날밤 입었던 옷의 레이스로 만든 ‘춤의 메들리’. 딸과 사위가 춤추듯 황홀하게 살라는 마음을 담았다. 이처럼 그의 퀼트는 이야기가 가득 담긴 ‘스토리 퀼트’다.
1 그의 뜰에는 들꽃뿐만 아니라 밤나무, 호두나무 같은 유실수에 식용 작물까지 5백여 종의 식물이 자라고 있다.
2 호수 옆에 자리잡아 수분 공급이 잘되기 때문인지 이 뜰의 꽃들은 유난히 키 크고 실하다.
3 병약한 자신을 꽃처럼 피어나게 해줬다는 남편과 함께. 남편은 평생 밥상 차리느라 고단했던 아내가 편히 자신의 시간을 가지도록 저녁밥을 도맡아 한다.
4 8월의 정원에서.
그 흔한 신용카드 한 장 없고, 스무 해 넘게 입은 옷도 쉽사리 버리지 않고, 보석을 사본 적도 없으며, 화장품은 선물 받으면 그걸로 바르고, 미장원에도 안 가고, 손님은 늘 집에서 대접하며, 유행이라곤 따르지 않는 이 할머니. 한 세기 전 아낙처럼 살지만 그 삶이 충분히 곱다. “그럼에도 내가 충분히 화려하고 즐거울 수 있었던 건 자연을 모방했기 때문”이란다. 자연의 품성을 닮아 그가 갖게 된 안분지족, 소박함 그리고 순진함…. 들꽃의 삶을 모방하며 한순간도 그냥 보내지 않고, 몸짓 하나도 허투루 하지 않고 그렇게 살아가리라, 이른 아침 풀밭을 누비는 달팽이처럼 세상을 조용히, 느릿느릿 살겠노라 다짐한다. 그는 이 호숫가에서 “물안개처럼 이슬꽃처럼 사라져가는 연습” 중이란다. 이 마음이 그의 시에 담겨 있다. “화남호에 물안개가 살고 있습니다/ 햇살이 퍼지면 뽀야니 사라집니다// 아침 마당에 이슬이 살고 있습니다/ 햇살이 퍼지면/ 눈부시다 사라집니다// 호반에는 귀가 멀어가고 눈이 멀어가는// 고라리 부부가 살고 있습니다/ 해가 지고 또 지고/ 속절없이 해만 흐르고 있습니다// 물안개처럼/ 이슬꽃처럼/ 사라져가는 연습을 하고 있습니다”(‘사라져가는 연습’) 소박한 문장이지만 눈이 아닌 가슴과 기억으로 읽게 되는 시.
이 뜰에서의 하루는 짧았다. 좋은 때는 늘 짧듯이. 이 뜰의 풍경에 넋을 빼앗기니 해가 기울도록 일어서지지 않는다. 붉디붉은 꽃봉오리 탓이고, 집 앞 물가에서 노니는 흰 날개의 새 한 마리 탓이다. 마지막 햇살이 연한 향기를 풍기며 이 풍경 안으로 스며든다. 이 집 뜰에 오후의 평화가 차오른다.
(왼쪽) 그는 이 뜰에서의 삶을 ‘물안개처럼 이슬꽃처럼 사라져가는 연습’이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