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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악양골에 산 지 10년, 사진 작가 이창수 씨의 남도 여행 전라도와 경상도를 가로지르는 섬진강 줄기 따라
섬진강 줄기 따라 이어지는 하동과 구례는 은어 낚시와 사찰 기행이 한창이다. 지리산 악양골에 ‘중정다원’이라는 이름의 집을 짓고, 발효차를 만들며 유유자적 살고 있는 자연인 이창수 씨가 부처님 손바닥 들여다보듯 남도 여행길을 제안한다.


구례는 전라남도이고, 하동은 경상남도이다. 다 ‘남도’다. 섬진강은 전남과 경남을 구분하지 않고 남도 땅을 두루 적신다. 전북 진안군 백운면에서 시작해 구례에서 제 모습을 갖추고 하동을 거쳐 남해에 이른다. 자갈밭도 지나고, 습지도 만들며 논바닥을 적시고, 인간에게 적선도 하면서 서에서 동으로 흐른다. 지리산과 백운산이 만든 큰 협곡을 지날 때는 한껏 품을 벌린다. 구례 땅에 와서야 넉넉한 품을 갖추는 것은 지리산을 끼고 돌기 때문이다. 지리산 곳곳에 흩어진 계곡에서 모인 맑고 깨끗한 물이 섬진강을 풍부하게 한다. 큰 산은 깊은 계곡을 만든다. 지리산에서 남쪽으로 흐르는 피아골계곡과 화개계곡은 큰 계곡으로, 유독 맑고 깊다. 이 계곡물이 섬진강에 몸을 더한다. ‘섬진강’과 ‘지리산’이 한 몸처럼 엮인 이유다. 섬진강은 곳곳에서 모습을 달리한다. 크고 작은 바위가 길을 막으면 급하게 길을 바꿔 거센 여울을 만든다. 바위는 물살에 깎이고, 물살은 바위에 부딪혀 깨지며 거품을 내뱉는 여울목은 대지와 강의 교접지다. 지리산에서 쏟아낸 바위가 많은 구례의 섬진강엔 흰 거품을 내뿜으며 흐르는 여울목이 많다. 고단한 길을 지나 내공이 쌓인 강은 품을 넓히며 고요히 흘러간다. 품이 넓은 강은 곳곳에 고운 모래를 쌓아 모래밭을 만든다. 강이 넓으면 구름이 가까이 내려앉는다. 너른 백사장에 깔린 낮은 구름은 하늘과 강의 평화로운 만남이다. 너른 백사장을 곳곳에 펼치고 있는 하동의 섬진강은 한결 여유롭다.


1 화개다리 밑에서 은어 떼를 찾아다니는 놀림낚시꾼.


2 물안개 오르는 피아골 여울목.


3 무딤이 들판의 두 그루 소나무. 전국 각지의 아마추어 사진가들이 즐겨 찾는 곳이다.

차 한잔으로 속세의 번뇌를 씻고 다슬기탕으로 속을 채우고 구례에서 동쪽으로 하동을 향하는 19번 길은 지리산과 섬진강을 따른다. 진짜배기 섬진강은 19번 국도를 끼고 들어서야 볼 수 있고, 느낄 수 있다. 그 들머리에 화엄사가 있다. 큰 산은 큰 강을 만들 듯, 큰 절도 만든다. 화엄사는 1천5백여 년 전에 인도 스님인 ‘연기 조사’가 만든 천년 고찰이며, 시대를 꿰뚫는 고승들에 의해 화엄 사상을 널리 펼친 절이다. 노고단 자락 깊숙이 자리한 화엄사는 도처에 시간의 흔적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유물을 품고 있다. 각황전과 석등, 사사자삼층석탑은 역사적, 종교적, 미학적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으니 빼먹지 말고 인사를 드려야 한다. 그리고 대웅전 뒷길로 들어서 산죽나무 부대끼는 오솔길을 지나야 눈에 들어오는 구층암도 꼭 들러야 한다. 구층암에는 자연주의 승방이 있다. 다듬지 않은 두 그루의 모과나무를 기둥으로 쓴 승방을 보면 옛 목수의 기발한 철학이 느껴진다. 야생 차 밭에 둘러싸인 구층암은 차 인심이 후하다. 차에 흠뻑 빠진 구층암 스님이 계시면 차를 얻어 마시면 되고, 스님이 없어도 다실은 항상 열려 있으니 스스로 차를 마실 수 있다. 대숲에 부는 바람 소리를 벗 삼아 향기로운 차를 마시는 여유로움은 길을 나선 이라면 챙겨야 할 의무다. 한잔의 차로 속세의 번뇌를 씻어내고 나면 속이 헛헛해지게 마련이다. 산나물로 속을 채우려면 화엄사 입구 주차장 근처에 있는 ‘지리산식당(061-782-4054)’이 제격이다. 솜씨 좋은 전라도 아주머니의 손맛이 가득 담긴 한 상이 나온다.
화엄사를 벗어나 19번 길을 따라 동쪽으로 향하면 구례 운조루를 지나 간전다리에 이른다. 간전다리는 섬진강을 가로질러 지리산과 백운산을 잇는 첫 번째 다리다. 간전다리의 이른 아침은 강 안개를 뚫고 솟아오르는 여린 해를 볼 수 있고, 늦은 저녁은 섬진강을 붉게 물들이며 내려앉는 기특한 해넘이를 볼 수 있다. 혹 섬진강에 사는 민물고기가 궁금하다면 간전다리 옆에 있는, 유리로 치장한 ‘섬진강 어류 생태관(061-781-3665)’에 들를 것. 비록 죽은 표본일망정 궁금증은 덜 수 있다. 섬진강이나 계곡에 살고 있는 다슬기가 궁금하다면 토지면 소재지에 있는 ‘섬진강 다슬기(061-781-6756)’ 식당에 들러 맑은 다슬기탕을 맛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네 마리 사자가 삼층탑을 받들고 있는 화엄사의 사사자삼층석탑.

‘꽃피는 마을’ 화개에서 즐기는 은어 놀림낚시 시원한 강바람이 그립다면 섬진강과 피아골계곡이 만나는 외곡리 검문소에서 강으로 내려가 보자. 좁고 깊은 피아골은 오랜 세월 계곡물을 쏟아냈다. 바람도 계곡 따라 쏟아져내리는 이곳은 항상 서늘하다. 계곡물에 닳고 깎인 강돌 또한 무수히 쌓여 있다. 서늘한 바람과 세월의 흔적을 몸으로 이야기하는 강돌 그리고 그 곁을 스치는 강물의 메아리는 한여름일수록 더욱 시원하다. 적당히 둥그스름한 돌에 앉아 계곡물에 발을 담그면 세상 시름이 사라진다. 스님들이 가부좌 틀고 앉아 좌망 坐忘에 빠지는 것과 견줄 만하다.
전라도 사람, 경상도 사람 모두 모여 장을 본다는 화개장터는 그저 노랫말로만 남아 있고, 섬진강을 가로지른 이 남도대교는 전라도와 경상도에서 반반씩 돈을 내 근래에 놓았다. 피아골은 전라도의 끝이고, 화개골은 경상도의 시작이다. 그 경계에 ‘꽃피는 마을’ 화개가 있다. 전라도의 간전다리는 아침저녁에 좋고 경상도의 화개다리는 낮에 좋다. 다리를 높이 세운 덕에 강바람이 항상 거세고 섬진강을 보다 멀리 관망할 수 있다. 화개다리 근처에서는 긴 장대로 은어를 낚는 놀림낚시를 많이 한다. 씨은어로 텃세를 부리는 은어를 낚는 놀림낚시는 방법은 치사스러운 데가 있지만 기발하다. 씨은어 꼬리에 낚싯바늘을 꿰어 은어 떼가 있는 곳에 던지면 자기 영역을 차지하고 있던 은어가 씨은어를 사납게 공격한다. 이때 낚싯바늘에 걸린 은어를 낚아채는 게 놀림낚시다. 뙤약볕도 불사하며 종일 강을 헤매고 다니는 것을 보면 재미가 어지간한 모양이다. 그저 내가 알고 있는 재미는 잡은 은어를 회 떠 먹는 거다. 화개장터 근처 식당에는 대부분 은어회를 판다. 양식 은어와 자연산 은어가 섞여 있으니 자연산 은어를 먹으려면 세심한 노력이 필요하다.

차디찬 화개계곡에서 즐기는 물놀이
화개장터에서 북쪽으로 계곡을 따라 가면 그 유명한 ‘쌍계십리 벚꽃길’을 지나게 된다. 꽃 피는 봄엔 벚꽃 터널이고, 무성한 여름엔 벚나무 그늘 터널인데, 그 그늘 터널 끝에 쌍계사가 있다. 쌍계사는 1천3백여 년 전에 대비와 삼법 두 스님이 산문을 열고, 그로부터 1백 년 뒤에 진감 국사가 대찰 大刹로 다시 일으켰다. 구례 화엄사와 하동 쌍계사, 화엄사 구층암과 쌍계사 국사암이 늘 비견된다. 쌍계사를 지나 솔잎 향 가득한 숲길을 오르면 이내 국사암이 나타난다. 이곳은 호젓한 명당으로, 산신각 계단 끝자락에 앉기만 해도 선계에 들어선 듯한 착각에 빠진다.
쌍계사와 국사암에서 마음을 씻었으면 화개계곡에서는 몸을 씻으면 된다. 여름엔 뭐니 뭐니 해도 역시 물놀이가 최고다. 물놀이를 즐기기엔 화개계곡이 으뜸인데, 골이 깊어 물이 차고 수량도 풍부하다. 한여름에는 도처에서 몰려든 사람들로 북적이므로 번잡함이 싫다면 약간의 수고로움을 감수하고 한적한 계곡을 찾아 더위를 피하면 된다. 화개골의 먹을거리는 간단하다. 쌍계사 석문 입구에 있는 ‘단야식당(055-883-1667)’에서 사찰 국수를 먹으면 된다. 버섯 가루와 들깨를 갈아 넣은 뜨끈한 국물에 만 메밀국수다. 국수를 좋아하는 스님들의 몸보신용이라 사찰 국수라는 별칭이 붙었다. 일체의 조미료를 쓰지 않는 주인장의 까칠한 친절함이 반찬에도 담겨 있다. 잠자리는 화개골 입구에 있는 ‘팔베개 펜션(055-883-7779)’이나 부춘리에 있는 ‘토담농가(055-884-3741)’가 좋다.


1 들깨 국물의 텁텁함과 고추 초절임의 새콤함이 어우러진 사찰 국수.


2 섬진강을 따르는 19번 길에는 신우대나무와 버드나무, 녹차밭을 흔히 볼 수 있다. 신우대나무가 강바람에 흔들린다.

슬로 시티, 악양을 거닐다 화개골을 지난 섬진강은 강폭이 너른 악양 땅을 적시며 흐른다. 강의 하류는 항상 퇴적물이 쌓이게 마련인데, 긴 세월 동안 퇴적물이 쌓이면 기름진 땅이 된다. 악양의 ‘무딤이 들판’이 그러하다. 제방을 쌓기 전에 섬진강 물이 들판을 드나들어 기름진 땅이 됐고, ‘물이 드는 들판’이라 해서 ‘무딤이 들판’으로 불린다. 무딤이 들판은 ‘평사리 들판’으로 불르기도 한다. 무딤이 들판과 그 한가운데 서 있는 두 그루의 소나무는 악양의 상징이다. 박경리 선생이 살아생전 한 번도 길을 밟지 않은 악양 땅을 소재로 길고 긴 소설 <토지>를 쓸 수 있었던 것도 악양이 만석꾼 지주가 나올 만한 비옥한 땅이기 때문이다. 평사리 마을은 원래 돌담 길로 유명하다. 감나무 그늘 드리운 돌담 길, 마삭줄 덩굴 뒤덮은 돌담 길, 이끼 낀 돌담 길을 따라 거닐면 옛 향수에 젖어드는 호사를 누릴 수 있다. 혹 시간이 나면 돌담 길 어디엔가 있는 ‘지리산 학교’에서 차 한잔 얻어 마셔도 좋다. 마을 사람에게 길을 물으면 알려줄 것이다. 지리산 학교는 너나 구분 없이 차를 내준다. 차를 마시며 이야기도 나누고, 꽃밭도 즐기며, 편안하게 지낼 수 있는 지역 주민들의 문화 예술 학교다. ‘돋을볕 마을’ 악양은 느리게 사는 삶을 지양하는 ‘슬로 시티’로 지정됐다. 느리게 사는 악양 땅을 흐르는 강물 역시 느리다. 악양벌을 지난 느린 강물은 모래밭을 두껍게 한다. 섬진강 모래톱은 바람이 무늬를 만들고, 그 위에 찍힌 물새들의 발자국 때문에 더욱 아름답다.
악양의 평사리 공원은 섬진강 강변인 19번 길에 붙어 있어 접근성도 좋다. 캠핑도 하고, 운동도 즐기고, 낚시도 하고, 재첩잡이도 할 수 있다. 아름답게 보이는 섬진강 풍경 속으로 들어가 가장 잘 뛰놀 수 있는 곳이다. 놀 거리가 다양하지만 그중 으뜸은 넓고 긴 모래밭을 맨발로 거닐며 강과 바람과 새와 친구 하기다. 모래밭에 외로운 발자국을 남기면 강바람이 훨훨 모래를 날려준다. 악양 들머리의 ‘개치마을’에는 구재봉 활공장 가는 길이 있다. 언덕을 끝까지 오르면 무딤이 들판과 섬진강, 백운산, 지리산이 한눈에 ‘확’ 들어온다. 지나온 길을 되짚어볼 수 있고, 가야 할 길을 알 수 있는 시원함이 막힌 가슴도 ‘확’ 뚫어준다.


3 붉은 배롱나무는 여름 꽃이다. 한여름의 뙤약볕에서 100일 동안 피고 진다 해서 목백일홍으로도 불린다.


4 강의 이쪽과 저쪽에 줄을 묶어 강을 건너다니는 줄배. 피아골 계곡 입구에 있다.

바다로, 하늘로, 땅으로 이어지는 섬진강 열린 마음으로 섬진강의 끝자락으로 향한다. 벚나무 터널 길은 시원하고, 햇볕에 반짝이는 플라타너스 잎은 싱그럽게 춤춘다. 꽃과 열매를 모두 털어낸 먹점마을의 매실나무도, 누런 봉투에 쌓여 익어가는 선장마을의 배나무를 지나면 오래 묵은 소나무밭이 나온다. 하동 송림이다. 하동 송림은 2백60년 전에 강바람과 모래바람을 막으려 섬진강변에 심은 소나무 방풍림이다. 7백 그루 이상의 울창한 노송과 흰 백사장, 푸른 섬진강 물결은 섬진강으로 흘러드는 뭇사람들의 휴식처다. 피톤치드를 실컷 마시며 걷다 보면 하동 송림의 끝에 상저구마을 포구가 나타난다. 재첩잡이 배가 드나드는 포구다. 하동 섬진강은 재첩으로 유명한데, 하동에서는 ‘갱조개’라 부른다. 재첩은 민물조개인데, 섬진강 상류에는 다슬기가 살고, 하류에는 재첩이 산다. 조수 간만의 차가 큰 하동포구 일대의 재첩은 맛과 영양이 풍부하다. 뽀얀 국물과 잘게 썬 부추의 궁합은 지난밤 술에 절어 고생한 간 해독에 최고다. ‘입추 전 재첩은 간장약’이라는 말이 괜한 말이 아니다. 재첩은 강바닥을 긁어 잡는데, 몸의 절반을 강에 담근 채 사람 두 키 정도의 장대에 복조리 모양의 쇠스랑을 단 ‘거랭이’를 뒷걸음으로 끌어당겨 잡는다. ‘거랭이’를 들어 올리면 모래는 빠져나가고 강돌과 재첩만 남는다. 체를 쳐 강돌과 재첩을 분리해야 고된 재첩잡이가 마무리된다. 멀리에서 보면 섬진강과 어우러진 한 폭의 그림 같지만 속내를 보면 가슴 시린 삶의 모습이다. 이로써 섬진강 기행이 마무리된다. 재첩은 섬진강이 바다를 만나는 어귀에 산다. 그러므로 재첩이 섬진강의 끝이다.
계곡에서 흐른 물이 강이 되고, 바다가 되는 것을 보았다. 강은 굽이돌아야 강이고, 굽이돌면 또 다른 모습을 드러내는 게 강이다. 대지는 몸의 일부를 강에게 내주고, 강은 대지에 사는 생명에게 젖줄을 나눠준다. 나무와 풀과 꽃은 강과 대지의 뿌리를 통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다. 그늘진 바위 밑에서 솟아난 샘물이 산이 내준 길을 따라 흘러내리고, 사방의 계곡이 모여 어느새 강이 되고 바다와 한 몸이 된다. 강은 계곡의 현재고, 바다의 과거다. 그 한가운데에 섬진강이 있다.

이창수 신문사와 잡지사 사진기자로 일하다 2000년 지리산으로 내려갔다. 그는 현재 악양골에서 녹차를 만들며 매실과 감나무 농사를 짓고 있다. 악양 지역 주민들의 문화 예술 학교인 ‘지리산 학교’에서 사진반 선생도 하고, 순천대학교 사진예술학과 겸임 교수로도 재직 중이다. <지리산에 사는 즐거움>(터치아트), <내가 못 본 지리산>(학고재) 을 출간했다.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0년 8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