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형색색의 야생화가 자연스럽게 어우러져 향기로운 꽃 대궐을 이룬 정구선 대표의 정원.
강원도 화천에서 아버지와 함께 꽃과 나무를 가꾸던 정구선 대표(<행복> 2001년 8월호 소개)가 재작년 가을 이곳 가평에 새로운 세컨드 하우스를 짓고 또 하나의 들꽃 세상을 꾸미기 시작했다. 그가 지난 20년 동안 ‘꽃에 미쳐서’ 컬렉션한 야생화들이다. 초등학교 1~2학년 시절, 다른 아이들 공기놀이하고 고무줄놀이할 때 그는 꽃을 심고 가꾸며 놀았다. 마당에 제비꽃을 심으면 교사였던 아버지 때문에 1년 있다 이사가고, 이사한 집에 제비꽃을 옮겨 심으면 이듬해에 또 이사가고…. 그래서 일찍부터 넓은마당에 꽃을 실컷 심고 가꾸는 것이 소망이 돼버렸다. 가드닝이 어느 순간 갑자기 취미가 된 게 아니라 어릴 적 부터의 꿈이었다. 가슴속에 늘 그 꿈을 간직하고 살던 정구선 씨는 스물여덟에 사업을 시작한 이후 외국 출장을 갈 때마다 유명 관광지나 쇼핑센터 대신 남의 집 정원을 구경하며 돌아다니는 게 일이었다. 어떤 꽃이 예쁜지 구경하다가 꽃씨를 몰래 받아 들여와 심거나, 꺾꽂이할 수 있는 것은 줄기를 잘라 휴지에 싸서 물에 담근 채 갖고 들여와 옮겨 심곤 했다. 현대판 문익점인 셈이다. 우리나라에 없는 야생화는 대부분 그런 식으로 늘렸다. 본래 불법 행위지만 원종 보호 차원에서 종자 수출을 금지하기 때문에 그런 식으로 우리나라에 유입하고, 또 우리나라 식물도 그런 경로로 유출되는 게 현실이다.
1 뒷산을 따라 오르다 내려다본 집과 마당. 2 야산을 일궈 각종 산나물과 야생화를 심고 가꾸는 정구선 대표.
“국가가 달라도 위도가 같은 지역에 가면 똑같은 식물을 볼 수 있어요. 네덜란드의 튤립도 우리나라에서 잘 자라고요. 그렇게 우리 땅에 심어 놓고 즐기면 우리 것이 되는 거죠. 글로벌 시대에 우리 꽃만 따지는 것도 바람직하지는 않고, 유럽까지 안 가고도 누구든 튤립을 즐길 수 있으니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요? 일본인들은 우리나라 지리산에서 캐간 노루귀를 여러 품종으로 육종해 전 세계로 수출하는데, 그 수출액이 일본 전체의 난 수입액보다 더 많아요. 원종은 우리나라인데 말이죠. 우리나라 원추리가 유럽으로 건너간 이후 흰색밖에 없던 백합의 컬러가 무척 다양해졌어요. 역설적으로 우리는 그걸 로열티 지불하고 수입하고 있어요. 어리석게 뒷짐만 지고 있다가 생긴 결과지요.”
그의 뜰에는 잔디 싹도 안 올라오는 2월 말부터 복수초, 노루귀, 처녀치마, 히아신스, 수선화, 앵초 등이 예쁜 얼굴을 내민다. 겨울 추위에 잘 견디는 화초 위주로 심기 때문에 그냥 그대로 뜰에서 겨울을 나고, 꽃을 피운 뒤 지금은 부지런히 씨앗을 맺고 있다. 이른 봄부터 늦가을까지 내내 꽃이 지지 않게 하려면 화단에 꽃이 비는 자리가 없도록 개화 시기, 색깔, 키, 성질 등을 철저하게 고려해 계획적으로 심어야 한다. 꽃 자리를 정할 때는 양지를 좋아하는지 음지를 좋아하는지를 파악하는 게 우선. 또 추위에 약한 것은 보일러실 가까운 곳이나 바람을 막을 수 있는 벽 쪽에 심고, 돌에 붙어살던 것은 돌에 붙여서 가장 자연스럽게 키운다. 지금이야 떡잎만 봐도 꽃 이름을 맞출 정도로 야생화 도사가 됐지만 처음에는 실수도 많이 했다. 겨울에 얼려죽인 것도 한두 개가 아니다. 특히 한삼덩굴(자라면서 모든 식물을 감아 죽이는 식물로 번식력도 왕성하다)만 보면 지금도 가슴이 철렁한다. 한삼덩굴을 구절초인 줄 알고 여기저기 옮겨 심었다가 등골이 오싹해진 웃지 못할 기억 때문. 그날 이후 어디를 가든 한삼덩굴이 눈에 띄면 씨가 떨어지기 전에 모조리 뽑아주고야 만다. 정 대표는 설명이 무척 상세하게 나와 있는 일본의 야생화 전문 잡지를 구독하기 위해 일본어도 배웠다. 그렇게 적극적으로 배우고 익힌 결과, 지금 그의 야생화 정원은 매일 서로 다른 꽃이 피고 지면서 날마다 새로운 그림을 그려낸다.
1 빈카, 2 삼지구엽초, 3 아르메니아(핑크).리메리스(화이트), 4 자란, 5 할미꽃, 6 호랑이발톱바위솔, 7 튤립, 8 하늘매발톱, 9 각시붓꽃, 10 복주머니난(보호식물), 11 꽃양귀비, 12 금낭화, 13 으아리(클레마티스), 14 아네모네
“받는 재미도 있지만 주는 행복이 더 크다는 걸 전원생활을 하면서 느껴요. 가꾸는 게 힘은 들지만 꽃 한 포기, 나물 한 줌을 가꿔서 여러 사람에게 선물하면 맛있는 음식 대접받는 것보다 훨씬 행복해합니다”라고 말하는 그는 이곳으로 이사한 뒤 집 주변 야산에 터를 고르고 고사리, 취나물, 곰취, 당귀, 명이나물, 참나물, 우산나물, 물래나물, 다래순 등 열 가지 이상의 나물 씨앗과 수선화, 할미꽃, 천남성, 산수국 등 야생화 씨앗을 고르게 섞어 심어 산자락에 번지게 하고 있다. 길이 없던 곳의 잡목을 베어내고 밤나무, 체리나무 같은 숲에서 잘 자라는 유실수를 계속 심는 중. 많은 이들이 산길을 걸으면서 다양한 산나물도 뜯고, 예쁜 야생화도 보고, 과실도 따 먹으며 풍요로움과 아름다움을 느끼게 하려는 생각에서다. 고속도로 방음벽 같은 금속 창호 공사 및 조경 식재, 조경 시설물 설치 전문 기업 건교산업의 CEO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는 그에게 꿈은 따로 있다.
“일본인 건축가 안도 다다오로 인해 보잘것없던 작은 섬 나오시마가 세계적인 관광지로 거듭났습니다. 우리나라는 사계절이 뚜렷해 계절마다 즐길 수 있는 꽃의 종류가 무척 많아요. 저는 그게 기름보다 더 소중한 자원이라고 생각해요. 저희 집을 샘플 하우스 삼아 많은 이들이 와서 보고 생각의 전환을 가졌으면 좋겠어요. 작은 땅이라도 자연과 어우러진 예쁜 뜰을 가꾸는 걸로. 이것이 확산돼 70퍼센트가 산인 우리나라에 곳곳에 뜰이 조성되면, 분명 세계적인 관광국이 될 겁니다. 외국인들이 아기자기하고 한국적인 것을 보기 위해 분명히 찾아올 겁니다.” 집에서 내려오는 길가 담을 따라 담쟁이가 오르고 있다. 담쟁이가 다 감고 올라가면 그 위를 흰색, 분홍, 자주색 으아리가 수놓으며 벨벳 커튼처럼 뒤덮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