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군산세관은 100여 년 전 벨기에에서 수입한 붉은 벽돌로 지은 서양식 건물이다. 서울역사, 한국은행 본점과 함께 독특한 근대 건축 양식으로 꼽힌다. 2 군산시 월명동 8-19번지의 적산 가옥. 온통 갈대밭과 갯벌 뿐인 작은 어촌이던 이곳은 개항 이후 ‘군산 속의 일본’이 되었다. 3 일제가 물류 이동을 위해 중앙로와 해망동 사이에 만든 해망굴. 4 새 단장을 마친 나가사키 18은행은 젊은 아티스트의 창작 공간으로 사용할 예정이다. 5 영화동 12-6번지는 1층을 상업 공간으로 변형하고 2층은 적산 가옥을 그대로 보존한 독특한 건물.
울고 싶은 반가움. ‘군산 근대 문화 거리’의 첫인상이다. 적산 가옥의 가파르게 뻗은 지붕과 격자무늬 창, 근대 서양식 건물의 다부진 적벽돌에서 그 시절의 냄새가 났다. 일본의 압력으로 개항해 건축 구조부터 집안 잡동사니까지 일색 日色이 스미던 그 시절. 물론 압제의 흔적은 해방 이후 현대화를 겪으며 우리 땅에서 도망치듯 사라졌다. 하지만 군산은 사정이 좀 다르다. 호남의 쌀이 죄 이곳을 통해 일본으로 수탈되었고, 일확천금을 노린 일본인들은 비옥한 군산항으로 몰려들었다. 서울 못지않게 일본 근대 문화가 깊이 뿌리내린 지역이 바로 군산이다. 그러나 도시화 계획에서 도태되어 그 흔적은 그대로 잠들고 말았다.
흘러간 시절이긴 매한가지나, 군산 근대 문화 거리는 어느 한옥 마을의 정취와 달랐다. 한옥이 당당하고 늠름하다면, 군산 거리는 애달프고 처연하다. 우리가 걸어온 자취이긴 하나 가능하다면 덮어두려 했으니까. 그래서 와락 반가웠지만 울고 싶었다.
채만식은 그 무렵의 군산을 소설 <탁류>에 풀어냈다. “이렇게 에두르고 휘돌아 멀리 흘러온 물이, 마침내 황해 바다에다가 깨어진 꿈이고 무엇이고 탁류째 얼러 좌르르 쏟아져버리면 강은 다하고, 강이 다하는 남쪽 언덕으로 대처(시가지) 하나가 올라앉았다. 이것이 군산이라는 항구요, 이야기는 예서부터 실마리가 풀린다. 그러나 항구라서 하룻밤 맺은 정을 떼치고 간다는 마도로스의 정담이나, 정든 사람을 태우고 멀리 떠나는 배 꽁무니에 물결만 남은 바다를 바라보면서 갈매기로 더불어 운다는 여인네의 그런 슬퍼도 달코롬한 이야기는 못된다.”
그 시절은 탁하디탁한 강물처럼 한 치 앞을 내다보기조차 고단한 시간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어디 달코롬한 맛만 맛이던가. 쌉싸래한 맛도 시간이 흐른 후엔 그립기 마련이다. 선선한 시선으로 군산 근대 문화 거리를 속속 들여다보고 싶다. 마침 새만금 방조제 전면 개통을 맞이해 군산시가 나서서 근대 문화의 귀한 의미를 재조명하고 있다. 지난한 겨울을 난 이곳은 5월의 제철을 맞았다. 1백여 년 만의 약동이다.
영원한 수탈을 확신하며 벨기에산 적벽돌로 세관을 짓고 ‘뜬다리 부두(조수 간만의 차로 수위가 달라질 때마다 올라갔다 내려가는 다리)’ 근처부터 휘이 걷기 시작했다. 이곳 군산 내항 일대가 개항 이후 가장 번성한 ‘원도심’이다. 뜬다리 부두의 임무는 당시 준공식에 참가한 사이토 총독의 외마디 경탄에서 드러난다. “오, 고메노 군산(쌀의 군산)!” 동네 이름이 ‘장미 藏米동’인 것은 장미가 곱게 피어서가 아닌, 수탈한 쌀이 산더미처럼 쌓였다 해서 붙은 것이다. 내항 일대는 유례없이 번영했지만, 조선 민중은 궁폐해졌다. 일본인은 차지고 구수한 조선 쌀 수백만 석을 오사카로 실어 가면서, 값싼 안남미와 콩깻묵을 들여와 우리에게 팔았다.
그 영화의 상징이 뜬다리 부두 앞에 있는 조선은행(군산시 장미동 23)이다. 1923년에 2층 건물이면서도 4층 높이로 장대하게 지었다. 그러나 해방 후 술집과 유흥업소로 사용하다가 10여 년 전 화재로 내부가 불탔다. 현재는 ‘PLAYBOY 나이트’ ‘뉴욕뉴욕 락카페’ 간판이 타다 만 성냥개비처럼 붙어 있다. 권력도, 유흥도 허물만 남았다. 현재 복원 공사에 들어가 조만간 ‘근대 과학 전시관’으로 시민을 맞이할 예정이다.
조선은행을 등진 채 쭉 뻗은 대로(해망로)를 따라 오른쪽으로 걷다 보면 옛 관공서들이 차례로 나온다. 나가사키 18 은행(군산시 장미동 32)은 일본으로 미곡을 반출하고 토지를 강매하기 위한 목적으로 1907년 설립한 금융 기관이다. 군산세관(군산시 장미동 49-38)은 아담한 붉은 벽돌 건물로 곱게 빛바랜 외관이 예뻐서 한눈에 들어온다. 1908년 벨기에에서 공수한 붉은 벽돌로 지은, 고딕과 로마네스크가 섞인 ‘일본식 서양 건축’의 전형이다. 군산의 문화・관광 해설사 고하영 선생은 “일본이 세관을 공들여 지은 것은 조선을 영원히 강점하리라 확신했다는 증거”라고 설명했다. 현재는 옛 군산의 자료 사진 등을 전시하는 호남 관세 전시관으로 쓰며, 문화・관광 해설사가 상주해 군산에 대한 생생한 안내를 받을 수 있다.
걸음을 멈추지 못하고 골목을 에돌아가는데 관공서가 도열한 해망로를 건너면 주택가가 펼쳐진다. 장미동, 영화동, 신흥동, 월명동, 금동 일대에는 개항 이후 지은 일본식 적산 가옥이 1백여 채 남아 있다. 상당수는 이미 원형을 찾기 힘들 만큼 변형된 상태고, 20여 채는 한눈에 보기에도 일본식 구조를 그대로 갖추고 있다.
신흥동은 지주와 부유층이 거주하던 동네다. 일본인 포목상이 살았던 히로쓰 가옥(군산시 신흥동 58-2)이 그 위용을 기억하고 있다. 1925년에 지은 2층짜리 대규모 목조 주택으로, 일본 전국 시대 사무라이 가옥의 형태를 따랐다. 일본식 정원도 꾸며져 있다. 영화 <장군의 아들> <타짜> 등의 배경으로도 유명하며 대대적인 보수 공사를 마치고 5월 중 다시 문을 연다.
그 밖의 적산 가옥은 드러나지 않은 채 시민의 거주지로 쓰고 있어서 유심히 살펴봐야 한다. 어떤 가옥은 지붕만, 어떤 집은 2층 목조 주택의 골조만 남아 있다. 이곳에서는 골목을 기웃기웃해도 수상쩍게 보지 않는다. 오히려 “○○번지의 일본식 주택을 찾는 것이요?” 하며 정육점 사장님이 먼저 물어본다. 예부터 건축학도나 역사학도들이 더러 다녀갔기에 주민들은 이방인을 보아도 으레 그러려니 한다. 그뿐이랴. 이게 다 이곳 어르신들이 인정 많고 인심 푸짐한 덕분이리라. 삼거리 구멍가게 아저씨의 벙싯 웃는 그 얼굴에서 이미 느꼈다. 이런 덤은 얼마 만에 얻어보는 것인지.
마음이라는 덤에 속이 든든해졌다. 군산을 그리워하며 쓴 안도현의 시가 발길에 채는 기분이다. “군산 째보선창 선술집에서 막걸리 한 주전자 시켰더니 병어회가 안주로 나왔다/ 그 꼬순 것을 깻잎에 싸서 먹으려는데 주모가 손사래 치며 달려왔다/ 병어회 먹을 때는 꼭 깻잎을 뒤집어 싸 먹어야 한다고,/ 그래야 입 안이 까끌거리지 않는다고.”(‘병어회와 깻잎’) 금강 하구 곳곳에 문학적 고향을 두었다는 시인은 그날 꼬순 병어회며 따순 인심에 훈훈하게 취했을 것이다.
군산 사람들은 멋쟁이기도 하다. 특유의 멋을 즐길 줄 알고, 그 표현 방법이 과감하다. 영화동 12-6번지는 1층에는 24시 편의점이 들어서 있고, 2층은 주인이 나서서 적산 가옥을 보전한 건물이다. 일본 교토에나 있을 법한 독특한 건물이다. 골목마다 모세혈관처럼 뻗친 이들의 솜씨에 반해 한나절 내내 걸음을 멈추지 못하고 에돌아가고 말았다.
원도심에서 차로 5분쯤 떨어진 곳에 이영춘 가옥(군산시 개정동 413-1)이 있다. 농장주 구마모토 리헤이의 별장이었는데, 해방 후 농촌 보건 위생의 선구자 이영춘 박사가 거주하며 이영춘 가옥으로 불렸다. 서양식・한식・일식 등 여러 건축 양식이 절충된 가옥으로, 드라마 <모래시계> <야인시대> 등의 배경이 되기도 했다. 인근에는 시마타니 금고(군산시 개정면 발산리 45-1)가 있다. 일본인 지주 시마타니 야소야가 만든 거대한 창고로, 각종 서류나 현금뿐 아니라 값비싼 한국 고미술품을 보관했다. 이들의 수탈에 맞섰던 독립운동가들의 기지로 향했다. 미국 선교사가 세운 구암교회(군산시 구암동 구암동산)는 서울의 3・1운동에 이은 군산 3・5독립만세의 발원지였다. 현재는 독립운동 기념관으로 쓰고 있다.
1 일본이 수탈 목적으로 만든 철로는 이제 흔적만 남았다. 구암초등학교 4학년 김동재(왼쪽) 군과 김다운 군이 하교하는 길이다. 2,3 금동 82번지는 군산에서 가장 잘 보존된 적산 가옥이다. 1935년에 지었으며 1967년부터 이경산・윤여삼 씨 부부가 살고 있다.
4,5 내부 또한 보존 상태가 좋고 정갈하다. 지붕에 물이 새서 흙기와만 교체했을 뿐, 복도의 마루며 유리창을 그대로 두었다. 새것으로 교체하려니 전체적인 색이 맞지 않아서다. 집의 역사와 함께 자란 삼나무와 낡은 대문이 오랜 시간을 증명해준다.
가슴 얼얼하게 하는 노부부의 집 원도심 골목을 지나다가 범상치 않은 적산 가옥(군산시 금동 82) 한 채를 발견했다. 대문이나 뾰족하게 솟은 현관 지붕이며 일본식 주택 양식이 그대로 살아 있는 집이다. 망설이다가 대문을 두드렸다. 주인 이경산 선생이 들어오라고 손짓했다. 선뜻 빗장을 열어준 마음 씀에 가슴이 따뜻했고, 집 안 풍경에 가슴이 얼얼했다.
주인의 정성스러운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는, 반질반질한 적산 가옥이다. 일본 영화에나 나올 법한 정통 일본 스타일이면서도 낯설지 않다. 세월의 온기가 서려 있어 그지없이 따뜻하다. “1935년에 지어 ‘마루보시’라는 운송 회사 지점장이 관사로 쓰던 곳이었답니다. 다른 적산 가옥에 비해 잘 보존된 이 집이 참 멋스러워 1967년 이곳으로 이사 왔습니다.”
사실 이 집을 가히 문화재 수준으로 보존한 주인공은 그의 아내 윤여삼 여사다(당시 출타 중이라 만나지 못했다). 외람되지만 윤여삼 여사는 ‘군산의 타사 튜더’라 해도 좋을 것이다. 기둥 색과 유사한 통나무로 TV 장식장과 신발장을 만들고, 나뭇가지와 짚풀로 액자를 만들어 걸었다. 부엌이 압권이다. 그 흔한 부엌 찬장 하나 사다 달지 않고, 통나무와 고재 문짝으로 직접 선반을 만들었다. 적산 가옥을 이처럼 알뜰히 갈고 닦은 그의 그윽한 손길은 일본인이 보아도 감탄하리라.
유리창 한 장 깨는 일 없이 자식들이 얌전히 자라준 집, 이제 자식들은 출가하고 부부만 호젓하게 살고 있는 이 집. 그럼에도 매일 누군가를 맞이할 듯 집은 새색시처럼 맑다. 마음이 싱숭생숭하던 찰나, 안방 탁자 위에 이경산 선생이 적어둔 노래 가사에 눈길이 머물렀다. “오가며 그 집 앞을 지나노라면/ 그리워 나도 몰래 발이 머물고/ 오히려 눈에 띌까 다시 걸어도/ 되오면 그 자리에 서졌습니다.” 작별 인사를 네 번쯤 했어도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눈물 나는 봄날 아침이었다.
1 우리나라에 유일하게 남은 일본식 사찰인 동국사의 법당 내부. 2 60년 된 중화요릿집 빈해원의 연회석은 무협 영화에 나올 법하게 예스럽다. 3 빈해원은 각종 면류가 고루 맛있고, 탕수육이나 전가복 같은 요리도 재료 맛이 살아 있다. 4 동국사 대웅전은 일본 에도 시대 건축 양식을 따랐다. 흰 꽃이 만개하면 그 향이 만 리를 간다는 나무 만리향이 정원을 그윽하게 만든다. 군산 근대 문화 거리를 둘러보려면 지도를 활용하라. 뜬다리 부두의 인포메이션 센터와 (구)군산세관에서 지도를 무료로 구할 수 있다. 문의 군산시청 관광진흥과 063-450-6110
60년 된 청요릿집도, 국내 유일의 일본식 사찰도 조선은행 건너편에 빈해원(군산시 장미동 21)이라는 중국 음식점이 있다. 1951년 개점한 이후부터 관공서 관료들로 늘 북적이던 군산 제일의 청요릿집이었다. 밥때가 되어 ‘중절모 부대’가 우르르 몰려오면 홀은 자장 냄새로 숨가쁠 정도였으리라. 요즘은 추석 전후와 연말에 발 디딜 틈 없이 분주하다. 40~50년 된 고객들은 “빈해원에 와야 고향에 온 기분이오!”라고 한다.
전근대 스타일의 내부 인테리어를 보는 순간 이소룡이 후루룩 날아오르는 무술 영화가 연상되었다. 부모님에 이어 2대째 이곳의 사장을 맡고 있는 소란정 씨는 중국 산둥 반도 출신의 화교다. 그는 건물 구조는 물론이고 의자나 테이블을 그대로 유지하고, 심지어 60년 전에 쓰던 도자기로 된 자장면 그릇조차 보관하고 있다. “모두 추억잉께요.” 계산을 하려는데, 소란정 씨가 닳고 닳은 주판을 가만히 두드렸다. 그가 아버지에게서 귀에 인이 박이도록 들었다는 두 가지 철칙이 떠오르는 순간이었다. ‘신용을 꼭 지켜라. 음식을 정성껏 내어라.’
주택가를 산책하다 보니 동국사(군산시 금광동 135-1)에 이르렀다. 일본 절간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이곳은 우리나라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일본식 사찰이다. 팔작지붕 홑처마 형식으로 일본 에도 시대의 건축 양식을 따랐다. 그때의 이름은 ‘금강사’였으나, 해방 이후 동국사로 바뀌었다. 또한 동국사는 시인 고은이 출가한 절이기도 하다. 군산에서 태어난 이 명민한 소년은 시인의 꿈을 품었지만, 한국전쟁의 충격으로 바다에 몸을 던졌다가 살아 돌아왔다. 비슬비슬 중학교 교사로 살아내던 고은은 동국사에서 혜초 스님을 만나며 불제자가 되었다.
떠나기 전, 여행의 시작점이던 바닷가로 돌아가 일별하기로 했다. 그 바다는 어떠했는가. 고은이 읊었다. “누가 떠나는가/ 목쉰 뱃고동 소리로/ 나는 태어났다/ 누가 돌아오는가/ 한밤중/ 멍든 뱃고동 소리로/ 나는 자랐다/ 벌써 석 자 세 치였다// (중략) 누가 또 떠나는가/ 억울한 것/ 서러운 것/ 누가 또 돌아오는가/ 내 고향 군산은/ 백 년이나 울어준 항구였다// 천 년이나 기나긴 탁류로 울어준 샘이었다.”_‘군산’. 그럼 하늘은 어떠했는가. 채만식이 썼다. “오후의 한가한 해가 서편으로 기울고, 하늘은 한빛으로 푸르다. 너무 맑고 푸른 것이 되레 그대로 두기가 아깝고, 흰 구름 조각 한두 장쯤 깔아놓았으면 좋을 것 같다.”_<탁류> 중. 그 허허로운 바다와 하늘 사이, 소록소록 숨 쉬며 낮게 엎드린 근대 문화 거리를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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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 여행 숙식 내비게이션
꽃게장의 화룡점정, 유성가든(군산시청 관광진흥과 임현 씨 추천) 유성가든은 전국에서 꽃게장 마니아들이 맛 순례를 할 정도로 유명한 집이다. 1년 내내 알이 꽉 찬 꽃게장을 맛볼 수 있는데, 다른 지역 꽃게장과 달리 간이 세지 않아 꽃게 특유의 쫀득한 질감과 향긋한 풍미가 제대로 느껴지는 맛이다. 갓 지어 윤기 자르르한 솥밥을 등딱지에 넣고 슬슬 뒤적여서 후루룩 삼키는 순간이 바로 화룡점정. 문의 063-453-6670 주소_군산시 성산면 성덕리 476-1
정겹고도 칼칼한 짬뽕, 복성루(여행 전문 사진가 민희기 씨 추천) 신선한 해산물을 듬뿍 넣은 짬뽕 또한 군산의 별미. 복성루 짬뽕은 맨 위에 채 썰어 볶은 돼지고기 고명을 올려 걸쭉하고 구수한 국물이 특징이다. 점심시간에는 가게 앞으로 줄이 길게 늘어선다. 문의 063-445-8412 주소 군산시 이원동 332
한국관광공사 인증 숙박업소 리츠프라자호텔 은파유원지 입구. 문의 063-468-4681, www.ritzplaza.co.kr 주소_군산시 나운동 1195-49 군산리버힐관광호텔 철새 조망대 입구. 문의 063-453-0005 주소_군산시 성산면 성덕리 428-4 , 뉴그랜드모텔 장미동 근대 문화 거리. 문의 063-445-6789 주소_군산시 장미동 1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