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마 색이 얼마나 예쁜지 보실래요? 잎은 또 어떻고. 꼭 심장같이 생겼죠? 앞에서 보면 하트 모양인데 뒤집어놓고 보면 잎맥이 꼭 핏줄같이 뻗어 있거든. 달콤하지, 핑크빛이지… 고구마 향기 싫어하는 사람 못 봤죠? 한마디로 사랑에 관한 모든 것이 담긴 게 고구마지요.”
듣고 보니 그렇다. 고구마와 얼마나 많은 시간을 보냈으면 저럴까도 싶었지만 백날을 함께해도 바라보는 시선이 고정되어 있다면 절대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내다 파는 상품에 ‘맛있는 고구마’가 아닌 ‘행복한 고구마’라는 이름을 붙인 농부답다. 지금은 양파가 유명하지만 예전부터 무안은 고구마로 더 유명했던 곳이라고 한다. 일제강점기에 나주평야에서 생산되는 쌀과 무안 고구마를 실어 가려고 목포항을 만들었다는 얘기가 있었을 정도라니 그 양이 만만치 않았을 터이다.
“가난했던 시절에는 고구마가 최고였지요. 그런데 세월이 흐르고 환경이 바뀌고 나니 가난의 상징으로 여기던 고구마가 싫어 무안 사람들이 양파를 심기 시작했어요. 1980년대부터 양파를 집중적으로 심었는데 그때 이후로 무안은 양파의 고장으로 불렸지요.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고구마가 가난이 아닌 건강의 상징으로 인식되기 시작했어요.‘고구마 건강법’이니 ‘몸을 살리는 고구마’니 하는 말이 유행하면서 차츰 그 옛날의 명성을 되찾자는 얘기도 오가고 하다 보니 이제는 고구마를 심는 사람이 많이 늘어났어요. 농사도 시절을 타나 봐요.”
남편 김용주 씨는 ‘무안 황토 명품 고구마 클러스터 사업단’ 단장이다. 1백여 농가가 회원으로 가입되어 무안 고구마를 국내 최고의 명품 브랜드로 만들어가는 사업을 하고 있다. 신선한 해풍과 갯벌의 짭짤한 염기, 게르마늄이 풍부한 황토와 깨끗한 지하수가 어우러져 탱글탱글하고 달콤한 무안 황토 고구마를 만들어낸다고.
마지막 수확 작업이 한창인 황토밭에서 방금 캐낸 고구마를 툭 분질러 입가에 붉은 흙이 묻건 말건 속살을 한입 베어 물어봤다. 달콤하면서무안도 아삭아삭한 것이 과일 저리 가라다. 이정옥 씨가 고구마를 몇 개 툭툭 분질러가며 보여준다. 생긴 것은 똑같지만 색상이 모두 다르다. 흰색, 보라색, 주황색 등 빛깔에 따라 이름도 다른데 수고구마, 호박고구마, 자색고구마, 황금고구마, 보라고구마, 주황색고구마 등으로 불린다. 수고구마는 처음 캐냈을 땐 아삭아삭한 것이 밤 맛을 연상시키지만 잘 보관해두고 숙성시켜가며 먹으면 호박고구마처럼 달고 차진 맛이 난다. 고구마를 보관할 때는 상자째 그늘에 두고 뚜껑을 열어둔 채로 말리듯이 보관해야 싹이 나지 않고 끝까지 맛있게 먹을 수 있다고.
(오른쪽) 겉으로는 별다른 특징이 없어 보이는 고구마지만 이렇게 툭 분질러놓고 보면 제각기 속살이 모두 다르다. 다양한 종자를 연구해 심은 덕분이다. 왼쪽 한창 속이 들어차기 시작한 배추밭. 황토밭에서 자란 덕분인지 달고 고소한 데다 물이 많은 것이 특징이다.
고구마연구소를 운영하는 농부
해마다 5백 톤가량의 고구마를 수확한다는 부부는 이름도 독특한 ‘고구마연구소’를 운영하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더 맛있고 더 때깔 좋은 고구마를 생산하기 위해 다양한 종자로 실험하기 위함이다. 농사를 지을 때는 종자를 바꿔가며 심어야 한다는 것이 상식이다. 한 가지 종자를 계속 심다 보면 병충해가 생겨 농사를 망치기 십상인 것이다. 20여 년 전 김용주 씨 역시 그런 입장이었다고 한다. 문제가 있는 것을 알지만 대안이 없었기에 ‘이젠 그만할 수밖에 없구나’ 싶었던 그때, 친한 목사님이 일본 여행길에서 가져다 준 종자로 어려움을 넘겼고 1985년부터는 스스로 일본, 중국, 유럽 등으로 농업 연수를 다녔다.
언젠가 일본 연수를 갔을 때의 일이다. 여행 중 우연히 들렀던 고구마 가게에서 군고구마를 먹으며 점원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농장 주인을 만날 수 있었다고. 농장 주인의 첫마디는 “고구마는 몇 종이나 심느냐”였다. 다섯 가지 정도 심는다고 했더니 그렇다면 얘기 상대가 될 만하다는 대답을 하더란다. 두 가지 이하로 말했으면 아예 말도 섞지 않았을 것이라면서. 종자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연구소를 활성화시키고 싶었지만 고민 끝에 정부 지원은 받지 않기로 했다. 종자 하나를 개발하려면 적어도 10년은 걸리는데 정부 지원을 받으면 빨리 좋은 결과를 내놓아야 한다는 압박감이 심해지리라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인생 불행해질까 봐’ 지원금은 포기했지만 나름대로 여유를 가지고 일을 진행해나가고 있다고. 고구마를 이용한 가공식품 만드는 재미도 꽤 쏠쏠하단다.
(왼쪽) 보라색 고구마를 툭툭 던져넣고 지은 고구마밥. 파삭파삭한 식감도 좋지만 색이 워낙 고와 눈길을 끈다.
고구마와 배추, 무안 갯벌 낙지로 차려낸 밥상
아침에 만들었다는 군고구마를 맛보니 식어서 온기는 없지만 찐득찐득한 꿀이 배어 나오는 것이 입에서 살살 녹는다. 당도가 엄청나다. 잘 삶은 고구마를 으깬 다음 엿기름물에 삭혔다가 팔팔 끓여서 만든다는 조청은 퓌레 정도의 농도인데 쫄깃쫄깃한 인절미를 찍어 먹는 맛이 그만이다.담백한 크래커에 발라 먹어도 좋을 것 같다. 찹쌀과 찐 호박고5구마를 섞어 담근 고추장은 고구마의 섬유질이 그대로 살아 있어 맨입에 채소를 찍어 먹으면 딱 좋을 농도. 짙은 자주색 고구마를 썰어 넣고 지어낸 밥은 자르르한 윤기와 빛깔이 어우러져 입맛을 돋운다. 집 앞마당에서 몇 걸음만 나가면 그 유명한 세발낙지가 그득하다는 무안 갯벌이다. 거기서 건져 온 낙지에 구수한 된장을 엷게 풀어 끓인 연포탕을 곁들였다. 고구마 못지않게 정성을 기울여 재배한다는 황토밭 배추에 큼지막하게 썰어 내온 돼지고기 편육을 얹어 싸 먹는 맛이라니….
작년 이맘때 서울에서 우연히 이정옥 씨가 재배한 유기농 배추를 맛본 적이 있었다. 속이 꽉 찬 배추의 속대를 뜯어 입에 넣는 순간, 오랜만에 배추 고유의 향기가 물씬 풍겨오는 것을 경험했는데 그 배추로 담근 김장 김치 역시 해를 넘겨 여름이 지나도록 아삭아삭한 맛이 그대로 살아 있었다. 무안에서 맛본 묵은지 역시 적당히 질깃하면서도 아삭아삭한 맛이 살아 있다. 배추 농사는 다른 사람들이 ‘워낙 독하게 약을 해대기에 놀라서’ 시작했단다. 많은 양을 심지는 않지만 그 맛을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은 김장철이 다가오기 전에 일찌감치 주문을 해놓는다고. 황토밭에서 뽑아낸 무 또한 물이 많고 시원해 인기가 좋다. 칼로 어슷어슷 빼쳐 썰어 고춧가루 조금 넣고 국물을 넉넉하게 잡아 담근 무김치를 맛보니 새콤한 것이 입맛을 돋운다. 찐고구마 먹을 때 딱이겠다 싶다. 어렵지 않게 한 상 차려 내오는 것이 손님을 어지간히 치러낸 솜씨가 아니다 싶더니 그렇지 않아도 사흘 뒤엔 피아노와 첼로 연주가 어우러진 작은 음악회를 이 집에서 연단다. 일 년에 한두 번은 음악회나 체험 행사를 여는데 한 번에 1백 명 정도 모인다고. 농사짓는 틈틈이 황토 벽돌 2만 장을 찍어내서 지었다는 황토 너와집이 멋진 공연장으로 바뀌는 순간이다. 뒤풀이로 구수한 시골 음식을 나눠 먹는 시간이 뒤따르는 것은 당연할 터이다.
“우리 고구마 값이 좀 비싸요. 백화점이나 친환경 매장에서 주로 판매하니까요. 그런데 고구마 박스나 포장에 농장 연락처를 명기해놨더니 농장에 직접 찾아오는 손님이 생기더라고요. 멀리까지 찾아온 손님들에게 보여줄 게 없기에 고구마 캐기며 황토 염색, 갯벌 체험 같은 행사를 만들기 시작했어요. 음악회도 그렇게 해서 한두 번 하다 보니 이제는 일 년에 두 번 정도는 하게 되었지요.”
1 날배추와 직접 재배한 유기농 콩으로 담근 된장, 고소한 시골 돼지 편육과 해를 넘긴 묵은지로 차린 꿀맛 같은 밥상.
2 감칠맛 나기로 유명한 남도 김치의 특징이 그대로 드러나는 묵은지와 무김치.
3 갯벌 낙지에 달큼한 무를 넣고 된장 풀어 시원하게 연포탕을 끓였다.
4 무기물이 풍부한 갯벌과 황토흙으로 이루어진 배추밭.
김용주 씨는 아내를 가리켜 ‘현재를 사는 사람’이란다. 길을 걷다가도 꽃을 보면 쭈그리고 앉아 예쁘다며 말을 걸기 일쑤라고. 그러니 ‘으뜨케 교회를 제 시간에 가겠냐’는 것이다. 본인은 행복하게 사는 사람이지만 옆에서 지켜보자면 ‘만날’ 싸울 일뿐이라고. 배추밭을 둘러보기 위해 함께 집을 나서는데 역시나 팔을 휘휘 저어가며 걸으면서 시선은 여기저기를 기웃거린다. 감성 지수는 한계치 측정 불가일 터이다. 농장을 아름답게 꾸미고 싶다는 얘기를 하면 사람들은 흔히 야생화를 심으라고 조언을 한다는데 이정옥 씨는 그마저도 틀에 얽매이는 것이 싫단다. 나리꽃을 잔뜩 심어서 화려한 걸 보고 싶기도 하고 무안 황토밭에 어울리는 작물을 어우러지게 심어 곡식 정원도 가꾸고 싶다고.
어려서부터 ‘땀사구 없다’는 말을 많이 듣고 자랐다는 이정옥 씨. 관심을 갖는 게 있으면 다른 건 돌아보지 않는 사람을 뜻하는 사투리라는데 한번 생각에 빠져 상상력을 발휘하기 시작하면 한도 끝도 없는 성격 덕분에 ‘행복한 고구마’는 홈페이지를 통해 거의 실시간으로 생장 상태가 알려진다. 농사를 짓는 1년 동안 꼼꼼하게 적어 내려가는 고구마 일기며 표로 보기 좋게 정리한 고구마 월력, 사진으로 보는 농장 구경도 볼거리. ‘행복한 고구마’라는 이름을 붙이면서 쓰기 시작한 에세이를 모아온 e-book은 2003년 11월 4일에 시작해 지금까지 벌써 130여 쪽을 채웠다. 정감 있는 사진과 함께 올린 감성적인 글은 공짜로 보기 아까울 정도. 사진 한 컷 한 컷을 이정옥 씨가 찍었다.
사실 부부는 농민운동으로 유명하다. 남편이 먼저, 아내는 한참 후에 시작한 활동이지만 두 사람 모두 그 분야에서는 한 획을 그었다고 평가받을 정도. 농민운동과 함께 유기농법도 일찌감치 시작했다. 인증 제도가 생기기 전부터 유기농법을 실천해온 부부답게 25년을 축적해온 유기농 노하우도 눈길을 끈다. 부부는 멸치액젓을 만들고 난 찌꺼기인 멸치액젓 슬러지를 활용해 농사를 짓는다. 유기 순환 농법을 이용하고 싶었지만 축산을 하지 않는 까닭에 마땅한 양분을 구할 수 없어 시작한 일. 우연히 구하게 된 멸치액젓 슬러지에 왕겨를 섞어 발효시켜 쓰곤 했다는데 악취가 날 때도 원래 그런가 보다 싶었다. 하지만 어느 날 신선한 슬러지에서 구수한 향이 나는 것을 보고는 문득 그동안 멀쩡한 슬러지를 부패시켜 썼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떠올린 것이 바로 황토. 지금은 슬러지에 흙을 섞은 뒤 1년 정도 발효시켜 하얀 곰팡이가 핀 흙 누룩인 ‘토곡’을 만들어 사용한다. 그것도 아주 소량만 쓰는데 조만간 아무것도 사용하지 않는 무투입 자연 농법을 시도해볼 요량이라고. 고구마 자체가 많은 양분이 필요한 작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웃자라서 잎사귀만 무성해봤자 뿌리는 빈약하기 십상이므로.배추나 무 역시도 흙심이 좋아서인지 참 실하다.
(왼쪽) 직접 찍어낸 황토 벽돌 2만 장을 사용해 지은 흙집. 너와지붕을 올려 운치 있다.
고교 시절까지만 해도 문학소녀였다는 이정옥 씨는 결혼 이후 25년간 책 한 권 읽지 않다가 우연히 영성 수련을 하게 되면서 글을 쓰기 시작해 잃어버린 감성을 되찾았다고 한다. 그토록 싫어했던 ‘관광버스춤’을 어느 하루, 무릎 관절이 상하도록 실컷 춰본 이후로는 음악이 나오면 몸이 자유자재로 움직여진다고. 몸을 통해 깨닫고 다시 찾은 그때의 감성으로 지은 이름이 바로 ‘행복한 고구마’다. 숙성 과정을 통해 이제 한창 맛이 들기 시작한다는 겨울 고구마. 쪄 먹고 구워 먹을 것만 아니라 시원하게 쭉쭉 껍질을 벗겨내서 아삭아삭 씹어 먹는 맛도 각별할 것이다. 긴긴 밤 무료하고 갑갑할 때 고구마 한 개 손에 들고 행복한 고구마 홈페이지를 기웃거려봄이 어떨지. 여느 포털 사이트보다 한결 풍부하고 재미있는 읽을거리가 그득한 행복한 고구마 홈페이지는 www.happysweet.co.kr이다. 구입 문의는 061- 453 -1835.
1 동치미를 담그기에 딱 좋은 크기의 무. 날로 먹어도 맛있다.
2 12월 중순이 되면 달콤한 당근을 수확한다.
3 밭에서 막 뽑아낸 고구마. 너무 크지 않고 한 손에 들고 먹기에 딱 좋은 크기라 더욱 인기가 많다.
4 황토밭에서 나는 배추는 11월 말에서 12월 초까지 택배 판매도 한다.
5 거의 매일 농장 사진 찍고 글을 쓰는 이정옥 씨.
6 ‘행복한 고구마’는 고구마 종류를 선택해 주문할 수 있어 편리하다.
듣고 보니 그렇다. 고구마와 얼마나 많은 시간을 보냈으면 저럴까도 싶었지만 백날을 함께해도 바라보는 시선이 고정되어 있다면 절대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내다 파는 상품에 ‘맛있는 고구마’가 아닌 ‘행복한 고구마’라는 이름을 붙인 농부답다. 지금은 양파가 유명하지만 예전부터 무안은 고구마로 더 유명했던 곳이라고 한다. 일제강점기에 나주평야에서 생산되는 쌀과 무안 고구마를 실어 가려고 목포항을 만들었다는 얘기가 있었을 정도라니 그 양이 만만치 않았을 터이다.
“가난했던 시절에는 고구마가 최고였지요. 그런데 세월이 흐르고 환경이 바뀌고 나니 가난의 상징으로 여기던 고구마가 싫어 무안 사람들이 양파를 심기 시작했어요. 1980년대부터 양파를 집중적으로 심었는데 그때 이후로 무안은 양파의 고장으로 불렸지요.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고구마가 가난이 아닌 건강의 상징으로 인식되기 시작했어요.‘고구마 건강법’이니 ‘몸을 살리는 고구마’니 하는 말이 유행하면서 차츰 그 옛날의 명성을 되찾자는 얘기도 오가고 하다 보니 이제는 고구마를 심는 사람이 많이 늘어났어요. 농사도 시절을 타나 봐요.”
남편 김용주 씨는 ‘무안 황토 명품 고구마 클러스터 사업단’ 단장이다. 1백여 농가가 회원으로 가입되어 무안 고구마를 국내 최고의 명품 브랜드로 만들어가는 사업을 하고 있다. 신선한 해풍과 갯벌의 짭짤한 염기, 게르마늄이 풍부한 황토와 깨끗한 지하수가 어우러져 탱글탱글하고 달콤한 무안 황토 고구마를 만들어낸다고.
마지막 수확 작업이 한창인 황토밭에서 방금 캐낸 고구마를 툭 분질러 입가에 붉은 흙이 묻건 말건 속살을 한입 베어 물어봤다. 달콤하면서무안도 아삭아삭한 것이 과일 저리 가라다. 이정옥 씨가 고구마를 몇 개 툭툭 분질러가며 보여준다. 생긴 것은 똑같지만 색상이 모두 다르다. 흰색, 보라색, 주황색 등 빛깔에 따라 이름도 다른데 수고구마, 호박고구마, 자색고구마, 황금고구마, 보라고구마, 주황색고구마 등으로 불린다. 수고구마는 처음 캐냈을 땐 아삭아삭한 것이 밤 맛을 연상시키지만 잘 보관해두고 숙성시켜가며 먹으면 호박고구마처럼 달고 차진 맛이 난다. 고구마를 보관할 때는 상자째 그늘에 두고 뚜껑을 열어둔 채로 말리듯이 보관해야 싹이 나지 않고 끝까지 맛있게 먹을 수 있다고.
(오른쪽) 겉으로는 별다른 특징이 없어 보이는 고구마지만 이렇게 툭 분질러놓고 보면 제각기 속살이 모두 다르다. 다양한 종자를 연구해 심은 덕분이다. 왼쪽 한창 속이 들어차기 시작한 배추밭. 황토밭에서 자란 덕분인지 달고 고소한 데다 물이 많은 것이 특징이다.
고구마연구소를 운영하는 농부
해마다 5백 톤가량의 고구마를 수확한다는 부부는 이름도 독특한 ‘고구마연구소’를 운영하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더 맛있고 더 때깔 좋은 고구마를 생산하기 위해 다양한 종자로 실험하기 위함이다. 농사를 지을 때는 종자를 바꿔가며 심어야 한다는 것이 상식이다. 한 가지 종자를 계속 심다 보면 병충해가 생겨 농사를 망치기 십상인 것이다. 20여 년 전 김용주 씨 역시 그런 입장이었다고 한다. 문제가 있는 것을 알지만 대안이 없었기에 ‘이젠 그만할 수밖에 없구나’ 싶었던 그때, 친한 목사님이 일본 여행길에서 가져다 준 종자로 어려움을 넘겼고 1985년부터는 스스로 일본, 중국, 유럽 등으로 농업 연수를 다녔다.
언젠가 일본 연수를 갔을 때의 일이다. 여행 중 우연히 들렀던 고구마 가게에서 군고구마를 먹으며 점원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농장 주인을 만날 수 있었다고. 농장 주인의 첫마디는 “고구마는 몇 종이나 심느냐”였다. 다섯 가지 정도 심는다고 했더니 그렇다면 얘기 상대가 될 만하다는 대답을 하더란다. 두 가지 이하로 말했으면 아예 말도 섞지 않았을 것이라면서. 종자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연구소를 활성화시키고 싶었지만 고민 끝에 정부 지원은 받지 않기로 했다. 종자 하나를 개발하려면 적어도 10년은 걸리는데 정부 지원을 받으면 빨리 좋은 결과를 내놓아야 한다는 압박감이 심해지리라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인생 불행해질까 봐’ 지원금은 포기했지만 나름대로 여유를 가지고 일을 진행해나가고 있다고. 고구마를 이용한 가공식품 만드는 재미도 꽤 쏠쏠하단다.
(왼쪽) 보라색 고구마를 툭툭 던져넣고 지은 고구마밥. 파삭파삭한 식감도 좋지만 색이 워낙 고와 눈길을 끈다.
고구마와 배추, 무안 갯벌 낙지로 차려낸 밥상
아침에 만들었다는 군고구마를 맛보니 식어서 온기는 없지만 찐득찐득한 꿀이 배어 나오는 것이 입에서 살살 녹는다. 당도가 엄청나다. 잘 삶은 고구마를 으깬 다음 엿기름물에 삭혔다가 팔팔 끓여서 만든다는 조청은 퓌레 정도의 농도인데 쫄깃쫄깃한 인절미를 찍어 먹는 맛이 그만이다.담백한 크래커에 발라 먹어도 좋을 것 같다. 찹쌀과 찐 호박고5구마를 섞어 담근 고추장은 고구마의 섬유질이 그대로 살아 있어 맨입에 채소를 찍어 먹으면 딱 좋을 농도. 짙은 자주색 고구마를 썰어 넣고 지어낸 밥은 자르르한 윤기와 빛깔이 어우러져 입맛을 돋운다. 집 앞마당에서 몇 걸음만 나가면 그 유명한 세발낙지가 그득하다는 무안 갯벌이다. 거기서 건져 온 낙지에 구수한 된장을 엷게 풀어 끓인 연포탕을 곁들였다. 고구마 못지않게 정성을 기울여 재배한다는 황토밭 배추에 큼지막하게 썰어 내온 돼지고기 편육을 얹어 싸 먹는 맛이라니….
작년 이맘때 서울에서 우연히 이정옥 씨가 재배한 유기농 배추를 맛본 적이 있었다. 속이 꽉 찬 배추의 속대를 뜯어 입에 넣는 순간, 오랜만에 배추 고유의 향기가 물씬 풍겨오는 것을 경험했는데 그 배추로 담근 김장 김치 역시 해를 넘겨 여름이 지나도록 아삭아삭한 맛이 그대로 살아 있었다. 무안에서 맛본 묵은지 역시 적당히 질깃하면서도 아삭아삭한 맛이 살아 있다. 배추 농사는 다른 사람들이 ‘워낙 독하게 약을 해대기에 놀라서’ 시작했단다. 많은 양을 심지는 않지만 그 맛을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은 김장철이 다가오기 전에 일찌감치 주문을 해놓는다고. 황토밭에서 뽑아낸 무 또한 물이 많고 시원해 인기가 좋다. 칼로 어슷어슷 빼쳐 썰어 고춧가루 조금 넣고 국물을 넉넉하게 잡아 담근 무김치를 맛보니 새콤한 것이 입맛을 돋운다. 찐고구마 먹을 때 딱이겠다 싶다. 어렵지 않게 한 상 차려 내오는 것이 손님을 어지간히 치러낸 솜씨가 아니다 싶더니 그렇지 않아도 사흘 뒤엔 피아노와 첼로 연주가 어우러진 작은 음악회를 이 집에서 연단다. 일 년에 한두 번은 음악회나 체험 행사를 여는데 한 번에 1백 명 정도 모인다고. 농사짓는 틈틈이 황토 벽돌 2만 장을 찍어내서 지었다는 황토 너와집이 멋진 공연장으로 바뀌는 순간이다. 뒤풀이로 구수한 시골 음식을 나눠 먹는 시간이 뒤따르는 것은 당연할 터이다.
“우리 고구마 값이 좀 비싸요. 백화점이나 친환경 매장에서 주로 판매하니까요. 그런데 고구마 박스나 포장에 농장 연락처를 명기해놨더니 농장에 직접 찾아오는 손님이 생기더라고요. 멀리까지 찾아온 손님들에게 보여줄 게 없기에 고구마 캐기며 황토 염색, 갯벌 체험 같은 행사를 만들기 시작했어요. 음악회도 그렇게 해서 한두 번 하다 보니 이제는 일 년에 두 번 정도는 하게 되었지요.”
1 날배추와 직접 재배한 유기농 콩으로 담근 된장, 고소한 시골 돼지 편육과 해를 넘긴 묵은지로 차린 꿀맛 같은 밥상.
2 감칠맛 나기로 유명한 남도 김치의 특징이 그대로 드러나는 묵은지와 무김치.
3 갯벌 낙지에 달큼한 무를 넣고 된장 풀어 시원하게 연포탕을 끓였다.
4 무기물이 풍부한 갯벌과 황토흙으로 이루어진 배추밭.
김용주 씨는 아내를 가리켜 ‘현재를 사는 사람’이란다. 길을 걷다가도 꽃을 보면 쭈그리고 앉아 예쁘다며 말을 걸기 일쑤라고. 그러니 ‘으뜨케 교회를 제 시간에 가겠냐’는 것이다. 본인은 행복하게 사는 사람이지만 옆에서 지켜보자면 ‘만날’ 싸울 일뿐이라고. 배추밭을 둘러보기 위해 함께 집을 나서는데 역시나 팔을 휘휘 저어가며 걸으면서 시선은 여기저기를 기웃거린다. 감성 지수는 한계치 측정 불가일 터이다. 농장을 아름답게 꾸미고 싶다는 얘기를 하면 사람들은 흔히 야생화를 심으라고 조언을 한다는데 이정옥 씨는 그마저도 틀에 얽매이는 것이 싫단다. 나리꽃을 잔뜩 심어서 화려한 걸 보고 싶기도 하고 무안 황토밭에 어울리는 작물을 어우러지게 심어 곡식 정원도 가꾸고 싶다고.
어려서부터 ‘땀사구 없다’는 말을 많이 듣고 자랐다는 이정옥 씨. 관심을 갖는 게 있으면 다른 건 돌아보지 않는 사람을 뜻하는 사투리라는데 한번 생각에 빠져 상상력을 발휘하기 시작하면 한도 끝도 없는 성격 덕분에 ‘행복한 고구마’는 홈페이지를 통해 거의 실시간으로 생장 상태가 알려진다. 농사를 짓는 1년 동안 꼼꼼하게 적어 내려가는 고구마 일기며 표로 보기 좋게 정리한 고구마 월력, 사진으로 보는 농장 구경도 볼거리. ‘행복한 고구마’라는 이름을 붙이면서 쓰기 시작한 에세이를 모아온 e-book은 2003년 11월 4일에 시작해 지금까지 벌써 130여 쪽을 채웠다. 정감 있는 사진과 함께 올린 감성적인 글은 공짜로 보기 아까울 정도. 사진 한 컷 한 컷을 이정옥 씨가 찍었다.
사실 부부는 농민운동으로 유명하다. 남편이 먼저, 아내는 한참 후에 시작한 활동이지만 두 사람 모두 그 분야에서는 한 획을 그었다고 평가받을 정도. 농민운동과 함께 유기농법도 일찌감치 시작했다. 인증 제도가 생기기 전부터 유기농법을 실천해온 부부답게 25년을 축적해온 유기농 노하우도 눈길을 끈다. 부부는 멸치액젓을 만들고 난 찌꺼기인 멸치액젓 슬러지를 활용해 농사를 짓는다. 유기 순환 농법을 이용하고 싶었지만 축산을 하지 않는 까닭에 마땅한 양분을 구할 수 없어 시작한 일. 우연히 구하게 된 멸치액젓 슬러지에 왕겨를 섞어 발효시켜 쓰곤 했다는데 악취가 날 때도 원래 그런가 보다 싶었다. 하지만 어느 날 신선한 슬러지에서 구수한 향이 나는 것을 보고는 문득 그동안 멀쩡한 슬러지를 부패시켜 썼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떠올린 것이 바로 황토. 지금은 슬러지에 흙을 섞은 뒤 1년 정도 발효시켜 하얀 곰팡이가 핀 흙 누룩인 ‘토곡’을 만들어 사용한다. 그것도 아주 소량만 쓰는데 조만간 아무것도 사용하지 않는 무투입 자연 농법을 시도해볼 요량이라고. 고구마 자체가 많은 양분이 필요한 작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웃자라서 잎사귀만 무성해봤자 뿌리는 빈약하기 십상이므로.배추나 무 역시도 흙심이 좋아서인지 참 실하다.
(왼쪽) 직접 찍어낸 황토 벽돌 2만 장을 사용해 지은 흙집. 너와지붕을 올려 운치 있다.
고교 시절까지만 해도 문학소녀였다는 이정옥 씨는 결혼 이후 25년간 책 한 권 읽지 않다가 우연히 영성 수련을 하게 되면서 글을 쓰기 시작해 잃어버린 감성을 되찾았다고 한다. 그토록 싫어했던 ‘관광버스춤’을 어느 하루, 무릎 관절이 상하도록 실컷 춰본 이후로는 음악이 나오면 몸이 자유자재로 움직여진다고. 몸을 통해 깨닫고 다시 찾은 그때의 감성으로 지은 이름이 바로 ‘행복한 고구마’다. 숙성 과정을 통해 이제 한창 맛이 들기 시작한다는 겨울 고구마. 쪄 먹고 구워 먹을 것만 아니라 시원하게 쭉쭉 껍질을 벗겨내서 아삭아삭 씹어 먹는 맛도 각별할 것이다. 긴긴 밤 무료하고 갑갑할 때 고구마 한 개 손에 들고 행복한 고구마 홈페이지를 기웃거려봄이 어떨지. 여느 포털 사이트보다 한결 풍부하고 재미있는 읽을거리가 그득한 행복한 고구마 홈페이지는 www.happysweet.co.kr이다. 구입 문의는 061- 453 -1835.
1 동치미를 담그기에 딱 좋은 크기의 무. 날로 먹어도 맛있다.
2 12월 중순이 되면 달콤한 당근을 수확한다.
3 밭에서 막 뽑아낸 고구마. 너무 크지 않고 한 손에 들고 먹기에 딱 좋은 크기라 더욱 인기가 많다.
4 황토밭에서 나는 배추는 11월 말에서 12월 초까지 택배 판매도 한다.
5 거의 매일 농장 사진 찍고 글을 쓰는 이정옥 씨.
6 ‘행복한 고구마’는 고구마 종류를 선택해 주문할 수 있어 편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