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색 치마를 입고 왼편에 앉아 있는 이가 궁중병과 기능보유자 정길자 씨고, 오른 편에 파란저고리를 입은 이가 궁중요리 기능보유자 한복려 씨다.
1 황혜성 선생이 숙명여대 재직 시절 손글씨로 써서 만든 교재 <조선요리대략>과 한복려 씨와 정길자 씨가 연구원 초창기에 만든 요리 카드.
2 처음과 끝이 한결같다는 한복려 씨.(정길자 씨의 말)
3 한희순 상궁이 물려준 백화푼주. 황혜성 선생은 이 푼주에 유자 화채를 잘 담으셨다.
만물의 색깔이 짙어지며 본연의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계절 가을, 하늘 역시 푸른빛이 짙다. 서울 종로구 원서동, 도심 한복판이라 하기엔 지붕도 낮고 소박해 보이는 골목, 창덕궁 담장을 오른쪽에 두고 막다른길까지 걸어 들어가면 앞마당에 대가족 수만큼이나 많은 장독대가 옹기종기 놓여 있는 한옥이 한 채 나온다. 우리나라 궁중음식과 전통 음식 분야에 불을 지핀 아궁이와도 같은 곳, 바로 사단법인 궁중음식연구원이다. 창덕궁과 담벼락을 같이 쓰는 이곳 마당에도 어느새 가을 햇살이 깊숙이 들었다. 장독대 한쪽에 놓인 채반에는 빨간 대추가 가을볕에 쭈글쭈글 말라가고 있다. 한옥 안채에서 ‘마포종점’을 노래했던 ‘은방울 자매’처럼 곱디곱게 치마저고리를 차려 입은 한복려 씨와 정길자 씨가 나와 편안한 웃음으로 촬영팀을 맞이한다. 인터뷰 사진 촬영을 위해 얼굴에 뽀얗게 분 바르고 머리 손질도 하고 꽃단장이 한창이다. 마당 댓돌 옆으로는 ‘축하합니다’라고 씌인 핑크색 리본이 달린 화분이 몇 개 놓여 있다. 얼마 전 문화재청은 “조선 왕조 궁중음식의 체계적인 전승과 보급을 위해 궁중음식은 한복려, 병과는 정길자를 중요무형문화재 제38호 기능보유자로 인정한다”라고 발표했다.
문화재 지정을 축하하기 위해 각지에서 보내온 화분이다. 이 두 사람을 이야기하려면 조선 왕조 궁중음식 기능보유의 역사를 살피는 게 순서다. 1971년 조선 왕조 궁중음식이 중요무형문화재 제38호로 지정되면서 한희순 상궁이 제1대 기능보유자로 인정받았다. 한희순 상궁은 13세(고종 39년) 때 덕수궁 주방의 나인으로 입궁해 주방 상궁으로서 1910년까지 고종과 순종의 음식을 담당했다. 1944년부터 낙선재 소주방에서 한희순 상궁으로부터 30년간 궁중음식 조리법을 전수받으며, 궁중음식을 계량화하고 조리법을 정리한 황혜성 선생은 1972년 한 상궁이 별세하면서 제2대 기능보유자가 되었다. 그는 무엇보다 대중매체를 통해 일반인의 궁중음식과 전통 음식에 대한 이해를 넓혀왔다. 그다음이 한복려·정길자 씨다. 작년 12월 황혜성 선생이 작고한 뒤 오랜 심사 끝에 제3대 기능보유자를 궁중음식과 궁중병과 분야로 나누어 지정한 것. 어머니에서 딸로 대를 이었다는 것, 그리고 한 사람에게 이어져오던 것이 두 분야로 나뉘어 지정되었다는 것은 유례없는 일이다.
스승 같은 어머니, 어머니 같은 스승
궁중음식연구원 원장 한복려. 황혜성 선생의 장녀로, 우리나라 전통 음식과 궁중음식을 이야기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이름, <대장금>을 떠올리면 ‘이영애’ 다음으로 연상되는 이름. 세 살 아이부터 팔순 노인은 물론 외국인도 아는 <대장금>의 숨은 주역이었다. 1971년 황혜성 선생이 궁중음식연구원을 설립한 이래 3백65일 그림자처럼 붙어서 어머니를 스승으로 모시면서 궁중음식을 전수받았고, 그 또한 연구와 전수에 힘쓰며 출판과 전시회 등 각종 활동을 통해 우리 전통 식문화를 이끌고 있다. 막중한 임무를 띤 그이지만 홈페이지에 “나는 요즘 그릇을 자주 깬다”라고 실수를 고백하기도 하는 귀여운 아줌마이기도 하다.
“어머니는 학자이시면서 또 생활인으로 사셨어요. 우리한테 어려운 말로 가르치지는 않으셨지요. 실기를 폄하하고 이론만 중시하던 옛날부터 어머니는 교수로서 이론과 실기를 병행하신 분이었어요. 이미 요즘의 트렌드를 솔선하신 셈이에요. 선생님은 늘 ‘꾀가 들어가면 음식이 안 된다’ ‘정성 들여 제대로 해야 한다’ ‘재료를 귀하게 여기라’고 강조하셨습니다. 한희순 상궁으로부터 이어져오는 가장 중요한 가르침이었어요. 칼을 잡을 때마다 재료에게 ‘너를 상하게 해서 미안하다. 하지만 맛있는 음식으로 만들어 사람들에게 이롭게 하겠다’는 이야기를 많이 하라고 이르셨어요.” 말하는 내내 호칭을 ‘어머니’와 ‘선생님’으로 반반 정도 사용하는 ‘딸’이자 ‘제자’다. 정길자 씨는 현재 전통병과조리학원 원장이다. 그가 황혜성 선생을 만난 건 스무 살 때 한양대학교 가정과 입학 면접에서였다. 서류를 훑어보신 후 부드러운 목소리로 “너 복려 아니?” 하고 물으셨던 그 기억이 아직도 선명하단다.
“다른 애들한테는 묻지 않는 걸 나한테 물으시니 얼마나 기뻐요. 그때 한 원장이랑 나랑 수도여고 동창인 것도 알게 됐고, 교수님이 동창생의 어머니인 것도 알았어요.” 졸업 후 황 교수 밑에서 조교 생활을 시작한 그는 스승이 대학을 옮길 때마다 데리고 다녔던 제자, 궁중음식연구원 초대 조교로 임명했던 제자다. 이후 ‘한국의 집’ 조리실장, 경주관광교육원 교수, 궁중음식연구원 교수부장을 거쳐 2000년부터 전통병과교육원을 책임지고 있다. “올해가 우리 둘이 환갑이니까 꼭 40년 동안 교수님 밑에서 공부를 했네요. 교수님은 정말 성품이 좋으시고 사랑을 듬뿍 주셨어요. 교수님 사랑 때문에 이 공부를 할 수 있었어요. 2001년에 교수님이 자서전을 내시면서 나한테 제자 대표로 글을 쓰라고 하시는 거예요. 얼마나 영광스럽고 감사하든지요. 그 많은 제자 중에서 나한테 쓰라고 하신 걸 보면 내가 수제자 맞나 봐.(웃음) ‘50대가 부럽다’라는 제목이었는데, 글을 잘 쓰지는 못해도 가슴으로 써 내려갔어요. ”
근자에 선생님께서는 “50대가 부럽다”는 말씀을 자주 하신다. 열정을 다해 강의하고 일하는 50대를 칭찬하시는 말씀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하고, 건강과 여건이 허락하는 50대에 좀 더 열심히 일하라는 채찍질이라는 생각도 든다. 교수님 스스로 자신의 50대를 반추하는 그리움이 곁들여진 것인지도 모르겠다. - 황혜성의 자전 에세이 <열두 첩 수라상으로 차린 세월> 중 정길자 씨가 쓴 ‘50대가 부럽다’ 중에서
스승의 부고를 듣고 달려갔을 때 세 명의 딸이 자신의 상복까지 맞춰놓았더란다. 어느덧 돌아가신 지 1년이 다 되어가는데도 환갑의 제자는 아직도 어머니 같은 스승을 떠올릴 때면 목이 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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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세상에 웬 궁중음식이냐고?
모든 이론과 학문은 최종에는 인간에게 이롭게 쓰이는 것이 목적이다. 음식도 마찬가지여서 사람이 푸근하게 정을 느끼면서 먹을 수 있는 음식을 만들어야 한다. 기쁜 마음으로 정성들여 음식을 만들면 먹는 이에게도 그 마음이 전해지는 법. “어머니가 제일 싫어하셨던 말이 ‘식사食事하라’는 말이었어요. 뜻을 풀어보면 ‘밥 먹는 일하자’잖아요. ‘밥 먹는 걸 일로 생각하지 마라, 너무 딱딱하지 않냐’고 하시면서 ‘진지 잡수세요’라는 말을 쓰라고 이르셨어요.” 실제로 궁중음식연구원은 예나 지금이나 ‘밥 인심’ 후하기로 소문이 자자하다.
밥 때에 오는 누구라도 한자리에 둘러앉아 먹을 수 있도록 밥상을 차리는 게 대물림되고 있다. 식구들이 함께 모여 어머니가 지어준 밥을 먹는 것은 정을 먹는 것. 그 밥상머리에서 윗사람, 아랫사람을 배려하고 존경할 줄 아는 교육이 이루어지는 법이고, 결혼해 살림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익혀야 하는 것이 음식이다. 한데 지금은 그 흔했던 김치도 사 먹는 게 당연해져서, 오히려 담가 먹는 사람을 진귀한 동물 보듯 한다. 그런 마당에 왕도 없고 궁도 없는 요즘 ‘궁중음식’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
1 캔디처럼 활달한 성격의 정길자 씨는 한복려 씨의 든든한 동반자이자 조력자.
2 병과 만들 때 빠질 수 없는 다식과.
“시대에 따라 귀하고 좋은 음식은 바뀌게 마련입니다. 옛날에는 고기가 귀했기 때문에 궁중음식에는 고기 음식이 많았던 거예요. 반면에 서민들은 채소나 생선을 먹었지요. 요즘은 모든 재료와 양념이 넘쳐나고 ‘맛’도 지나쳐서 뭐가 맛있는지 모르게 돼버렸습니다. 그러다 보니 옛날에 먹던 맛처럼 단순한 것이 맛있다고들 하지요. 가난했던 시절에는 흰쌀밥에 고깃국이 최고였지만 지금은 피해야 할 음식이 됐잖아요. 서민이 먹던 나물이나 생선을 최고로 치고, 그것도 모자라 구황식품으로 먹던 도토리나 메밀을 건강식품으로 챙겨 먹는 정도가 됐다니까요. 결국 궁중음식이라는 것은 그 시대가 요구하는 최고의 재료로 정성 들여 제대로 만드는 음식이라는 데 의미가 있습니다.”(한복려) “궁중음식을 너무 일반인들과 거리를 두고 멀게 생각하는데, 사실 <원행을묘정리의궤園幸乙卯整理儀軌>(정조가 혜경궁 홍씨를 모시고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소를 참배하러 간 화성 행차를 기록한 것)를 보면 소루장잇국, 배춧국, 냉잇국, 북엇국 등이 다 있어요. 전국 각 고을에서 들어온 진상품을 가지고 솜씨 좋은 손으로 만든 것이 궁중음식이지 궁에서만 먹고 서민들은 안 먹은 것이 아니에요. 별난 사람이 별나게 먹은 것이 궁중음식은 아니랍니다.”(정길자)
만약 조선시대로 돌아간다면 두 사람은 분명 궁궐의 주방 상궁으로서 현란한 요리 솜씨를 뽐내며 살고 있지 않을까? 아니나 다를까, 황혜성 선생 팔순 때 한복려 씨는 ‘조대비팔순잔치’를 기획해 손수 시나리오를 쓰고 잔칫상과 의상까지 궁중 스타일 그대로 재현해드렸다. 궁중의 조 대비를 위해 아들은 왕으로 분장하고, 며느리는 왕비, 세 딸은 좌명부, 전수자는 내명부, 회원들은 외명부, 가장 중요한 제조상궁은 정길자 씨가 맡았다.
“정성스러운 마음이 닿은 음식은 서로를 교감하게 하는 정의 메신저이고 상대를 행복하게 하는 연결고리일 것이다. 나의 그 많은 행복 속에 자랑할 것이라면 어머니 팔순 때 궁중의 조 대비가 잔치를 했던 것처럼 실제로 재현해드린 것이다. 궁인이 아니면서 궁중이라는 배경 속에 살아야 했던 어머니에게 팔순잔치를 보통 사람들처럼 해드릴 수는 없었다. 8월 15일, 그 더운 염천에 위엄 있게 대비복을 입고 아들 딸과 제자들의 축하를 받으시던 모습은 나의 행복 체험 일순위일 것이다.” -궁중음식연구원 홈페이지 ‘한복려의 음식일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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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시작
40년 동안 묵묵히 한길을 걸어온 이 둘은 말 그대로 ‘살아 있는 박물관’. 스승이 물려준 ‘책임감’과 ‘사명감’이 없었더라면 여기까지 올 수 있었을까? 문화재 지정을 받았다 해서 달라질 건 없다. 한 고개 넘어왔으니 처음 시작했을 때처럼 두 번째 시작일 뿐. “어머니에게 물려받은 사단법인 궁중음식연구원을 운영해야 하는 책임자로서의 역할과, 기능보유자로서 전수 교육에 대한 사명감 사이에서 어느 것 하나 소홀히 할 수 없는 현재의 상황은 저에겐 늘 숙제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을 제대로 전달하려면 이젠 전수 교육에 집중해야 합니다. 어머니가 끌어내신 것을 저희는 맛본 것에 불과해요. 앞으로 해야 할 일이 더 많은데 우리끼리는 부족해요. 저희 뒤를 이어 궁중음식에 평생 몸담을 사람이 있어야지요.”(한복려) “다시 시작이에요. 선생님이 그러셨던 것처럼 더 열심히 공부해야지요. 선생님은 호기심과 열정만큼은 20대보다 더 젊은 분이셨어요. 그분 혼자 하신 일을 우리는 둘이 해도 다 못 따라가요.”(정길자)
40년지기 동창, 평생을 함께해온 동료, 세상의 어떤 말을 해도 걱정이 안 되는 친구, 침묵이 흘러도 편안한 사이지만 한 번도 ‘길자야’ ‘복려야’ 하지 않고 서로를 ‘선생’ 또는 ‘원장’이라 부른다. 졸업 후에는 자신들을 꼬박꼬박 ‘선생’이라 부르셨던 스승님의 영향이란다. 이런 모습을 두고 사람들은 ‘존중’이라고 말한다. “앞으로 살아갈 날이 얼마나 될지 모르지만 같은 길을 함께 나아갈 수 있는 동지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요. 둘이 같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의지가 되고 큰 힘이 되지요.”
나이 육십에도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두 사람과 함께 사진 촬영을 핑계 삼아 운현궁으로 나들이를 갔다. 궁궐에 깃든 가을 오후의 햇살은 이 두 인간문화재를 이로당 대청마루에서, 돌담 아래서 ‘하하하 호호호 재잘재잘’ 꿈 많았던 소녀 시절로 되돌려놓았다. 촬영이 끝나고 정길자 씨가 “이렇게 예쁘게 꽃단장한 김에 여권사진 찍으러 가야겠다”고 한다. 그 말에 맞장구치듯 한복려 씨도 여권사진이 필요하단다. 운현궁 돌담을 따라 살랑살랑 두 폭의 치맛자락이 멀어져간다. 살아 있는 두 명의 박물관은 그렇게 안국동 사진관으로 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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