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쪽) '세븐 버즈 Seven Birds'(2007)
(오른쪽) <행복> 11월호 표지 작품 '99개의 창'(2007) 앞에 안즌 정경미 작가, 숫자 99는 아무 의미가 없다고 한다.
바탕색을 완성하면 공판화 기법으로 촉감의 느낌을 낸다. 실제 그림을 보면 점자책처럼 오돌토돌하게 돌출되어 있는 것들이 있는데, 이것이 공판화 기법을 이용한 작업이다. 이 작업을 마친 뒤에는 사진 작업과 전사轉寫(이미지나 문자를 그대로 화면에 옮기는 일) 작업에 들어간다. 길에서 찍은 생명력 넘치는 잡초나 그가 직접 기르는 화초를 찍은 사진이나 오브제를 원하는 톤과 크기로 조절해가며 수백 장씩 복사한 뒤 작품에서 사용할 소재를 선택해 마치 붓으로 원하는 색을 칠하듯 복사한 이미지를 배치한다. 그 다음에 수성 재료를 이용한 전사 작업에 들어가는데, 표지 작품 ‘99개의 창’에서 볼 수 있는 나무, 이파리 등 건물 뒤편에 있는 자연적인 것들이 모두 이 과정을 통해 완성한 것이다. 그리고 다시 그 위에 페인팅 작업을 덧붙인다. 그의 화면은 이러한 과정이 수없이 반복된다.
(왼쪽) '온 마일 레일On My Rail시리즈 중 6' (2007)
회화나 드로잉, 판화, 사진 등 여러 가지 기법을 활용하는 데다 섬세하고 꼼꼼하게 작업해야 하는 까닭에 하나의 작품을 완성하기까지 보통 2~3개월이 걸린다. 그가 이렇게 다양한 기법을 혼용해 작품을 완성하는 것은 재료적인 실험을 많이 하는 까닭도 있지만 생명은 촉각·시각·청각 등 오감을 통해 느낌을 주고받는 것임을 캔버스 위에서 적극적으로 표현하려는 작가의 의지 때문이기도 하다. 그리고 표현하고자 하는 대상에 적합한 기법을 적용하다 보니 이렇게 다양한 장르가 결합된 작품이 탄생한 것.
“작업하는 사람으로서 회화만 하기에는 열정이 너무 많았어요. 시대의 유행과 상관없이 여러 장르의 기법으로 작품을 했었습니다. 알고 하는 것과 모르고 하는 것은 다르듯이, 기법도 충분히 다루어봤을 때 취사선택이 가능하며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지요.”
그가 첫 개인전에서 선보였던 작품들은 인간이 삶을 영위하는 터전인 도시와 자연의 풍경을 작품의 출발점으로 삼는 추상 풍경화. 지금도 관심사는 그때와 비교해 크게 달라진 것은 없지만 표현 기법에서는 많은 차이를 보인다. 내용을 담는 그릇의 크기와 깊이가 넓고 깊어졌다고 할까? 그렇다면 아마도 20여 년 동안 한 가지 주제를 깊이 연구한 덕분에 지금과 같은 창의적인 자기 세계를 구축할 수 있게 된 게 아닐까 싶다.
(오른쪽)
'온 마일 레일On My Rail시리즈 중 4' (2007)
“삶이란 하나하나를 깨달아가는 여정이 아닐까요? 저의 경우 어떤 사건이나 사물을 봤을 때 느끼는 감동, 즉 마음을 움직이는 순간들이 차곡차곡 저장되었다가 그림으로 표현되는 것 같아요. 많은 경험 속에서 사람이 성숙하듯이 작품도 넓고 깊어지겠지요. 요즘엔, 작품은 내가 가진 그릇을 그대로 표현하는 그릇이니 삶 자체가 예술이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가 건물을 통해 그의 세계를 드러내는 것은 건축을 좋아하는 개인적인 취향도 있지만 건축에 인류의 시간, 역사와 정치, 음악 요소, 수학, 사상 등이 그대로 녹아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지난해 그는 러시아 여행을 다녀왔는데, 그곳에서 본 아름다운 묘지를 잊을 수 없다. 오래된 공간에 시간의 때가 묻어 있는 것이 그대로 느껴졌다. 각각의 묘지들의 비석과 조형물 등은 망자를 위해 정성 들여 만든 아름다운 예술품이었다. 그중에서 똑같은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는 생각했다. ‘죽은 자들을 위한 곳인데, 뭐에 홀린 것같이 왜 이리도 아름다운가? 여기서 생명이 피어나는구나’ 하고.
“결국 사람은 자연으로 돌아가요. 조금씩 나이를 먹으니까 자연만큼 인간을 풍요롭게 하는 건 없다는 걸 알게 되는 것 같아요. 왜 작품 활동을 하냐고요? 창조주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고 싶어서겠지요. 저를 가장 솔직하게 표현하는 것을 찾아 살아 숨 쉬는 그림, 소통하고 배려하는 그림을 그리고 싶어요.”
표지 작품 ‘99개의 창’은 고난과 역경을 뛰어넘어 사람과 자연이 함께하는 낙관으로 가득하다. 창이 많은 집은 자연과 소통하고 교감할 수 있는 길이 많다. 이 작품에서 집은 사람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 같다.
프로필
1963년 부산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고등학교를 마쳤다. 이화여대 서양화과와 대학원을 졸업하고 1993년 관훈 미술관에서 첫 개인전을 연 뒤 여섯 번의 개인전을 열었다. 광주비엔날레를 비롯한 1백 회의 기획·단체전에 참가했다. 대학원에 재학 중이던 1986년 한국 현대판화공모전에서 수상하며 판화 작업에도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이화여대와 상명대학에서 후학들을 지도했으며 2008년 청담동 가산화랑에서 초대전이 열린다.
- 작가 정경미 씨 판화, 사진, 회화로 만든 사랑이 자라는 집
-
<행복> 11월호 표지 작품은 정경미 씨의 ‘99개의 창’(2007)이다. 초현실적인 경향의 그림처럼 보이지만 단순한 그림이 아니다. 판화, 사진, 드로잉, 회화적인 기법이 쓰인 혼합 작품이다. 집 뒤편의 하늘색 바탕은 칠을 여러 번 거듭해 만든 색이다. 여린 빛깔이지만 이 하늘빛 하나 내는 데 여러 가지 색이 들어갔다. 그는 이처럼 층층이 어우러져 만들어진 색을 좋아한다. 아이보리인 건물 색도 실은 많은 색을 섞어가며 반복해서 칠한 것이다. 오래된 느낌의 은은한 색을 선호하는 그의 취향은 색을 만들 때에도 적용된다.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07년 11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