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해서 아이 셋을 낳은 뒤, 정성옥 씨는 어느 날 문득 할머니의 옷장 앞에 선 어린 자신을 떠올렸다. 새삼 옷장 문에는 꽃 주위로 나비와 새가 노니는 그림이 그려졌다는 사실을 기억했다. ‘아, 그 화조도가 민화였구나!’ 그를 향해 달콤하게 손짓하던 옷장의 민화가 만져질 듯 생생하게 떠올랐다. 그는 곧장 문화센터의 민화 강좌에 등록했다. 벌써 14년 전의 일이다.
처음에는 취미로 시작했다. 그러나 이내 민화에 깊게 몰입했고, 안료 배합 등을 좀 더 전문적으로 배우기 위해 인사동의 민화 공방을 찾았다. 그리고 작년에 첫 개인전을 열었다. 정성옥 씨는 조선시대 민화를 복원·재현하면서 여기에 고유의 해석으로 창작을 가미하는 작가다. 그래서 그의 작품은 대부분 원본이 존재한다. 가령 이번 표지 작품은 일본 도쿄민예관에서 발견한 두 폭짜리 병풍과 짝을 이루는 나머지 한 점을 우연히 찾게 되면서 작업에 들어간 것이다. 그의 작품이 ‘따라 그리기’가 아닌 이유는 원작과의 치열한 대화를 통한 해석이 선행되기 때문이다. 낙관이 찍혀 있지 않아 작자를 알 수 없는 그림에 정성옥 씨는 존경하는 마음으로 현대의 호흡을 불어넣고 있다.
간절한 염원을 꾹꾹 새긴 민화 “민화는 ‘어떻게 하면 잘 먹고 잘 자고 잘 쌀 수 있을까?’라는 원색적인 욕망을 노골적으로 표현했다는 점이 재미있어요. 어떤 이들은 유치하거나 저급하다고 이르는데, 저는 옛사람들의 기운찬 생활상을 엿볼 수 있어서 즐거워요.” 예컨대 조선의 그림쟁이는 “남편이 출세할 수 있는 그림 좀 그려주세요”라는 아낙의 의뢰를 받으면 관직 등용을 상징하는 공작 깃털이나 과거 급제를 상징하는 살구꽃 등을 넣은 민화를 그렸다. 이처럼 민화는 상징적인 도형투성이다. 가령 3천 년마다 꽃이 피고 열매가 맺는다는 전설이 깃든 천도복숭아는 장수를, 많은 씨를 품은 석류는 다산을 상징하며 가지나 고추, 죽순은 남성을, 수박이나 참외는 여성을 상징한다. 평안을 상징하는 화병, 번뇌망상을 태워 학문 정진을 상징하는 향로, 번영과 성장을 뜻하는 부채 등은 책거리(서책을 중심으로 문방구류 및 사랑방 기물을 그린 정물화)에 자주 등장하는 기물이다.
(위) 맨 오른쪽에 걸린 작품은 세 폭짜리 책거리 중 하나로 이번 표지 작품으로 선정되었다. 월력지에 채색, 2006
(아래) 장지에 채색, 2002
정성옥 씨가 최근 5년 동안 민화 중 유독 책거리에 천착한 것도 여느 민화가 탄생한 배경과 다르지 않다. “두 아이가 대학 입시를 앞두고 있었거든요. 여느 부모처럼 아이가 좋은 대학교에 들어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책거리를 그렸어요.” 새벽 2시까지 아이들이 공부하는 동안 작업에 몰두했다. 그는 만일 사람들이 자신의 작품을 좋아한다면 이는 그림에 담긴 ‘기운’이 끌어당겼기 때문일 것이라며 겸손해한다. “제 책거리엔 ‘간절히 기도하는 마음’이 참으로 진하게 새겨 있을 거예요.” 그 염원 덕인지 사춘기 때 그리 방황하던 아이의 대학 진학은 성공적이었다.
요즘 사람들이 민화를 주목하는 이유 책거리는 민화 중에서도 특히 조형미가 독특하기로 손꼽힌다. 가장 큰 이유로 정물을 묘사한 시점이 특이하다는 점을 든다. 우리가 학창 시절부터 배워 익숙해진 구도는 서양화에서 유래했으며, 시점이 하나로 고정되어 있다. 그런데 민화는 바라보는 사람이 위치를 이동해가며 대상을 그렸다. 화폭 하나에도 화병은 위에서 내려다본 모습으로, 과일 그림은 아래에서 올려다본 구도로 그렸다. 이를 다시점多視點 구도라고 일컫는다. 시대에 따라 책거리 형식이 조금씩 달라지는 양상도 흥미롭다. 초기에는 중국 청나라의 장식용 책장인 다보각에 책과 기물을 질서정연하게 진열한 그림이었다. 이후 민화가 서민에게 확산되면서 복을 상징하는 친숙한 기물이 등장했다. 나중에는 책꽂이 틀마저 사라져 가지런히 도열했던 기물들이 개성 있는 구도를 이루었다. 정성옥 씨는 이를 “마음이 보고 싶은 대로 그린 것 같다”고 읽는다. “자유분방한 자기만의 해석이 돋보이는 현대미술처럼, 민화의 자유분방한 기법이 요즘 사람들을 이끄는 것 같아요.”
자식이 잘되기를 기원하는 기쁜 마음으로 책거리를 그리기 시작했지만, 어느덧 그가 부엌에 마련한 작업실에서는 자기와의 치열한 싸움이 벌어지고 있었다. 표지 작품은 여섯 번 망친 뒤 일곱 번째 탄생시킨 그림이다. “펜으로 그었을 법한 세밀한 선으로 세부 묘사를 하는 작업이 유난히 많은 작품이었어요. 만족스러울 때까지 그리고 또 그리다 보니 나중에는 그만두고 싶을 만큼 온몸이 저렸어요. 그 막바지 즈음이었을 거예요. 눈 감고도 그 가늘디가는 선이 흔들림 없이 곧게 뻗어나왔습니다.” 마치 집착을 놓는 순간 활이 과녁에 들어맞듯이 말이다.
정성옥 씨는 앞으로 민화를 생활 공간에 끌어들일 방법을 모색할 예정이다. “아직은 아파트에 민화 병풍을 펼쳐두기가 좀 생경하지요. 모던한 공간에서도 민화를 낯설지 않게 즐길 수 있는 길을 찾아보고 싶습니다.”
1,2 장지에 채색, 2001
1959년에 태어난 정성옥 씨는 결혼 뒤 취미로 민화를 시작했다. 1993년 문화센터에서 민화 전수자 최덕례 선생에게 민화의 기초와 멋을 배웠고, 2006년부터 궁중화연구소의 윤인수 선생에게 사사하며 민화 전통 기법 자연 채색을 익혔다. 아홉 번의 단체전을 거쳐 2006년 경인미술관에서 첫 개인전 <소망이 깃든 책거리>전을 열었다.
처음에는 취미로 시작했다. 그러나 이내 민화에 깊게 몰입했고, 안료 배합 등을 좀 더 전문적으로 배우기 위해 인사동의 민화 공방을 찾았다. 그리고 작년에 첫 개인전을 열었다. 정성옥 씨는 조선시대 민화를 복원·재현하면서 여기에 고유의 해석으로 창작을 가미하는 작가다. 그래서 그의 작품은 대부분 원본이 존재한다. 가령 이번 표지 작품은 일본 도쿄민예관에서 발견한 두 폭짜리 병풍과 짝을 이루는 나머지 한 점을 우연히 찾게 되면서 작업에 들어간 것이다. 그의 작품이 ‘따라 그리기’가 아닌 이유는 원작과의 치열한 대화를 통한 해석이 선행되기 때문이다. 낙관이 찍혀 있지 않아 작자를 알 수 없는 그림에 정성옥 씨는 존경하는 마음으로 현대의 호흡을 불어넣고 있다.
간절한 염원을 꾹꾹 새긴 민화 “민화는 ‘어떻게 하면 잘 먹고 잘 자고 잘 쌀 수 있을까?’라는 원색적인 욕망을 노골적으로 표현했다는 점이 재미있어요. 어떤 이들은 유치하거나 저급하다고 이르는데, 저는 옛사람들의 기운찬 생활상을 엿볼 수 있어서 즐거워요.” 예컨대 조선의 그림쟁이는 “남편이 출세할 수 있는 그림 좀 그려주세요”라는 아낙의 의뢰를 받으면 관직 등용을 상징하는 공작 깃털이나 과거 급제를 상징하는 살구꽃 등을 넣은 민화를 그렸다. 이처럼 민화는 상징적인 도형투성이다. 가령 3천 년마다 꽃이 피고 열매가 맺는다는 전설이 깃든 천도복숭아는 장수를, 많은 씨를 품은 석류는 다산을 상징하며 가지나 고추, 죽순은 남성을, 수박이나 참외는 여성을 상징한다. 평안을 상징하는 화병, 번뇌망상을 태워 학문 정진을 상징하는 향로, 번영과 성장을 뜻하는 부채 등은 책거리(서책을 중심으로 문방구류 및 사랑방 기물을 그린 정물화)에 자주 등장하는 기물이다.
(위) 맨 오른쪽에 걸린 작품은 세 폭짜리 책거리 중 하나로 이번 표지 작품으로 선정되었다. 월력지에 채색, 2006
(아래) 장지에 채색, 2002
정성옥 씨가 최근 5년 동안 민화 중 유독 책거리에 천착한 것도 여느 민화가 탄생한 배경과 다르지 않다. “두 아이가 대학 입시를 앞두고 있었거든요. 여느 부모처럼 아이가 좋은 대학교에 들어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책거리를 그렸어요.” 새벽 2시까지 아이들이 공부하는 동안 작업에 몰두했다. 그는 만일 사람들이 자신의 작품을 좋아한다면 이는 그림에 담긴 ‘기운’이 끌어당겼기 때문일 것이라며 겸손해한다. “제 책거리엔 ‘간절히 기도하는 마음’이 참으로 진하게 새겨 있을 거예요.” 그 염원 덕인지 사춘기 때 그리 방황하던 아이의 대학 진학은 성공적이었다.
요즘 사람들이 민화를 주목하는 이유 책거리는 민화 중에서도 특히 조형미가 독특하기로 손꼽힌다. 가장 큰 이유로 정물을 묘사한 시점이 특이하다는 점을 든다. 우리가 학창 시절부터 배워 익숙해진 구도는 서양화에서 유래했으며, 시점이 하나로 고정되어 있다. 그런데 민화는 바라보는 사람이 위치를 이동해가며 대상을 그렸다. 화폭 하나에도 화병은 위에서 내려다본 모습으로, 과일 그림은 아래에서 올려다본 구도로 그렸다. 이를 다시점多視點 구도라고 일컫는다. 시대에 따라 책거리 형식이 조금씩 달라지는 양상도 흥미롭다. 초기에는 중국 청나라의 장식용 책장인 다보각에 책과 기물을 질서정연하게 진열한 그림이었다. 이후 민화가 서민에게 확산되면서 복을 상징하는 친숙한 기물이 등장했다. 나중에는 책꽂이 틀마저 사라져 가지런히 도열했던 기물들이 개성 있는 구도를 이루었다. 정성옥 씨는 이를 “마음이 보고 싶은 대로 그린 것 같다”고 읽는다. “자유분방한 자기만의 해석이 돋보이는 현대미술처럼, 민화의 자유분방한 기법이 요즘 사람들을 이끄는 것 같아요.”
자식이 잘되기를 기원하는 기쁜 마음으로 책거리를 그리기 시작했지만, 어느덧 그가 부엌에 마련한 작업실에서는 자기와의 치열한 싸움이 벌어지고 있었다. 표지 작품은 여섯 번 망친 뒤 일곱 번째 탄생시킨 그림이다. “펜으로 그었을 법한 세밀한 선으로 세부 묘사를 하는 작업이 유난히 많은 작품이었어요. 만족스러울 때까지 그리고 또 그리다 보니 나중에는 그만두고 싶을 만큼 온몸이 저렸어요. 그 막바지 즈음이었을 거예요. 눈 감고도 그 가늘디가는 선이 흔들림 없이 곧게 뻗어나왔습니다.” 마치 집착을 놓는 순간 활이 과녁에 들어맞듯이 말이다.
정성옥 씨는 앞으로 민화를 생활 공간에 끌어들일 방법을 모색할 예정이다. “아직은 아파트에 민화 병풍을 펼쳐두기가 좀 생경하지요. 모던한 공간에서도 민화를 낯설지 않게 즐길 수 있는 길을 찾아보고 싶습니다.”
1,2 장지에 채색, 2001
1959년에 태어난 정성옥 씨는 결혼 뒤 취미로 민화를 시작했다. 1993년 문화센터에서 민화 전수자 최덕례 선생에게 민화의 기초와 멋을 배웠고, 2006년부터 궁중화연구소의 윤인수 선생에게 사사하며 민화 전통 기법 자연 채색을 익혔다. 아홉 번의 단체전을 거쳐 2006년 경인미술관에서 첫 개인전 <소망이 깃든 책거리>전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