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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두, 김종우, 김호석, 이상원, 황주리 화가 5인이 말하는 여행 영감은 길 위에서 태동한다
유독 여행을 좋아하는 작가들이 있다. 역마살이라도 낀 듯 집을 나선다. 한 지역을 집중적으로 찾는 작가도 있고 여러 지역을 두루 여행하는 작가도 있다. 이들에게 여행은 마음을 비우는 비움이거나 또는 온 에너지를 작품에 쏟아낸 뒤의 채움이다. 이들에게 여행은 예술의 고향이다.

1 집중 가뭄과 강추위가 겹쳐 오는 겨울 재난 ‘조드’(2005)는 공포의 다른 이름이다.
2 어린 양과 함께 길 떠난 부모와 어미 양을 기다리는 소년들. ‘천국의 아이들’(2003).
3 여행 떠날 때면 챙기는 지도.
4, 5, 6 소변을 보러 나갔다 달빛에 비친 암각화를 발견하게 된 김호석 씨는 서구 미술 이론이나 중국 화론으로 접근할 수 없는 암각화를 만났다. 그리고 전문적으로 공부해 박사학위를 받았다.

문명의 독소 해독해주는 사막과 고원의 생명 화가 김호석
‘조선의 미감’을 회복해 그것이 인류 보편의 미감으로 되는 길을 꾸준하게 모색해온 그는 지난 2002년 개인전을 마친 뒤 고비 사막으로 여행을 떠났다. 전시 준비에 매진하느라 눈썹이 우수수 떨어지도록 상한 몸을 이끌고 기어이 그곳으로 간 것은 전시 후의 허망함과 위로받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다. 이동하고 싶을 때 이동하고, 쉬고 싶을 때 쉬고, 바람과 별에게 길을 물어보는 여행. 지상의 모든 것과 친구가 되고, 지구 돌아가는 소리가 들리는 그곳, 바람의 고향에서 그는 인간 중심의 생명관이 전복되는 경험을 하게 되었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이 세상의 전부라고 생각하는 자만심에서 깨어났다. 동물 시체가 썩은 자리에서 예쁜 꽃이 피어나는 것을 본 뒤 죽음과 삶이 동일한 것임을 자각했다. 이후 3년 동안 그곳을 찾은 게 마흔여덟 번, 1천여 일이다. 그러다 보니 위로받고 싶고 비워내고 싶은 욕심마저 비워지는 자유로운 경지. 수없는 경험이 응축되어 평면으로 드러난 그의 그림에는 정작 눈으로는 볼 수 없는 것들이 그려져 있다. 예전의 그는 그곳을 보기 위해 떠났지만 지금은 이곳을 보기 위해 떠난다.
 

1 김종우 씨는 세네갈에서 바오밥 나무에 앉아 잠자고 있는 까마귀 떼를 본 순간 경외감과 신비감을 느꼈다. ‘낙원’(2007).
2 모래 색깔이 붉은 나미비아 사막.
3 나미비아 사막의 석양. 이 석양을 본 뒤 그는 아프리카 예술의 빨간색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4 그는 첫 아프리카 여행에서 서부 지역 20일, 남동부 지역 20일을 여행했다. 사진은 서부 아프리카 말리 젠느 사원.
5 남아공 케이프타운 테이블 산에서 바라본 풍경. 남동부 지역은 유럽과 흡사하다.


아프리카 자연에서 발견한 예술의 원형
화가 김종우
그가 아프리카 예술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20년 전. 친구이자 갤러리 아프리카를 운영하는 철학박사 정해광 씨를 통해서였다. 그러나 아프리카 여행을 처음 떠난 것은 올해 초. ‘세계일보 18돌 특집 아프리카 화첩 기행’ 기획이 계기가 되었다. 이 여행은 그의 작품 세계가 변화하는 데 중요한 기점이 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도저히 발견하기 어려울 것 같은 붉은 석양, 나미비아 사막의 붉은 모래, 시간을 30년 전쯤으로 되돌린 것 같은 서부 아프리카 오지 마을 사람들, 바오밥 나무에 앉아서 자고 있던 까마귀 무리들, 인간의 왜소함을 느끼게 했던 빅토리아 폭포…. 귀국한 뒤 그는 좀처럼 붓을 들지 못했다. 그러다 아프리카의 이미지를 재현하려던 그의 붓은 현상 이면의 본질과 원형을 파고들기 시작했다. 화선지와 먹을 사용했던 그는 서양화 재료를 적극 수용해 동양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그림의 소재와 주제도 달라졌다. 요즘 그는 우리 동양화와 아프리카 전통 미술을 접목한 새로운 동양화를 창작하기 위해 목하 고민 중. 올가을, 그는 서부 아프리카 작가들의 집단 창작촌으로 다시 떠난다.


(오른쪽) 수많은 순간들이 모여 있는 황주리 씨의 그림은 ‘행복’의 다른 이름이다. ‘삶은 어딘가 다른 곳에 …’(2002).


1 그의 그림은 자화상에서 시작해 타인, 그리고 거리로 확장되었다. ‘자화상, 내 이름은 베티’(2002).
2 ‘그대와 함께 춤을…’(2005).
3 유럽 어느 도시를 여행하다 찍은 휴지통 사진 위에 그린 그림.
4 이집트 여행 중 피라미드 앞에서.
5 크로아티아의 두보르브니크의 주택 사이로 난 골목.
6, 7 러시아와 중국을 여행할 때 사 온 기념품. 그는 예술은 ‘사라져가는 순간을 잡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8 돌은 단 하나도 같은 모양인 것이 없다. 돌 위에 그린 그림, ‘돌에 관한 명상’(2006).

지구 상의 문명을 받아들인 넓은 그림 화가 황주리
발칸, 시베리아, 뉴멕시코 등 전 세계를 누비는 그는 어릴 적 무척 내성적이었다. 친구들과 있는 시간이 불편해 수학여행도 가지 않는 소녀였다. 자신이 ‘여행광’임을 알게 된 것은 1987년, 서른 살의 나이에 뉴욕으로 유학을 떠나면서부터였다. 이후 그의 삶은 여행의 연속이었다. 여행을 통해 삶을 확장시켰다. 러시아의 골동 시소, 뉴욕과 불가리아와 루마니아의 쓰레기통, 네팔의 시장, 각 나라의 안경과 그림엽서와 돌멩이…. 그의 눈길은 나라마다 다른 색채가 담긴 사물들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세계를 확장시켰다. 사람과 삶에 관심이 많은 그가 인간의 흔적이라 할 수 있는 문명에 관심을 갖는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외연이 확장되면서 그의 작품 세계는 자화상에서 타인으로, 다시 거리로 넓혀졌다. 여행하는 동안 글쓰기를 즐겼던 그가 사진을 찍기 시작한 것은 10여 년 전. 사진을 찍으니 작품 세계는 또 새롭게 변화했다. 자신이 찍은 사진 위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것. 항시 새로움을 모색하기 때문일까? 그의 작품은 언제 봐도 새롭다.

 

1 마음 가는 대로 길을 다니다 마음에 걸리는 곳에서 머물곤 하는 이상원 씨는 인도에서 평화와 자유를 만났다. 마음에 있던 욕심이 물거품처럼 사라지는 것을 경험했다. 이후 그림에 더욱 열중하게 되었다. ‘영원의 초상’(2005).
2, 3, 4, 5, 6 그는 지금도 필름 카메라를 고수한다. 까무잡잡하고 선해 보이는 인도 사람들은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다.

인도에서 만난 자유·평등·평화의 얼굴 화가 이상원
그는 한때 초상화를 상업적으로 그렸던 적이 있다. 수천 명의 인물을 그리면서 얼굴 표정에 그 사람의 사상과 정신이 담겨 있음을 알게 된 그는 그 경험을 바탕으로 ‘동해인’ 시리즈를 그렸다. 동해안에 사는 촌로의 얼굴에서는 삶의 고단함이 뚝뚝 묻어났다. 그러다 벽에 부딪혔다. 표정을 표현하는 데서 한계를 느꼈던 모양이다. 생각다 못한 그는 인도로 떠났다. 2003년부터 2005년까지 네 차례 인도를 방문하며 바라나시나 갠지스 강 등에서 인도 서민들과 만났다. 그에게 여행이란 인생 공부를 하는 여정. 인도의 외진 곳을 여행하며 신경을 콕콕 건드리는 곳이 나타나면 그곳에 체류하며 사진을 찍고 스케치를 했다. 악함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인도인의 얼굴에서 자유와 평화를 발견했다. 그들의 삶과 만나니 사심이 눈 녹듯 사라졌다. 그러나 그의 그림 속 인물은 실재하지 않는다. 수없이 많은 사람들을 만나며 얻은 순간의 강렬한 느낌들을 모으고 재구성해서 만든 가상의 인물. 별만큼 많은 정신이 모인 집합체다. 그래선지 피안의 세계에 있는 사람처럼 느껴진다.


 인도의 얼굴을 그리기 전 그는 ‘동해인’ 시리즈를 그렸다. 국내에서도 스케치 여행을 자주 떠났던 그는 바싹 마르고 세수 안 하고 주름이 늘어진 사람 관찰하기를 좋아한다. 즉석에서 크로키를 한 다음 서울에서 다시 작업한 스케치 그림.


1 역원근법에 따라 그린 김선두 씨의 그림에는 원경에 있는 것들이 더 크게 보이고, 가까이 있는 것들이 더 작아 보인다. 추억의 장소에 가면 멀리 있는 것이 더 크게 보이는가?
2 임권택 감독의 영화 <천년학>의 원작인 이청준 씨의 소설 <선학동 나그네>를 상징적으로 형상화한 그림. 산 모양새가 날개를 편 거대한 새처럼 보인다. 이 그림들은 <남도, 모든 길이 노래하다>(아지)에 수록된 작품들이다.
3 선학동 관음봉.
4 선학동으로 가는 길.
5 그는 이청준 씨와 여행하며 이야기 듣는 것을 좋아했다. 사진 속 인물은 이청준 씨.

수많은 이야기가 굽이굽이 펼쳐지는 시간의 길 화가 김선두
그의 고향은 전라남도 장흥이다. 고향을 떠난 지 오래건만 그는 지금도 1년에 대여섯 번 정도 고향을 찾는다. 예전에는 소설가 이청준, 시인 김영남 씨와 함께 동행하는 날이 많았다. 세 사람 모두 동향이다. 두 사람과 함께 남도 여행을 즐기던 시절, 그는 이청준 씨의 눈으로 고향을 바라보는 걸 좋아했다. 그러던 어느 날, 노작가가 들려주는 누추하고 빈한한 시대의 따뜻한 이야기가 육자배기 같은 구수한 남도 민요 가락으로 들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옛 친구가 없는 고향은 낯설다. 성인이 되어 찾아간 장흥은 몸속에 내재되어 있는 유년의 고향이 아니다. 그러므로 고향은 국토에 일직선으로 뻗어 있는 공간 길이 아니라 시간의 길을 통해야만 이를 수 있다. 옛 시간의 길을 굽이굽이 따라가다 보면 혼탁한 영혼과 마음이 정화된다. 원근법을 역으로 접근한 역원근법의 독창적인 산수화는 남도 여행에서 만난 논밭에서 영감을 얻은 것. 고향의 강렬한 색감을 표현하려다 보니 원색에 장지기법도 이용하게 되었다. 최근 여행길에서는 느리고 둥근 풍경을 만나고 왔다고 하니, 새로운 산수화의 탄생을 예고하는 것 같다.


김선래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07년 10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