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와 오래 인연을 맺어온 스웨덴 가구 브랜드 헴Hem의 전시장 속 이광호 작가의 모습. 헴을 위해 만든 헝크Hunk 의자, 글리프Glyph 테이블, 그의 적동 작업을 함께 전시했다.
서울리빙디자인페어, 밀라노 디자인 위크, 프리즈 서울, 그리고 밀라노 패션 위크까지. 올해 열린 굵직한 행사의 공통점은 모두 이광호 작가의 작품을 볼 수 있었다는 것이다. 최근에는 디진Dezeen 어워즈에서 올해의 디자이너 쇼트리스트 5인에 오르며, 국제적으로 가장 주목받는 한국 작가 중 한 명임을 다시 한번 입증했다.
2007년 대학을 졸업한 이후 작가로 활동하기 시작한 이광호는 2009년 밀라노 디자인 위크 당시 디자인 마이애미와 펜디가 주최한 전시 <크래프트 펑크>에서 샛노란 호스를 묶고 꼬고 휘감아 즉석에서 소파를 만드는 퍼포먼스를 선보이며 국제 무대에 강렬한 첫인상을 남겼다. 이후 디올·조 말론·포르쉐·에르메스 등 수많은 브랜드와 협업을 이어왔고, 그의 개인 작업은 몬트리올 장식미술관, 샌프란시스코 현대미술관, 홍콩 M+ 미술관 등에 소장되었다. 지금도 리빙, 공예, 패션, 아트의 업역을 넘나들며 손으로 만드는 행위를 하나의 세계로 확장하고 있다.
타일 브랜드와 협업해 건축자재를 개발하거나 브랜드를 위한 인스톨레이션 작업을 펼치고, 공간 디자인 스튜디오 아르와 프로젝트 그룹 NOL을 결성해 공간을 디자인하기도 한다. 이렇게 경계 없는 확장이 향하는 곳은 역설적으로 가장 깊고 가장 좁은 자신의 내면이다. 작업 반경이 넓어질수록 그의 세계는 깊이 침잠해 들어가 스스로를 파헤치고 재조립한다. 그 과정은 끝없이 풀었다 엮었다를 반복하며 쌓아가는 매듭처럼 집요하고, 열기의 흔적을 오롯이 표면에 드러내는 적동처럼 정직하다.
작가, 아티스트, 공예가, 디자이너. 그의 이름 앞에 어떤 수식어를 써야 할지 고민했다. 디자이너라고 적기로 결정한 것은 그 표현이 가장 자유롭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누군가에게는 흔들리지 않는 세계관으로 느껴졌을지 모를 그의 작업은 여전히 부딪치고 깨지며 만들어지는 과정 중에 있다. 선에서 면이 되고 형상을 갖고, 공간과 관계를 맺으며 비로소 제 역할을 발견하는 자신의 작품처럼 말이다.
This year, designer Kwangho Lee’s work surfaced across some of the world’s major cultural stages—from the Seoul Living Design Fair and Milan Design Week to Frieze Seoul and Milan Fashion Week. He was recently shortlisted as one of five Designers of the Year at the Dezeen Awards, further confirming his international stature.
Since launching his career after graduating in 2007, Lee first drew global attention with his 2009 Milan Design Week debut. At “Craft Punk”, organized by Design Miami and Fendi, he performed live, twisting and binding bright yellow hoses into a sofa—an act that immediately distinguished his voice. He later collaborated with brands such as Dior, Jo Malone, Porsche, and Hermès, and his works entered major collections including the Montreal Museum of Fine Arts, SFMOMA, and Hong Kong M+ Museum. Today, he continues to work across design, craft, fashion, and art, steadily expanding the possibilities of handmade creation.
He collaborates with tile brands on building materials, creates installations for companies, and designs spaces with Studio Arr and the project group NOL. Yet this outward expansion always circles back to the smallest but deepest place within himself. As his practice broadens, he turns further inward, continuously untying and reweaving the knots of his own world—a process as persistent and unguarded as heat-marked copper. He might be artist or craftsman, but designer fits for its freedom. His worldview shifts and rebuilds, like his pieces evolving from line to space. His practice stays in motion.
이광호
2007년 홍익대학교 금속조형학과를 졸업한 이후 작가로 활동을 시작했다. 다양한 재료가 지닌 특성을 탐구하고 그 과정에서 얻은 방식을 반복해 자신만의 작품을 완성한다. 시간성을 담고 있는 사물과 그 사물이 놓이는 공간의 관계, 그리고 더 나아가 그것을 만드는 자신과의 관계까지 자문하는 작업을 이어가고 있다. kwangholee.com
보테가 베네타 2026 S/S 컬렉션 쇼 인스톨레이션(2025)
보테가 베네타의 새로운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루이스 트로터의 첫 컬렉션 쇼를 위한 설치 작업. 전선을 엮은 옵세션 시리즈로 브랜드의 상징적 수공예 기법인 인트레치아토의 짜임을 재해석해 보테가 베네타의 장인 정신, 그리고 짜임과 반복의 미학을 시각화했다. 멀리서 보면 가죽 같은 독특한 질감이 드러난다. ©Bottega Veneta

에르메스 메종 긴자 윈도 프로젝트(2024)
에르메스 1백 주년을 기념하며 브랜드가 그간 지나온 여정을 동화적으로 해석하고, 매듭과 꼬임의 언어로 풀어냈다. 누구도 가보지 않은 망망대해를 항해하던 배가 수많은 닻을 내리는 모습, 형형색색 체인들이 닻과 함께 바닷속에 던져지는 순간, 바닷속에 잠들어 있던 상상력이 닻에 의해 다양한 장면으로 드러나는 순간을 표현했다.

적동 시리즈
2009년부터 이어온 장기 프로젝트. 적동의 물성을 극한으로 탐구하고, 전통 공예 기술을 현대적 조형 언어와 결합함으로써 재료 본래의 아름다움과 생명력을 시각화하는 작업이다. 초기 작업이 옵세션 시리즈의 형태에서 영감을 받아 정육면체나 직육면체 같은 단순한 형태의 가구를 만들었다면, 최근의 구리/ 칠보 연작은 점점 더 기능성을 배제하고 순수한 조각 혹은 설치미술 형태로 진화하고 있다. ©Salon 94 Design

Tide(2020)
일본 다지미 지역의 타일 브랜드 다지미 커스텀 타일즈와 협업한 타일 프로젝트. 짜임 작업에서 착안해 형태를 만들고, 다지미 지역의 전통적인 타일 생산방식을 결합해 제작했다. 타일을 매듭 형태로 디자인하고, 이 모듈을 나열하면 고리 패턴이 반복적으로 나타나며 옵세션 시리즈를 연상시키는 입체적인 표면이 만들어지도록 했다. ©Tajimicustomtiles

O 시리즈(2025)
알루미늄 업사이클링 브랜드 포맷Format과 함께 작업한 가구. 재사용 알루미늄 거푸집의 질감을 살리는 방향으로 하나의 조형 언어를 만들고, 이를 스툴과 체어, 벤치 세 가지 시리즈로 선보였다. O라는 이름은 명확히 규정되지 않은 무언가를 뜻한다. 누군가에게는 원,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영, 알파벳으로 불리기도 하며 읽는 이의 해석을 통해 새로운 의미를 얻게 되는 이름처럼 앞으로 계속해서 확장할 시리즈라는 의미가 담겼다.
프리즈 서울 2025에서 처음 공개했다. ©Format065

TCOC, The Color of Copper(2025)
씨씨타피스cc-tapis와 협업해 그가 가장 집중하는 재료인 적동의 매력을 카펫이라는 매개체로 치환한 작업. 적동의 질감, 용접을 통해 만들어진 색의 변화 등을 씨씨타피스의 독자적 핸드메이드 짜임 기술과 엮음 방식으로 구현했다. ©Luca Caizzi
“ 20년 가까이 작업을 해왔지만, 아직 만들어보지 못한 형태라든가 저를 완벽하게 투영하지 못한 시간을 생각해보면 처음의 시도에서 비롯된 여정이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고 느낍니다.”
소재에 대한 탐구에서 작업을 시작합니다. 소재의 어떤 면면이 흥미로웠나요?
어릴 때부터 소재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주변에서 흔히 보이는 것으로 무언가를 만들고 갖고 노는 것을 좋아했어요. 개인 작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했을 때도 그러한 탐험이 자연스럽게 작업의 주된 주제가 되었습니다. 오랫동안 하나의 소재를 다루면서 작업을 이어오다 보면 어느 순간 그 재료와 동질감을 느끼고, 저 자신과 동기화되는 듯한 느낌이 들어요. 그러한 시간을 다시 소재에 축적해 가는 행위가 작업을 지속하게 하는 가장 큰 원동력입니다. 하나의 소재를 깊이 다루는 일은 그 재료의 존재 의미를 찾아가는 과정인 동시에 저라는 존재의 의미를 찾아가는 과정이기도 했습니다.
전선이나 호스, 나일론 등을 꼬아 만드는 매듭 작업은 20년 가까이 이어지며 이광호의 시그너처로 자리 잡았습니다. 어떤 계기로 시작했나요?
특별한 계기가 있던 것은 아니었어요. 졸업 전시를 준비하며 저의 두 손만으로 무언가를 만들어보려고 시도한 것이 시작이었습니다. 선이라는 요소 자체에 흥미를 느꼈다기보다는 여러 재료 중에서 선을 택해 작업한 것이 지금까지 이어진 것에 가까워요. 20년 가까이 작업을 해왔지만 아직 만들어보지 못한 형태라든가 저를 완벽하게 투영하지 못한 시간을 생각해보면 처음의 시도에서 비롯된 여정이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고 느낍니다.
소재를 탐구하는 과정의 결과물이 가구라는 형태로 완결된 이유는 무엇인가요?
작업의 시작과 끝이 명확했기 때문입니다. 가구보다는 용도가 있는 사물이라는 표현이 더 적확해요. 작업이 끝나고서 의자에 앉아보거나 조명을 켜보기도 하면서 바로 써보는 행위 자체를 즐긴 것 같아요.
매듭 시리즈가 손으로 끊임없이 반복하는 노동의 시간이라면 적동 작업은 금속이 변화하는 순간을 품고 있습니다. 소재의 시간을 포착하고 있다고 해야 할까요. 결국 두 작업은 모두 시간을 물질화한 결과물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구리에 에나멜을 올리고 가마에 구우면 표면이 마치 도자기처럼 바뀝니다. 칠보라는 우리나라의 전통 기법인데, 저는 그 기법을 무조건적으로 재현하기보다는 재료의 특성이나 변화를 탐구하는 데 집중해왔어요. 구리는 다른 금속과 달리 무른 편이어서 금세 표면에 손자국이 찍히거나 상처가 나요. 그런데 여기에 에나멜을 덮고 구우면 반짝이고 강렬한 색상을 내면서 전혀 다른 모습이 됩니다. 반대로 에나멜을 칠하지 않은 구리의 표면은 열에 의해 산화하면서 마치 딱딱한 피부가 벗겨지고 새 피부가 돋아나는 듯한 모습이 되고요. 산화 과정을 겪으면서 표현할 수 있는 범위가 훨씬 다양해집니다.
이렇게 소재에 천착함으로써 이루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궁금해집니다.
소재를 변하게 하는 것은 소재를 ‘나’라는 존재로 치환하는 시도와 같습니다. 던지거나 구기기, 찢기, 태우기, 녹이기 등의 방식을 수차례 반복하는 과정을 거치며 저 또한 재료처럼 녹고, 구겨지고, 단단해집니다. 때로는 너무 단단해지다 찢기기도 하죠. 그 과정을 통해 들여다보고 싶은 것은 저 자신이라는 존재입니다. 소재처럼 새로운 환경에 맞춰 순응하고 때로 맞서기도 하며 달라지는 순간을 통해 스스로를 살피고 구체화하게 됩니다. 결국 제 작업은 이광호라는 존재와 그의 시간이 소재를 통해 어떤 식으로 해석되고 드러나는지를 탐구하는 과정이라 할 수 있어요.
가구와 공간, 설치 작업까지 미지의 영역에 꾸준히 도전할 수 있는 원동력을 꼽는다면요.
유연한 태도요. 그 덕분에 저 자신이 만든 무언가를 오롯이 즐길 수 있었습니다. 제 이름 앞에 무언가를 붙임으로써 가능성이 낮아지지 않도록 노력해왔기에 지금의 확장을 이룰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개인 작업과 달리 브랜드와 협업하는 일은 어떤 즐거움이 있나요?
브랜드의 역사와 가치를 알아가면서 가장 많은 배움과 경험을 얻게 됩니다. 그렇게 얻은 경험과 가능성은 개인 작업을 할 때도 다른 시도로 이어져요. 항상 흥미롭게 작업하고 있습니다.
공간 디자인 스튜디오 아르와 함께 NOL이라는 프로젝트 그룹을 결성해 공간 작업을 하기도 했습니다.
가구가 놓이는 곳 또한 결국은 공간이기에 제 작업과 이어져 있다고 봅니다. 그리고 공간을 직접 기획하는 일은 그 자체로 흥미로웠어요. 이를테면 공간에서 사람이나 가구는 어떻게 존재하면 좋을지, 빛은 어떻게 사용되어야 하는지, 문은 어떤 식으로 열고 들어가야 하는지, 손잡이는 어떤 모습이면 좋을지, 바닥은 무슨 재료를 사용해야 할지를 상상하는 일이 즐겁습니다. 배움과 경험의 영역이라 기회가 주어질 때마다 재미있게 하고 있어요.
작업을 하지 않을 때는 어떤 하루를 보내나요?
평소에도 세 아이와 제주에 오래 머무르곤 했는데, 코로나19가 터지면서 제주로 이주하게 되었어요. 제 일은 대부분 서울에서 진행하기 때문에 서울과 제주를 오가며 지내고, 작업을 하지 않을 때는 대부분 제주에서 집안일을 하고 아이들을 돌보거나 강아지와 산책하는 등 가족들과 시간을 보냅니다. 요즘에는 테니스를 즐겨 하고 있어요.
이광호의 다음 10년, 20년은 어땠으면 하나요?
이 질문이 곧 제가 꾸준히 작업하는 이유이기도 한데요, 아마도 20~30년 정도는 흐른 후에야 제 삶과 작업이 어땠는지 비로소 돌아볼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때가 되었을 때 사람들에게, 혹은 스스로에게 어떤 작가로 남았으면 하나요?
꾸준히 작업하는 작가로 기억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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