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식으로 지은 주택을 고쳐 갤러리로 만든 프리즈 하우스 서울. 요즘은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소재의 미감으로 가득하다.
8월이 되면 서울의 아트 애호가들은 조금씩 마음이 들뜨기 시작한다. 올해로 4회를 맞은 프리즈 서울이 곧 열리기 때문이다. 갤러리에서는 이 시기를 위해 가장 공들여 준비한 전시를 선보이고, 서울 전역에서는 다양한 퍼포먼스와 이벤트 소식이 하나둘 공지된다. 아트 신의 유명 인사들이 한국을 방문한다는 소식도 들려온다. 올해는 주목해야 할 이벤트가 한 곳 더 추가되었다. 바로 프리즈 하우스 서울의 개관이다. 2021년 런던에 문을 연 프리즈 No.9 코크 스트리트에 이어 두 번째로 선보이는 공간으로, 해외에 여는 것은 최초다. 프리즈 서울 디렉터 패트릭 리는 프리즈의 새로운 거점으로 서울을 택한 것이 매우 자연스러운 과정이었다고 설명한다. “서울이 지닌 문화적 감수성과 프리즈가 오랜 기간 함께해 온 신뢰를 바탕으로 한 결정이었어요. 프리즈 하우스 서울에서는 개관전 <언하우스>를 시작으로 페어가 끝난 후에도 다양한 전시와 문화 프로그램을 선보이며 예술계가 교류하는 장을 만들어가려 합니다.”
최대한 본래 모습을 유지하고 라인만 깔끔하게 정리한 화이트 큐브 공간. 천장도 콘크리트 구조체를 그대로 노출했다.
프리즈 하우스 서울이 들어선 약수역 일대는 옛 도심의 결이 여전히 남아 있는 동네다. 남산공원과 서울 성곽길, 경사진 언덕과 구불구불한 골목 사이로 디자인 스튜디오와 소규모 예술 공간이 옹기종기 모여 고유한 매력을 자아낸다. 프리즈는 이곳에 1988년 지은 2층 서양식 주택을 프리즈 하우스 서울의 장소로 점찍었다. 화려한 펜트하우스나 넓은 화이트 큐브 갤러리가 아닌, 1980년대의 시간이 머물러 있는 210㎡ 규모의 소담한 집을 선택한 것이다. “당시 한국의 주거 건축은 해외 문화를 수용하며 나름의 방식으로 발전하던 시기였어요. 그 흔적이 남아 있는 주택의 개성 있는 분위기가 인상적이었습니다. 갤러리로 바꾸더라도 그 매력은 유지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주먹 크기 화강암, 헤링본 패턴의 트래버틴, 원목 계단과 금속 난간까지 1988년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경사진 언덕에 자리한 주택은 첫인상부터 어딘가 남다르다. 단순히 과거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어서라기보다는 한 땀 한땀 공들여 지은 손맛이 곳곳에서 느껴져서다. 레노베이션을 담당한 사무소효자동 서승모 소장은 이 주택을 처음 보았을 때의 인상을 다음과 같이 회상한다. “건축은 안팎의 관계를 잘 설정하는 것이 가장 중요해요. 현관에서 마당을 바라봤을 때 놓인 수목의 위치라든가 중정과 하늘이 이루는 관계, 빛이 드는 공간과 어두운 공간의 균형 같은 것요. 이 집은 건축가가 그러한 부분을 많이 고민했음이 읽혀졌어요. 그리고 비록 요즘 스타일은 아닐지라도 공간 하나, 마감 하나까지 정성을 들인 티가 났고요. 주먹 크기로 손수 깎은 화강암이나 헤링본 패턴으로 깐 트래버틴 바닥 등 디테일은 지금보다 오히려 수준이 높았습니다. 이제는 이렇게 수고로움을 들여 짓는 방식을 쉬이 택하지 않으니까요.”
프리즈는 주택 자체로도 하나의 작품 같은 이곳을 다양한 창작자와 협업하고 전시, 북 토크, 퍼포먼스 등 다채로운 형식으로 예술을 선보이는 장소로 바꾸고자 했다. 프로젝트에 참여한 주체는 모두 네 팀. 프리즈 하우스 서울만큼이나 라인업이 화려하다. 시간이 깃든 건축물에 자신만의 언어를 더해 공예품처럼 작업하는 서승모 소장은 이번 레노베이션에 누구보다 적격이었고, 기획부터 시공까지 전시의 여러 분야를 아우르며 활약하는 아워레이보가 시공을 맡았다. 조경은 식물을 매개로 오브제부터 공간 설치까지 작업하는 오차원 오유미 대표가 담당했고, 마지막으로 프리츠커상 수상자인 건축가 SANAA가 파빌리온에 참여하며 화룡점정을 찍었다.
중정에는 천창을 통해 하루 종일 빛이 내리쬔다.
과거와 현재를 잇는 갤러리 하우스
건축가, 시공사, 조경가 모두가 가장 우선순위로 삼은 것은 주택이 본래 지니고 있던 정체성과 개성을 유지하는 것. “천창을 통해 종일 햇빛이 드는 중정과 이를 둘러싼 스킵 플로어 구조가 인상적이었어요. 2층 규모인데, 반 층씩 어긋나게 구성해 층마다 방이 하나씩 자리한 형식이었죠. 이 구조가 집의 핵심이라 생각했습니다. 두 가지 형식을 잘 보존하면서 나머지 방은 창을 모두 막고 화이트 큐브로 만들었습니다. 불필요한 벽을 제외하고는 방과 욕실 구조도 그대로 유지했어요.” 서승모 소장은 각각의 방은 작품에만 집중하는 미니멀한 화이트 큐브로, 중정은 작품이 걸린 집에 있는 듯한 느낌으로 집과 갤러리의 서로 다른 모습이 보이는 장면을 상상하며 작업했다. 계단실에서 중정을 향해 난 창은 모두 뚫어 공간이 하나의 흐름으로 이어지도록 했다. 이렇게 중정을 중심으로 서로 시선이 마주치는 구조 덕분에 각각의 실이 크지 않음에도 개방감이 살아 있다.
당대의 수공예 기술이 집약된 디테일도 고스란히 보존했다. 외벽이나 계단실 쪽마루, 원목 계단과 금속 난간은 그 시절의 손맛이 깃든 정교한 미감에 시간이 차곡차곡 쌓여 공간을 더욱 풍성하게 만든다.
프리즈 하우스 서울 프로젝트를 함께 한 이들. (왼쪽부터) 프리즈 서울 패트릭 리 디렉터, 사무소효자동 서승모 소장, 아워레이보 이정형 대표와 최현재 실장, 오차원 오유미 대표.
서승모 소장이 건축을 통해 과거의 주택과 지금의 갤러리를 연결하는 지점을 만들었다면, 아워레이보 이정형 대표와 최현재 실장은 이를 손에 잡히는 결과물로 구현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단순히 시공만 한 것이 아니라, 그간 전시 분야에서 종합적으로 일한 경험을 바탕으로 집이라는 이질적 형식에 전시 공간이라는 역할이 잘 안착하도록 도왔다. “전시 공간으로는 이 장소가 베스트가 아닐 수도 있어요. 넓은 화이트 큐브가 아니고, 개방감도 적어서 골목골목을 다니는 것 같은 느낌이죠. 그러나 그러한 점조차도 인상적이라고 느껴질 만큼 공간 자체가 매력적이었습니다. 한국에 있는 갤러리 중에서는 장소의 색깔을 이렇게까지 적확하게 지켜낸 곳이 없었을 거예요.” 이정형 대표는 화이트 큐브 공간은 디테일까지 최대한 깔끔하고 간결하게, 집의 요소를 남길 때는 가능한 한 정교하게 보존하는 것을 기준으로 작업했다. 전시 동선이나 작품의 출입 등 기능적인 부분도 문제없이 작동하도록 조율했다.
정원 또한 보존이 작업의 주요 원칙이 됐다. “정원에서 특히 인상적이던 오래된 소나무, 손으로 쪼아 만든 화강암 벽을 중심으로 기존 지형과 식물을 최대한 유지했습니다. 입구에서 떼어낸 석재로 디딤돌을 만들고, 묻혀 있던 디딤돌을 발굴해 패스를 만들기도 했어요.” 오유미 대표가 과거와 현재의 연결 고리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조성한 정원에 SANAA의 파빌리온이 들어서며 프리즈 하우스 서울의 마지막 퍼즐까지 맞춰졌다. 가운데가 오목하게 파여 일렁이는 수면을 닮은 의자를 둥글게 배치한 파빌리온은 그 자체로 하나의 커다란 연못처럼 느껴진다. 관람객은 의자에 앉거나 기대어 주변 풍경을 감상하며 쉬어갈 수 있다. 파빌리온을 설치하기 위해 한국을 방문한 SANAA 김현수 디렉터는 “정원이 담장 밖 동네와 갤러리를 잇는 열린 공간이 되길 바란다”며 소회를 전했다.
마당에는 프리즈 하우스 서울의 화룡점정이 되어줄 SANAA의 파빌리온을 설치했다.
사무소효자동과 아워레이보, 오차원, SANAA 네 팀은 1988년 지은 주택의 가치에 대한 공감을 바탕으로 집과 정원의 기억을 지금에 맞게 복원하고, 다시 시간이 흐르도록 했다. 프로젝트의 소회를 묻는 질문에 이정형 대표는 “역할과 기능이 조화로운 건축물이 만들어졌다면 이제 콘텐츠가 담겨 새로운 감각을 빚어내고 사람들에게 기억될 차례”라며, “오히려 이제부터가 시작”이라는 말을 남겼다. 그의 말대로 과거의 모습 위에 다채로운 예술의 기억이 더해질 프리즈 하우스 서울은 9월 3일 프리즈 서울과 함께 그 문을 연다.
프리즈 서울 2025
제4회 프리즈 서울은 키아프 서울Kiaf SEOUL과 동시에 개최하며, 전 세계 30여 개국에서 총 1백20개 갤러리가 참여한다. 프리즈 마스터스와 포커스 아시아 등 주요 섹션과 더불어 아시아 지역의 주요 전시 공간이 강한 존재감을 드러낼 예정이다.
기간 9월 3일(수)~6일(토)
장소 코엑스(서울시 강남구 영동대로 513)
문의 02-733-3706
프리즈 하우스 서울
주소 서울시 중구 동호로15길 17
문의 frieze.com/k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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